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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현 Mar 21. 2021

애연의 사유

금연을 시작하며

 

#1

처음 입에 댄 건 스물 둘이었다. 이른 나이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P가 집앞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P는 나와 동거중이었다. P는 나를 보더니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묻지도 않았는데 그냥, 피우고 싶었다고 했다. 나는 한 대 얻어피웠다. 그 기분을 이해하고 싶었다. 우리는 서로 방안에선 태우지 말자고 약속했다. 그 말은 곧잘 지켜졌다. 공강 시간이 겹치는 날엔 흡연 카페에 가서 담배를 태웠다. 아침 10시에 오픈하는 카페였는데, 늘 우리보다 먼저 와서 줄담배를 태우고 있는 아저씨가 있었다. 우리는 그를 스모커라고 불렀다. 스모커는 매일 같은 자리에서 줄담배를 태웠다. 우리는 스모커가 최대 몇 개를 연달아 피우는지 세었다. 스모커는 한 갑을 연달아 태우고는, 떠날것처럼 일어나더니 이내 바지 주머니에서 새 담배를 꺼내 물었다. 사별일까? 아니, 자식이 죽었는지도 몰라, 글쎄, 평생 바친 회사에서 잘렸을지도. 우리는 그의 사연을 추측하며 뻐금뻐금 담배를 폈다. 우리가 쳐다보건 말건, 사람들이 왔다갔다하건 말건 그는 흔들리지 않고 피웠다. 흡연에도 레벨이 있다면 스모커는 최상위 랭커였다. 


 초보자인 내게 담배는 생각보다 독했다. 내가 처음 산 담배는 팔리아멘트였다. (대체 담배 이름이 왜 ‘의회’인지 이해가 안 되었지만, 그 점이 좋았다.) 누군가 ‘팔라’보단 ‘말보로’가 기름지고 고소하다고 했다. ‘던힐’은 담백하다고 했다. ‘마일드 세븐’은 타격감이 좋다고 했다. 입문자라면 ‘말보로 아이스 블라스트’를 먼저 태워보라고 했다. 확실히 멘솔향이 목넘김에 도움을 주었다. 한동안 나는 초보자답게 멘솔 담배만 태웠다. 멘솔담배들을 구분하는 방법은 쉬웠다. 뭔가 디자인이 푸른 색이거나, 쿨하거나 열대느낌을 주는 이름이면 멘솔담배였다. 그렇게 피우게 된 던힐 프로스트는 비릿한 풀맛 같은 게 났다. 보헴 쿠바나는 모히또 맛이 났다. 트로피카나는 캡슐 색깔마다 맛이 달라 재밌긴 했는데 피우다보면 멀미가 났다. 멘솔만 피우다 보니 일반 담배가 피우고 싶어졌다. 일반 담배를 피우다보면 멘솔이 생각났다. 그런식으로 나는 편의점의 담배들을 종류별로 차근히 다 피워내기에 이르렀고, 비로소 초급반을 졸업하게 되었다. 


 흡연자들은 주로 피우는 담배를 ‘주력’이라고 표현했다. 자기 담배에 자부심같은게 있었다. 주력담배. 주무기도 아니고, 나는 그 표현이 웃기다고 생각했지만 담배에는 분명 무기 같은 ‘힘’이 있었다. 흡연만큼 효율적으로 타인의 주목을, 관심을 이끄는 행위는 없었다. 나는 담배가 기호품류로 분류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기능으로 따지자면 총포류에 가까웠다. 불빛이 나고, 연기가 나고, 타는 냄새가 퍼지고, (어쨌거나) 누군가 죽는다. 불을 붙이는 순간 경보가 울린다. 담배에선 죽음의 냄새가 났고, 세상은 그 냄새를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으로 이루어져있었다. 


#2

 돌이켜보면 나는 자기표현의 욕구에 허덕이고 있었다. 부정적인 감정을 자연스럽게 억압하는 일에 익숙했고, 표현하는 일엔 서툴렀다. 담배는 그런 감정들을 아주 간단하고 자연스럽게 표현하게 해주었다. 한숨쉬듯이 후우- 내뱉으면 그만이었다. 무언가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내 안의 부정적인 감정들을 밖으로 표현하는 경험은 낯설고 중독적이었다. 요가에서 호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과 같은 원리였다. 나는 그것이 흡연욕구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어찌되었건 흡연도 호흡의 한 갈래였다. 나는 담배를 통해 타인에게 내 안의 감정들을 무심하게 연출하는 방법을 배웠다. 


 같은 이유로 나는 어떤 젊은 애연가들을 애호했다. 그들은 빛을 피해 깊은 수면 아래에 사는 생물들 같았다. 기질적으로 우울하고, 예민하고, 감수성이 풍부하고 나약한 부류였다. 그들에겐 어린애같은 구석이 있었지만 자기 연출에 있어서는 늘 진심이었다. 그들은 날숨에 날 것 그대로의 자신을 내뱉었고 서로를 열렬히 유혹했다. 그들은 형식이 내용에 앞선다고 생각하는 형식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진실이나 진심은 가벼움에 있다고 믿었다. 키치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바다에서 함께 호흡하고 싶었다. 그 세계에서 담배는 미디어였고, 아가미였다.  


 담배에 시공간을 가르는 힘도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한대 같이 피우자는 말은, 둘만의 은밀한 공간에서 쉬었다 가자는 말과 같았다. 같이 담배에 불을 붙은 순간 모든 주변은 배경이 되고, 우리는 주연이 되었다. 단체모임에서 잠깐 나와 함께 태우는 담배는, 서로를 애틋하게 했다. 나는 느와르물의 본질이 브로맨스에 있다는 사실을 그렇게 깨달았다. 타들어가는 담배는 서로의 속마음을 확인하도록 재촉하는 타이머였다. 언제나 을의 담배가 늘 더 빨리 타들어갔다. 이제 들어갈까, 라고 말하는 사람은 늘 갑이었다. 한대 더 필까, 을은 제안한다. 담배는 그런식으로 인간관계 속의 매캐한 진실들을 환기했다. 


#3

 언제부턴가 나는 도망치고 싶을 때 담배를 태우기 시작했다. 내게 기대하는 사람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밝은 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어두운 곳으로 향했다. 캄캄한 곳에서 화르륵 불을 붙이는 순간이 좋았다. 담배는 아늑한 장작이었다. 타닥타닥, 무언가를 열렬히 태우며 상실의 주인이 되는 일은 낭만적이었다. 나는 늘 소모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추운 날이면 장작을 더 팰 수 있으니 좋았다. 따뜻한 커피는 지상 최고의 조합이었다. 커피와 담배는 나를 매일매일 구원했다. 이따금 상실감이라는 감정마저 상실하고 있는 느낌이 들때도 있었다. 모른 척 하고 싶은 부작용이었다. 


 당연하게도 몸은 점점 안 좋아졌다. 원래 기관지가 약했다. 사계절 기침을 달고 살았다. 자고 일어나면 피곤했다. 무엇보다 냄새가 배기 시작했다. 손을 더 씻고, 리스테린을 했지만 무의미했다. 깊은 속에서 냄새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머리 아픈 날이 많아졌다. 그제서야 끊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전에는 그런 생각조차 없었다. 냄새가 나지 않는 전자담배로 바꿔보았다. 액상형부터 궐련형까지, 종류별로 다 시도해보았다. 잠깐의 흥미였다. 그것들은 연초가 주는 기쁨을 따라가지 못했다. 나는 다시 의회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솔직히, 몸이 안 좋아지는걸 즐긴 것 같다. 꽤 오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문장에 감화되어 있었다. 그 말을 비웃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사람은 둘중 하나였다. 타인을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믿거나, 자기는 파괴되지 않을거라 믿거나. 나는 그들을 경멸했고, 그런 이유로 정확히 그 반대 진영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했다. 우리에게 타인을 파괴할 권리따위는 없다고 말하고, 인간으로서 자신의 연약함을 흔쾌히 인정하는 어떤 개인들을.


 웰빙 문화를 재수 없어했던 이유도 있었다. 타인을 착취한 결과물을 통해 건강한 삶을 유지하는 중산층의 해맑은 문화가 혐오스럽게 느껴졌었다. 그 악의없고 순수한 사람들은 내 부모였고, 친구였으며, 오랫동안 나 자신이었다.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선택할 기회'가 있는 무리에 편입되기 싫었다. 사회의 약자와 고통을 함께하겠다는 숭고한 의도는 아니었다. 나는 아프거나 죽는걸 너무 무서워했다. 나는 그저 눈을 돌리고 싶지 않았다. 나는 해맑고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그런 권리를 포기하는 방식으로 죄책감을 덜고 싶었을 뿐이었다. 조금씩 죽어가는 방식으로 위로를, 속죄를 하고 싶었던 건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선택또한 지극히 감상적인 중산층 문화의 한 갈래라는 것을 그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담배를 시작하게 했던 이러한 열렬한 감정들은 어느 순간부터 무뎌졌고, 나는 담배를 피우면서 아무것도 느끼지 않게 되었다. 의회는 도피처가 되었다. 무언가에 몰두하기가 어려워졌다. 나는, 내가 파괴되지 않을거라 믿는 종류의 사람이 되고 있는건 아닐까 생각했다. 오랜만에 만난 P는 금연을 시작했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한 개비를 주었고, 우리는 오랜만에 만난 연인처럼 급히 태웠다. 


#4

 자기연민은 나의 주력이었다. 타인을 섣불리 동정하고 싶지 않아서, 나는 나를 동정하는 길을 택했다. 담배는 그 길을 인도하는 흐릿한 불빛이었다. 다른 길을 보기엔 시야가 좁았다. 서로를 위무하던 젊은 애연가들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불을 붙여도 예전처럼 감정이 촉발되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담배연기가 더 유독하게 느껴졌다. 태우면 안될 걸 태운 듯이, 매운 연기가 코와 눈을 찔렀다. 덧없는 기침이 심했다. 스모커가 생각났다. 연기 속에서 그는 미동조차 않았었다. 나는 초라함을 느꼈다.


 나는 다시 담배를 태우는 한이 있어도 지금은 끊어야겠다고 마음먹었고, 

 오늘은 딱 90일째 되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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