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뭐야, 울어?" 엔딩 크레딧과 함께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당황스러웠다. 그렇게 슬픈 스토리는 아니지 않나? 같이 본 애인은 내가 오열(?)하는 게 의아하다고 했다. 나도 의아했다. 전개를 어느 정도 예상했다 생각했는데, 언제부턴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으니.
<미나리>는 생각보다 독특한 영화다. 그 점이 영화에 몰입하게 어렵게 하는 부분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내게 <미나리>는 분명 싱싱 생생하고, 영양가있는 제철나물같았다. 영화관을 나오며, 나는 이 영화 <미나리> 만의 독특한 향취의 정체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 <스포일러 주의>
살펴보기 전에, 나는 이 영화가 개봉하기 전부터 ‘미국영화’가 아닌 ‘외국어영화’로 분류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보았음을 밝힌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 사실이 영화를 감상하는 데에 있어 부차적인 해석의 도구가 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게 미국영화일까, 한국영화일까 생각하며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먼저 이 사실을 최대한 배제하여 영화를 살펴보고, 말미에 개인적인 생각을 적어보고자 한다.
ㄱ. 1세대 이주민의 눈으로 바라보기
- 피해망상이라는 유령
<미나리>는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에 이민 온 1세대 한국인들의 이야기이다. 언어도, 인종도 낯선 땅에서 병아리 감별사로 생계를 이어가던 제이콥(스티븐 연)과 모니카(한예리). 제이콥은 딸 앤과 아들 데이빗에게 아버지로서 해내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아칸소로 이주해 자신만의 농장을 가꾼다. 하지만 낡은 컨테이너에서 농장을 운영하며 사는 일은 고되었고, 지친 모니카는 엄마 순자(윤여정)을 미국으로 부른다. 순자는 한약, 멸치, 미나리 씨앗 등을 챙겨왔고, 전형적인 할머니와 달리 요리도 할 줄 모르고, 프로레슬링만 본다. 아이들은 그런 할머니를 처음에는 싫어하지만, 지나친 장난까지도 사랑으로 감싸주는 할머니와 점점 가까워진다.
먼저 미나리의 특이한 점은 ‘한국인’이라는 국적과, 그로 인한 문화적 갈등에 전혀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최근 미국에서 아시아계가 주연으로 나오는 미디어 컨텐츠들(대표적으로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 은 미국 주류 사회와의 갈등을 통쾌하게 폭로하고, 해결하거나, 비트는 식으로 전개되는 경우가 많은데 <미나리>에는 그런 것이 거의 없었다. 이는 문화적 갈등을 겪기 이전에 생계의 문제에 모든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었던 1세대 이주민들의 특성일 수도 있겠다. 제이콥과 모니카는 영어에 서툴지만, 그로 인해 직접적인 불이익이나 조롱을 받지는 않는다. 교회에서는 오히려 ‘가족’으로 환영받기까지 한다. 이는 기독교를 중심으로 마을 단위 공동체가 조성된 1980년의 미국의 특성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타 인종에 대한 감수성이 없는 백인 아이들은 대놓고 인종차별을 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이는 이후 2세대 한인들, 1세대에 의해 어느 정도 생활정착을 성공한 2세대 이주민들이 겪을 문화적 갈등과 차별, 그리고 예정된 세대 간의 갈등을 암시한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은 같은 미국 내 아시아인을 다룬 영화지만, 보다시피 색감(?)부터 모든게 대조적이다.
차별은 오히려 한인사회에서 더 혹독하게 이루어 진 것처럼 보인다. 아칸소의 병아리 공장에서 만난 한인 여성은, ‘이곳에 온 한국인들은 다 사연이 있는, 한국교회가 싫어서 온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생계의 문제에 봉착한 이주민들에게, 한인사회는 도움을 줄 수도 있지만 상처를 줄 수도 있는 곳인 것이다. 그들에게 국적, 인종적 동질성이라는 가치는, 생계의 빈곤을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때론 보이지 않는, 노골적이지 않은 시선이 가장 차별적이다.
이렇게 보면 아칸소는 차별 없이 살기 좋은 비옥한 시골처럼 들리겠지만, 영화는 시종일관 불안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미나리>의 재미있는 점은, 1세대 이주민들이 느끼는 상시적인 불안감을 표현하는 데에 있다. 마치 <기생충>의 ‘냄새’처럼, <미나리>는 미국인들의 ‘시선’을 통해 불안감을 효과적으로 조성한다. 교회에서 백인 남자아이가 데이빗을 바라보는 노골적인 눈빛은 전형적인 인종차별의 눈빛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주민을 상대로 우물 파는 비용을 내라는 노인의 미소짓는 눈, 아이들만큼은 아니지만 웃으며 묘한 뉘앙스를 풍기는 교회의 어른들의 인자한 눈빛.
뱀을 좇으려는 데이빗에게 순자는 이렇게 말한다. "보이는 위험은 차라리 나은 거야. 보이지 않는 위험이 무서운거야" 라고. 사실 <미나리>는 노골적인 인종차별적 시선보다, '보이지 않는 시선'을 중점적으로 폭로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백인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이주민들의 모습에 초점을 맞춘다.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소수자가 느끼는 상시적인 시선을 폭로한다. 이를 수행하는 대표적인 인물은 바로 ‘폴’(윌 패튼)이다!
Poor Paul, how dare.
폴은 좀 이상하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다. 한국전쟁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제이콥의 가족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안아준다. 자기가 좋은 일꾼이라며 유일한 동업자 역할을 한다. 순자를 위해 엑소시즘(?)을 해준다. 결과적으로 폴은 제이콥네 가족에 아무런 위해를 가하지 않았으며, 멘탈이 무너져가는 제이콥을 위해 기도하고 붙잡아주었으며, 차라리 사업을 도우면 도왔다. 그러나 관객들은 시종 ‘폴’을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게 된다. 일단 광신도같은 그의 언행이 좀 이상하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맨몸으로 매고 수십 킬로미터를 걸어다는 건장한 백인 남성인 그는, 왠지 갑자기 제이슨네 가족을 해코지 할 것만 같다. 그런 피해의식은 관객 뿐만 아니라 제이콥도 느끼는 듯 하다. 제이콥은 폴을 집안에 들인 모니카를 질책하고, 폴을 아랫사람으로 대하려고 하면서도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인다. 폴이 제멋대로 손을 붙잡고 기도하고, 응원을 하는 모습이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 마치 힘센 아이의 지나친 장난을 그저 장난으로 받아아들여야 만하는 약한 아이처럼.
이렇듯 폴의 존재는 1세대 이주민들이 소수자라서 겪어야했던실체없는, 상시적인 공포를 상기한다. 누군가는, "에이, 너무 피해의식이 심한거 아니야?" 라고 장난스레 치부해버릴수도 있는 그런, 공포. 영화를 보며 뭔가 꺼림칙한 느낌을 받았다면, 그건 감독의 의도가 정확하게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미국 뿐만 아니라 타국에 잠깐이라도 살아본 사람이라면 느낄 수밖에 없는 일상의 공포. 사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는 일상에서도 이와 같은 형태의 공포를 느낀다. 모르는 남자와 같은 거리를 걸을 때 여성들이 느끼는 불분명한 공포. 폴이 그러하듯, 그것은 공포의 대상이 어떠한 의도를 갖느냐와 전혀 관계없는,명확한 위계에 의한 공포이다. 강자인 저 사람이 약자인 나를 언제든지 해칠 수 있다는 공포. 이러한 공포의 속성은, 이 영화가 단순히 ‘외국어 영화' 혹은 특정국가의 이주민 영화로만 남지 않게끔 기능한다.
ㄴ. 미나리의 생태
- 단순함과 복수의 미학
윤여정이 있어서 고마웠다.
러닝타임 내내 관객들은 제이콥네 가족을 응원하면서도, 함께 답답함과 불안감을 느낀다. 그러나 불안이 계속되면 피로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데, 이 불안감을 순식간에 해소해주는 역할이 바로 ‘순자’다. 순자의 독특한 언행은 관객들로부터 웃음을 자아내고, 특히 한국인들은 그녀의 말장난과 유창한(!) 한국어에 순식간에 자신도 ‘이민자의 상태’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미나리 원더플을 외치는 순자를 보는 순간만큼은, 우리는 다시 관객으로 돌아와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된다.
그러나 작품의 유일한 완화제였던 순자가 갑자기 쓰러지고 나서부터 분위기는 급격하게 어두워진다. 영화의 유일한 이완제였던 순자가 쓰러진다는 것은, 제이콥네 가족이 겪을 갈등의 끈이 팽팽해질것을 암시한다. 이때 영화에서 가장 가슴 아픈 장면 중 하나는 병원 씬이다. 서로를 구원하겠노라 약속하고 미국으로 온 부부가,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별거를 이야기한다. 심장이 아픈 제이슨이 기적적으로 회복되었지만, 가족은 마음 놓고 기뻐하지도 못한다. 모니카는 제이콥에게 당신은 가족보다 성공이 중요하냐고 묻고, 제이콥은 자기가 시작한 일은 끝내겠다고 말한다.(이 장면에서 관객들은 제이콥의 자살을 상상하게 된다) 가족 간의 촘촘한 갈등 속에서 어떤 성취도, 행운도 축복되지 못하는 것이다.
불꽃은 야곱의 모든 양식과 죄를 태우고.
영화는 결말을 향해 달려가고, 관객은 순자에게 무슨 일이 생기리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순자가 곳간에 불을 내게 되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비극적인 씬이다. 제대로 거동도 못하는 노인이 불을 끄겠다고 필사적으로 움직여보지만, 눈물만 흐른다. 도움이 되고자 온 건데, 쓰러져서 짐이 되고. 짐이 된 것도 죽도록 미안한데, 이제는 가족의 마지막 희망을 불태우는 할머니가 되어가는 그 순간 순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긴 세월 동안 평범한 할머니가 되지 않을 정도로, 지지않는 웃음을 짓던 순자가 오열하는 장면을 보며 어느 순간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그건 영화가 제시하지 않은, 순자의 삶과 감정을 제멋대로 그리며 흐르는 눈물이었다.
<미나리>의 아름다운 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건 감독이 인물에 대한 불필요한 설명을 하거나, 복잡한 대립구도를 설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제이콥과 모니카가 한국에서 어떻게 만나 사랑을 했고,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는지. 한인사회가 어떻게 제이콥과 같은 약자들과 대립했는지. 순자가 왜 요리를 할 줄 모르고, 프로레슬링을 좋아하는지. 그러한 디테일을 과감하게 생략함으로써, 영화는 관객이 ‘이주민의 삶'에 순전히 몰입할 수 있도록 이끈다. 그들에게 꽂히는 불안한 시선들을 느껴보게 한다. 그들이 어렴풋이 느끼는 희망의 실루엣이 사실 절망임을, 그러나 시작했다는 이유로 어떤 방식으로든 끝내야만 했던 이주민의 슬픈 궤적을, 마치 살아있는 것을 만지는 조심스러움으로, 가까이 가늠하고 직접 겪어보게 한다.
영화의 말미에서 나는 슬픔이 점점 심화되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건 이 영화가 전반적으로 의도적으로 제이슨 가족과 거리를 둠으로써 제이슨네에 불행이 한 가족에게 일어난 하나의 불행이 아님을 암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가족의 어떤 슬픔은 단수(單數)가 될 수 없다는 것. 하나의 미나리, 두 개의 미나리를 셀수 없듯이, <미나리>는 이주민 디아스포라 역사에 촘촘이 들어차있었던 복수(複數)의 슬픔이 번창하도록, 그저 조망하고 있었다.
오줌, 그리고 화투에서의 똥. 그것은 한국적인 정취를 드러내는 동시에 땅을 비옥하게 하는 무언가를 상징한다.
정이삭 감독은 실제로 영화 개봉 2주 전에, 약 45분에 달하는 캐릭터의 배경 설명을 삭제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래서 <미나리>는 그 자체로 미나리스럽다. 복잡하고 화려한 농법과 기계 대신, 비옥한 땅을 찾아 뿌리기면 하면 무럭무럭 자라는 미나리처럼. <미나리>의 수확은, 이민자 디아스포라에 대한 비옥한 이해를 시각-청각적으로 구체화하는데에 집중하고, 캐릭터들의 씨앗만뿌려놓음으로써 이루어진다.
ㄷ. 제이콥, 그 지독한 놈에 대한 단상
- 이주민, 성별 그리고 생산성
제이콥은 한국 아빠같으면서도, 미국 아빠같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제이콥에게 몰입했다. 그는 전형적인 미국식 가부장이면서 동시에 한국식 가부장이다. 아이들보다 일이 먼저다. 아이들이 아빠가 뭔가 해내는걸 봐야 제대로 크지 않겠냐고 말하는, 지독한 마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그의 약함이 더욱 부각된다. 성가신 폴에게 제대로 큰 소리 치지도 못하고, 도시에 사는 한국놈들은 다 사기꾼이라고 말하면서도 한국인 거래처를 따기 위해 몸을 낮춘다. ‘폐기’에 대해 생각하고, 아들에게 말한다. 수컷은 쓸모가 없으면 폐기 되는 거야. 그러니까 우리는 쓸모 있어야 해. 스스로 폐기시킨 수평아리들을 뒤로 한 채 자신의 쓸모를 찾는, 아무리 해도 성과가 나오지 않자 그의 눈빛은 방황한다. 그 순간만큼 그는 가부장도, 아버지도 아니었다. 감별되길 기다리는 서글픈 짐승이었다.
몸으로, 생산성을 입증해야 하는 시대였다. 특히 아메리칸드림이었다면 더더욱. 남녀의 단순한 성차에 기반해 조금 더 생각해보자면, 1세대 이주민들은 어떤 세대보다 남녀 간 역할 분리와 고착화가 심각했을 것이다. 말을 제대로 못하는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주로 단순 육체 노동이었을 것이다. 제이콥이 농장을 무리해서 운영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돌아가면, 평생 병아리 감별하면서 살아야해”)
육체 노동은 특성상 강도가 높을수록 높은 페이를 받을 것이고, 이로 인해 초기 이주민 공동체는 동세대의 다른 지역보다 더 가부장사회였을 것이다. 즉, 직업현장에서도 차별을 받을 여성은 재생산 노동(가사, 육아)가 유일하게 자신의 생산성을 입증하는 방식으로 치부되었을 것이며(이는, 1세대 한국인 이주민 공동체가 확립된 캘리포니아에서는 일을 할 수 없지만, 아칸소에서는 일을 할 수 있다고 좋아하는 모니카의 모습을 통해 드러난다), 남성은 지금보다도 물질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생산성을 입증해야 했을 것이다. ‘남자는 쓸모없으면 폐기된다.’는 자조적인 대사는, 스스로를 아메리칸 드림의 주체라고 믿었던 남성 이주민들이 느끼는 실패의 공포를 형상화한다.
반면에 여성인 모니카는 남성 제이콥에 비해 성숙하게 그려진다. 그녀에게는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아메리칸드림을 성취하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이 명징해보인다. 당대의 기준으로 보자면 그녀의 (불평등한) 생산성은 제이콥에 비해 충분히 입증되었다. 모니카는 제이콥의 아집에 답답함을 느끼지만, 병원에서의 대화에서 알 수 있듯 그녀는 그래도 제이콥과 함께하는 삶을 살고자 한다. 성공이고 뭐고, 그저 함께 살고 싶으니까.
그러나 첫 계약처를 따내고 으스대는 제이콥을 보며, 그녀는 결국 그가 자신과 아이들을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지옥으로 다시 돌아가리라는 사실을 직감한다. 여기에서 그들이 한국에서 서로에게 말했던 대사가 등장한다. "우리 서로를 구원하자" 그들에게 구원은 무엇을 의미했을까? 그리고 그때의 구원과 지금의 구원은 어떻게 다른가. 영화는 '구원'이란 그것을 희구하는 주체의 시간과 위치에 따라 가변하는 상대적인 개념이며, 또 그래서 결국 구원은 본질적으로 자기 구원의 형태일 수 밖에 없음을 암시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제이콥이 그토록 바랐던 생산성은 한국 여성, 그것도 노년의 한국여성의 손길을 통해 거두어진다. 어디에서나 잘 자라는 미나리를 보며, 제이콥은 ‘할머니가 좋은 땅을 찾으셨네’라고 말한다. 곳간을 삼킨 화마는 재앙 대신 정화를 불러일으킨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그 이유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온 가족이 마루에서 뒤엉켜 자는 모습을,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순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화재 이후 제이콥은 한국인은 똑똑하다는 아집(?)을 버리고 우물을 파고, 이전과 다른 평온한 표정으로 미나리를 캔다. 그렇게 한 세대가 끝난 것이다.
'한국인은 머리를 써야해', 결국 백인의 도움을 받아 우물을 파는 마지막 씬은 씁쓸한 맛이 났다.
ㄹ. <미나리>는 미국 영화인가?
영화가 끝나고 애인은 나보고 언제부터 울었냐고 물었다. 글쎄, 아마 불이 나기 시작한 장면부터였던 것 같다. 사실 그 이후의 전개가 어땠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도 않는다. 순자의 마음이, 제이콥의 억울함이, 모니카의 오래된 애증이, 그리고 아이들이 맞이할 구체적이고 정확한 불행이, 내 머릿 속에서 화염보다 더 큰 감정으로 타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그냥 주룩주룩, 눈물이 흐를 수밖에. 영화관을 나오며 좀 민망했는지 나는 우스갯소리로, 영화 때문이 아니라 내 상상 때문에 눈물이 난거야 - 라고 했지만.
나는 내가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자면 이 영화는 미국 영화도, 외국어 영화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미나리>는 우리 같은 보통 사람이 상상하고 공감할 수 있는, 보통 사람들의 보편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물론 양비론으로 물타기를 할 생각은 없다. 미국영화냐 외국어영화냐라는 문제는 단순히 영화의 국적을 묻는 것이 아니라, 그 영화에 대한 영화제의 정치적 판단을 묻는 문제이니까.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영화제가 이 영화를 ‘외국어 영화’로 분류한 것은 분명히 부당하다. 소재 측면에서만 보아도, 이 영화의 주된 소재는 아메리칸 드림을 좇는 이민자 가정이니까. 미국 감독, 미국 촬영, 뭐 이런 세부적인 사항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이쯤되면 애초에 미국영화, 즉 ‘로컬’의 의미는 무엇인지 되물어야할 때이다. 다분히 미국적인 소재에서 보편적인 이야기를, 감정을 뽑아낸 영화를 ‘로컬이 아니다’ 라고 한다면, 그 전례는 두고두고 미국 문화계의 손해로 남지 않을까.
한편으로 ‘외국어 영화’라는 타이틀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정이삭 감독에게는 미안하지만, 솔직히 영화 초반엔 몰입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제이콥네 가족은 설정상 모두 한국인인데, 어찌 한예리만 제대로 네이티브 한국어를 구사하냔 말이다! 오죽하면 나는 제이콥은 교폰데 한국에 와서 한예리랑 결혼하고 미국으로 돌아온 줄 알았다. 스티븐 연의 한국어 실력은 분명 이전에 비해 훌륭히 발전했고, 아이들도 잘했다. 배우들의 한국어 열연에는 감동적인 부분이 있었으며, 나는 그 노력을 충분히 존중하고 찬사를 보낸다. 그러나, 한국 관객들이 그들을 네이티브로 받아들이기엔 좀 무리 아니었을까. 윤여정이 걸쭉한 코리아 그랜드마 슬랭을 보여줬을 땐 속이 너무 시원했다. 만약 이것이 '외국어 영화', '한국어 영화'로 분류되어야 한다면. 글쎄, 다른 한국영화들을 위해 <고급 한국어 영화>라는 분류라도 만들어야할까? 이는 애초에 '외국어 영화'라는 분류의 자의성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며, 골든 글로브의 '외국어 영화'상 카테고리 분류화가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느껴지는 이유이다.
나는 미국 배우들의 한국어 실력을 비아냥대고 싶은 것이 아니다. 2021년, 어느때보다 미디어 시장이 개방되고, 글로벌 OTT가 득세하는 시대에 - 미국영화가 무엇이냐, 외국어 영화가 무엇이냐는 구분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고 싶은 것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나리>의 논란이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