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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자 Aug 16. 2023

그래, 물리적으로 책을 좋아하는게 어때서

물리적으로 책을 좋아합니다.

SO WHAT?

그래. 솔직히 나는 문학의 거장들처럼 문장력이 수려하지않다.


그런데말야.

생각해보니 그건 너무나도 당연한 것 아닐까? 국문학을 전공한 것도 아닌데 학문적 부족하겠지. 근데 그게 왜? 그래도 책을 좋아할 수는 있잖아? 그래도 글을 쓸 수는 있잖아? SO WHAT? 특정 장르의 책을 더 많이 읽고 안읽고의 문제는 취향이지, 부끄러운 일은 아니지 않을까?




나이가 들면 배짱도 두둑해진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더이상 그런 점에 대하여 부끄러움에 숨지 않아도 된다고 나를 다독이는 지혜와 여유로움을 터득하게 되었다.


어느 날, 사서 선생님께서 도서관 정비에 정성을 들이시는 모습을 보며 '어쩜 이렇게 책을 좋아하세요?'라고 여쭤봤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저는 물리적으로 책을 좋아해요.


순간, 머리가 띵- 하며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저도 그래요. 물리적으로 책을 좋아하는 것. 제가 딱 그래요. 아 정말 좋은 단어네요.'



물리적으로 책을 좋아한다는 것.

나는 책을 좋아한다. 책을 읽는 것도 좋아하긴하지만 어쩌면 책의 물리적인 속성을 더 좋아해 왔을지 모르겠다. 어쨌든 서점의 냄새를 좋아하고, 서점에서 만나는 각종 신간들의 제목을 훑어보는 일을 좋아한다. 책의 제목을 보며 목차를 탐닉하는 것에서 희열을 느끼며, 책 날개의 작가 소개를 읽으며 많은 작가님들과 친구하듯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 예쁜 책 표지를 좋아하고 책 표지의 트렌드를 읽어내는 시간이 행복하다. 예쁜 책들은 한 번씩 손으로 쓸어만지는 것을 좋아하며 내 손끝에서 휘리릭- 넘겨지는 책장의 촉감들을 좋아한다. 책을 읽으며 은은하게 틀어진 서점의 잔잔한 음악을 좋아하고, 나와 같이 내 옆에 서서 책을 구경하는 사람들의 표정을 마주하는  순간 내 마음은 황홀경이 된다.


나는 물리적으로 책을 좋아해왔던 것이다. 지구 상에 나와 같은 취향인 사람이 오롯이 나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 그동안은 나의 책 취향을 취향이라고 조차 생각 못했었다. 그런데 나와 취향이 비슷한 이가 한 명 이상은 지구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나니 더 이상 나의 취향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기로 했다.


책을 물리적으로 좋아하는게 어때서.


그러니 책 표지 다지이너도 있는 것일테고, 유튜브에 서점 음악만을 따로 재생하는 채널도 있을테지. 교보문고 향수를 파는 이유도 나와 같은 사람이 있기 때문이겠지. 더 이상 서점 향기를 몰래 킁킁거리지 않기로 했다. 서점에 가서 매번 읽을 책을 사오지 않더라도, 단순히 책 냄새가 좋아서 서점에 가는걸지라도 책을 좋아하는건 좋아하는거다. 당당히 책을 물리적으로 더 좋아한다고 말해도 된다.


이제는 서점에 가거든, 당당하게 서점의 공기를 누리고, 서점의 분위기에 흠뻑 취할 것이다. 책을 물리적으로 좋아한다는 것 자체는 하나의 취향인 것이다.    

  

서점에서 틀기 좋은 음악만을 따로 플레이하는 채널들-



호모 비블리쿠스, 서인종이 되어도 좋아.

책을 좋아하는 종자다. 이유가 없으니 '종자'인 것이다. 책이 나이고, 나 자체가 책인 것처럼.

<혼자 남은 밤, 당신 곁의 책>에서는 B가도서관 서가 사이를 누비다가 정신이 혼미해지고, 자신이 펼쳐보던 책, 바로 그 책이 되어 서가에 꽂혀버렸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책과 한몸이 되어 온 세포로 책을 가득히 느끼며, 책을 살아내는 B, 그럼과 동시에 자기 존재에 대한 혼란도 겪은 그는 새로운 인류의 종, 서인종이 된다.


책 맛은 꼭 읽어야만 맛볼 수 있는게 아니다. 책을 사는순간, 책을 보는 순간. 반은 읽고. 아니 맛보고 들어가는 셈이다...

...손으로 책을 들어 이리저리 한참을 돌려본다. 책을 펼쳐 종이에 대고 킁킁 냄새를 맡는다. 책장을 넘기면서 손으로 책장을 살살 쓸어 만진다. 그 다음엔 책장을 빠르게 넘기면서 스삭스삭 소리를 듣는다....

...이렇게 온전한 서인합일(書人合一 )을 통해 '호모 비블리쿠스(homo biblicus)'라는 새로운 종, 곧, 서인종(書人種)이 태어난 것이다.

                                                                 -혼자 남은 밤, 당신 곁의 책(표정훈/한겨례출판)-


사서(司書). 주세페 아르침볼도, 1566년경, 캔버스에 유채. 스웨덴 스코클로스테르 성


그림 속 책은 읽혀졌을까? 아니면 머리 위 책은 그저 컨셉용 소품에 불과한 채, 안읽혀졌을까? 책이 펼쳐져 얹어지기만해도 머리에 모두 입력되는 초능력을 바래봤던 어린시절의 맹랑한 꿈이 떠오른다.


그림에서 그가 책을 읽었던 안읽었던 한가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그는 책을 온몸으로 사랑하는 서인종이라는 것. 나 역시 그렇다는 것. 그 흥미로운 사소한 발견 덕분에 오늘의 책은 참 가볍고, 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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