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 공부 01
나와 다른 존재를 만나는 건 매번 어렵지만 설랜다. 전혀 다른 삶의 궤적을 그려오면서 제 모양을 만들어왔을테니 얼마나 다를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시작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관계의 모양도 다르다. 어린시절 동네 놀이터에서 스쳐지나간 아이와 고등학교 시절 3년 동안 함께한 친구와 직장에서 만난 사회관계는 천지차이다. 그 차이는 친밀함으로 집단의 크기로 서로에게 주어지는 역할 기대로 다르게 보여진다.
연필과 나는 직장에서 만나 동갑이라는 공통점으로 좀더 친밀한 동료이자 친구가 되었다. 다른 동료보다는 친밀하지만 학창시절 친구보다는 거리가 있는 적당한 간격을 유지한 관계였다. 그러다 적당한 간격이 무너지고 아주 가까운 간격으로 서로가 들어왔다. '쿨함'이 거리를 유지하며 가능한 거라면 '뜨거움(?)'은 접촉을 통해 만들어진다. 상대방과의 접촉으로 냉정함을 유지할 수 없게되었을 때 사람은 당황한다. 접촉이 불쾌감, 거부감, 친밀감, 긴장을 불러일으키고 접촉은 그 다음 행동의 동기로 작용한다. 나의 사적인 영역, 나의 간격 안으로 상대가 들어왔을 때 '나'는 상대를 밀어내거나 내 간격 안에서 상대를 맞이한다. 하지만 이런 간격 유지 또는 간격 안으로 들어가기는 일방적이지 않고 상호성을 띤다. 그리고 간격으로 들어온 상대가 이전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가 되었을 때 나의 사적 영역은 확장된다.
특별한 존재인 나의 연인을 '나' 자신과 동일시하거나 또는 상대를 이해, 공감함으로써 사적 영역이 확장된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또 다른 세상을 경험하는 일이라고 어느 누가 말했던가. 연필을 만나면서 나는 새로운 세상을 경험한다. 밥 먹는 속도, 음악 취향, 영화 예능 등을 보는 방식, 좋아하는 웹툰 등 차이점을 찾자면 끝도 없다. 단지 전혀 다른 '두 사람'이 함께 서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알 수없는 속도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런 모든 순간에 당혹감을 느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차이만을 확인하는 것은 아니다. 낯선 존재, 낯선 세계의 경험은 나의 세계를 확장한다. 얼마나 좁은 공간에서 살고 있었는지, 감각의 폭이 넓어지며 감각하는 능력도 변한다.
도시 생활을 하면서 불편했던 것 중에 하나는 소음과 빛이다. 도로변 빌라에 살았던지라 시도 때도 없이 지나가는 차와 취객이 지르는 소리는 나를 자극했다. 가로등, 주변 가게의 불빛, 네온사인도 나에게는 불편한 빛이다. 그 모든 소리와 빛도 누군가의 삶을 드러내지만 서로의 삶을 항상 드러내고 보아야만 하는 상황은 불편하다. 어린 시절 어느 순간에는 나에게도 소음과 네온사인이 당연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90년대 후반 가족이 귀촌을 한 후 나에게는 그 당연한 것이 잊혀지고 낯설어졌다. 시골 출신이어서 인지는 몰라도 밤은 어둡고 조용하고 적막해야 한다. 그런 밤은 하루의 노곤함과 긴장감을 풀어주는 이완제와 같다. 네온사인보다는 어두운 밤 빛나는 별빛이 좋고, 차와 사람들의 소리보다는 지저귀는 새와 개구리, 풀벌레 소리가 좋다.
연필은 그런면에서 나와 정말 다르다. 서울 태생인 연필은 밤의 네온사인과 밤에 들려오는 소음이 당연할 뿐만 아니라 안정감을 주는 요소였다. 나에게는 뉴스 속에서 들려오던 도시 밤길 타인의 발걸음과 목소리가 공포와 불안을 학습시키지만, 연필에게는 마치 어린아이를 꿈나라로 인도하는 백색소음 처럼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을 느끼게 해주는 중요한 환경이었다.
별 일 아닐 수 있지만, 외부의 소음과 빛은 우리에게 저녁마다 가족회의 안건이었다. 가족회의 안건은 작은 듯하지만 오랫동안 축적된 서로의 감각을 확인하는 일들로 가득하다. 또한 식사, 휴식, 청결 등 나의 익숙한 감각을 낯설게 보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전혀 다른 두 사람이 라이프스타일을 조율한다는 게 가능할까? 공동공간과 적정한 개인공간을 마련하고 서로의 간격과 서로의 시간을 합의한다는 건 어떤걸까? 협상으로 무언가를 포기하고 무언가를 취하는 제로섬게임은 너무 각박하지 않은가. 지금의 나, 너 그리고 우리는 경험의 누적이자, 학습의 산물이다. 그렇다면 다르게 만들어간 우리의 세상이 있지 않을까. 그것은 지금과는 다른 나, 지금과는 다른 우리를 상정한다. 한 인간이 다른 '존재'로 변모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과거의 '나'를 점검, 부정하는 과정을 거쳐 성찰하고 다른 존재가 되기 위한 새로운 '실천'이 쌓여 만든다. 그렇게 연필과 나는 아주 날카롭게 서로에게 침투하기도 품어안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하루하루가 일상이라는 말로 단순화되기 보다는 여러 소리와 냄새와 색깔로 물들은 풍성한 나날이 될거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