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공부 03
*** 6개월 전 기록을 뒤늦게 정리해서 올립니다.
토리를 만난 후_ 18일째 되는 날(2019/09/28)
이사를 온 지 고작 5일째다. 낯선 집에서 맞는 첫 주말이기도 한 오늘, 나는 무엇을 했나?
가족의 도움으로 조금은 수고롭고 조금은 느긋한 이사를 했다. 그러해서 아직도 이삿짐 일부는 차 트렁크에 자리해 있고, 5일째 되는 오늘까지 짐 정리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급할 거 없다는 마음으로 아직 채워져야 하는 가구를 기다리며 완전한 정리는 잠깐 미뤄두기로 했다. 대신에 지금 당장 이 낯선 공간을 익숙하게 만들 무언가가 필요했고, 소리로 향기로 어떤 시선으로 공간을 채워나갔다.
느지막이 일어난 오늘 아침에 나는 감잎차를 끓였다. 약간은 서늘한 아침 따뜻한 차가 몸을 데우고 따스한 기운을 가져다주길 바라면서 말이다. 감잎차의 향은 강하지 않지만 편안하게 내려앉는다. 그 향이 집의 빈 공간을 가득 채우지는 않지만 허전한 마음과 몸속에는 충분히 퍼진다. 차를 끓이며 튼 노래도 마찬가지다. 잔잔하지만 편안하고 쉴 곳을 마련해준다.
너무 좁은 집에서 살았던 탓일까. 집이 커지면 좋을 줄만 알았는데, 서로 부대끼던 공간으로 몸에 기억되는 집이 구분되고 구획되는 공간으로 나뉘어 우리의 접촉도 조금은 줄게 만들었다. 집을 정리하고 익숙해지는 시간이 필요해서일지도 모른다. 커튼도 달고 설거지도 하고 밥도 해야 해서일지도 모른다. 함께하기도 하지만 나누어서 하는 일이 반복적으로 생겨서이기도 하겠다. 밥을 함께 먹고 차를 마시고 드라마도 봤지만 정작 함께 무언가를 한다고 느낀 때는 오후 3시가 넘을 무렵이었다. 해야 할 일을 어느 정도는 마치고-또는 미뤄두고- 앉은 책상에서 우리는 우리가 보내는 시간과 이 공간에 대해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너와 나, 우리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곳이 낯선 건 풍경, 소리, 냄새 어느 것 하나 익숙하지 않아서이다. 오감으로 느껴지는 모든 것이 낯설 뿐 아니라 내 존재마저도 낯설게 느껴진다. 그 이전에 기대하고 바랐던 것들보다는 즉각적인 감각이 우릴 지배했다. 이사를 해서 이 곳에 익숙해지고 사람들과 친해지는 것만으로도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하고 충분히 어려운 일이다. 여기에 더해 생명-이 아이를 토리라 부르기로 했다- 을 몸에 품게 된 연필의 몸과 마음의 변화는 동시적인 것이어서 더한 어려움을 느낀다. 나를 둘러싼 환경이 생경하고 몸과 마음에 일어나는 변화들은 소용돌이와 같다. 급격한 환경 변화과 급격한 신체적 변화가 동시에 오면 이런 상황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완충할 어떠한 방법이 필요하고, 의지할 버팀목이 필요하고 품어 안아줄 존재가 있어야 한다. 우선은 서로가 서로에게 그런 존재라는 걸 확인하면서 우리는 낯선 공간에서 가장 친근하고 밀접하고 공감하는 서로를 품어 안는다.
산다는 건 무엇이고 살림을 꾸린다는 것은 무엇일까? 집안 살림을 한 트럭 옮기며 앞으로 꾸릴 가정살림에 대해 생각해본다. 내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채워나가는 것이 살림이라면, 그것은 비단 가재도구나 가구만이 아닐 것이다. 편안하고 익숙하고 즐겁고 행복할 수 있는 공간이어야 의미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살림은 노동과 놀이와 휴식과 치유를 고려한 어떤 총체일 것이다. 어떤 드라마에서 말한 '협상과 결렬, 격렬한 결렬의 과정'과 같이 나는 연필과 수많은 합의의 과정으로 이 공간과 우리의 시간을 꾸려갈 것이다.
시골살이를 준비하면서 바랐던 건 건강한 생활과 정서적 안정과 즐거움과 어느 정도의 경제적 안정성, 더불어 더 나은 환경과 사회를 위한 활동이었다. 그런 점에서 귀촌과 동시에 찾아온 토리는 살림을 어떻게 꾸릴지 고민하는 우리에게 기쁨이자 더 치열한 고민을 갖게 하는 이유이다. 나, 연필, 토리는 어떻게 건강하게 살 수 있을지. 우리는 누군가 희생하거나 부담하지 않고 함께 노동하고 놀고 서로를 돌볼 수 있을지. 건강한 노동은 어떻게 가능하며, 주체적인 노동과 함께, 의미 있는 노동, 즐거운 노동, 이따금 고된 노동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지가 관심사다. 그리고 그 노동은 '돈을 버는 노동'뿐만 아니라 삶을 꾸리는데 필요한 '자급'과 가사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돌봄과 가꿈이라는 노동까지 포함해서이다. 토리를 만날 준비를 하면서 더욱 깊이 생각한다.
** 오늘은 EBS 다큐 시선 '너희가 임산부를 아느냐'를 보았다. 그리고 자연주의 출산에 대한 책도 약간 읽었다. 다큐에서는 '모성'에 대한 사회적 강요를 비판하는 꽤 좋은 내용이 담겼지만 한편으로는 한국의 임신, 출산의 현주소라는 이름으로 '평균'에 대한 관점이 여러 차례 다뤄졌다. 아쉬운 건 한국의 평균은 미국, 유럽, 여타 나라들과는 다른 '임신과 출산'에 대한 의학적 대응이었으며 의학적 처치로써 임신과 출산이 일반화되고 제도화되면서 생기는 문제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제왕절개를 통한 분만이 45%에 달한다는 한국과 30%쯤이라고 알려진 미국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지... 모성 관념은 임신과 출산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그 이후 육아와 성인으로 성장해 다시 부모가 되고 나이 들어가는 모든 과정에서 인습적으로 체화된 사회문화가 사람들의 생활 속속들이 영향을 미치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