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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리 Jan 13. 2024

산으로 갈까 바다로 갈까 고민하다가 제주도에 갔다.

생일휴가 3부작


생일에는 혼자 있고 싶다.

9월 26일 가을, 한 해의 결말로 가는 계절이라 그런 걸까 소진된 마음을 점검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매년 태어난 날을 기점으로 생일휴가를 간다. 의식처럼.


세 번 정도 반복하면 나다운게 되는 건가.


작년에는 친구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제주로 가는 저녁 비행기를 탔었다.

숙소는 근처에 걸어갈 수 있는 바다만 있으면 돼.

기대 없이 체크인한 방에는 웰컴 음악으로 이소라 4집 앨범이 나오고 있었다.

사장님의 취향이 한가득인 CD장에서 내가 좋아하는 가수들 찾기.

투숙객들이 방명록에 남겨둔 온기를 만화책 보듯 넘겨보기. 가끔 눈물도 찔끔 흘리면서.

숙소 근처 혼술집에선 김동률이 나와서 하이볼을 세 잔이나 마셨어.


산울림 아저씨. 책등 독서.


폰놓고 술먹기
머리 위 호랭쓰 / 바다에서 책 읽으면 바람이 책 넘겨줌 / 돌아가는 비행기 기다리며 뽑은 행운


올해도 생일 휴가를 떠났다.

바빠도 너무 바빠. 기침하듯이 제주도로 튀었다.

혼자 있고 싶지만 그래도 사람의 온기는 있었으면.

꼭 1인용 동굴같이 생겼던, 쓰인 방명록이 7권이나 됐던 게스트 하우스에서

나를 들여다보고 아낌없이 쉬다 왔다. 체크아웃 30분 전 방명록을 남기고.


해보고 싶었다. 캐리어에 책만 꽉 채운 여행 / 방명록이라 쓰고 남의 일기장이라고 읽는다 (숙소는 여성전용)




23.9.25. 월요일에 남긴 방명록

잠이 잘 오는 방. 어제도 잘 잤습니다. 덕분에요.
이 방에선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자기를 들여다보고 울다가 달래다가 내려놓고 갔을까.
그 시간들이 쌓인 공간이라 잘 잘 수 있었는지 모릅니다.

자기만의 방
저도 그런 방이 필요해서 도망치듯 떠나왔습니다.
서울에서 xx회사를 다니고 있는 30대 초 여자예요.
재밌고 좋은 걸 만들면서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이게 아닌 것 같은데’라는 마음 때문에
언젠가 떠날 곳이라고 생각하면서 흘러온 지 3년이 됐네요.

너무 바쁜 하루들의 반복이라 나를 살필 여유도 나에게 질문을 멈춘 지도 너무 오래된 것 같아요.
계속 마감에 쫓겨 어딘가로 가고 있긴 한데 이게 맞는 건지 잘 가고 있는 건지
마치 교통사고로 으스러진 다리로 타의로 질질 끌려가고 있다는 생각에
몸도 마음도 너무 지쳤었어요.


나를 일으키는 건 결국 나니까
아무리 동기부여 이야기를 듣고 봐도
내 마음이 납득하지 않으면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조금 다르게 바라보려고요.

떠날 곳이라고 생각했던 마음은 내려놓고, 언젠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게 해 줄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뿌리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몰입해 보려고 합니다.

꿈도 그렇고 행복도 그렇고 마치 하나의 목적지가 있는 것처럼 말하는데
아닌 것 같아요. 내가 닿는 모든 곳이 목적지이고
거기서 바닥을 치든 성과를 얻든 무얼 쥐고 일어설지는 내 선택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살면서 만나게 될 수많은 목적지들을 자유롭게 부딪혀보려고요.
나답게 해 보고 아니면 뭐 어때 그건 그 목적지의 역할이 거기까지였던 거지 뭐.

저는 언젠가 이야기를 만들 거예요.
제가 만든 드라마, 영화가 어떤 지점을 지나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를 들여다볼 수 있는, 질문해 볼 수 있는 그리고 위로받고 다시 나아갈 수 있는
아카이브가 되길 꿈꿉니다. 이 방처럼요.

어젯밤에 저는 혼자 영화 <델마와 루이스>를 봤어요.
결말을 보기 전에 잠들어 버렸지만 뭐 어때요.
멋진 여정이었을 거고 떠나기 전과 후는 다른 사람일 게 분명한 걸로 됐죠!  - J


책 보다가 고개들면 바다 / 글 쓰다가 고개들면 고양이


ㄱr끔… 난 파티를 연다. 아무도 찾지 않는 왓챠 같이보기 파티.
마지막날 늦잠 자서 일필휘지로 남긴 방명록 /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만난 무지개






3개월이 지난 지금 생활의 풍경이 달라졌다.

그 중 하나, 드라마 작가 교육원에 등록했다.

3년 전 메모장에 넣어뒀던 이야기를 펼쳤다.

나에게 질문하고 싶어서. 한 세계를 끝까지 책임지고 완성하는 연습을 하고 싶어서.

없던 세계를 만들고 캐릭터에게 말을 걸다 보면 나를 좀 더 알게 되지 않을까.

교육원을 가는 수요일은 한 주의 분기점이 됐다.

나만큼 내 글을 들여다봐주는 동기들을 만나 각자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본업을 더 사랑하게 됐다.

카피라이터 잘하고 싶어. 진짜.


이 마음으로 회사에 돌아가니 회사의 풍경도 달라졌다.

일을 사랑하는 실력자 선배들 틈에서 여전히 내가 제일 못하지만

바라보고 갈 수 있는 지점이 있다는 게 새삼 감사했다.

끝까지 퀄리티를 붙잡고 최고를 만들어내겠다는 선배들의 자부심. 나도 닮고 싶어졌다.


일을 시작하는 시간도 달라졌다.

회의가 있는 날엔 맥도날드에서 맥모닝 말고 맥새벽을 한다.

아직은 회의실에서 쪽팔리기 싫다는 마음, 부담감이 추진력이지만

천천히 힘을 빼보려고 한다. 나답게 즐겁게 내가 잘하는 걸 펼치는 습관을 만들 거다.


창가자리 추워


결말은 모르겠지만 뭐 어때용. 어떻게 될진 나도 몰라. 산이든 바다든 그냥 가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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