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재현 Mar 28. 2021

무례한 세상에 웃으며 거짓말 하는 방법

- 진실의 조작적 정의


 이 세상엔 무뢰한들이 너무 많다. 


 신뢰할 수 있는 인간관계를 바랐지만, 가볍게 내뱉어지는 질문에 그런 바람은 속절없이 무너진다. J씨는 혼자 살아? J는 애인과 동거중이다. J씨 여친 없댔지. 소개팅할래? J는 남자를 더 많이 사랑하는 경향이 있다. J씨는 오늘 저녁에 끝나고 뭐하나? 별 일 없으면 나랑..  J는 별일은 없어도 너랑은 놀지 않는다.(“오늘 저녁엔 여자친구 만나기로 해서요, 하하”) J는 그렇게 거짓말을 한다. 배운다. 점점 교묘해진다. 이따금 아구가 맞지 않는 일들도 생긴다. (놀랍게도 무뢰한들은 그 모순을 잘 캐치한다. “여자친구 없다며?”) 거짓말은 감수분열한다. 생식하고, 번식한다. 어느 순간 통제를 벗어난다. 


 이러한 거짓말은 엄밀히 말해 선의의 거짓말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거짓말의 가장 큰 문제는, 자존감을 약화시킨다는 데에 있다. 약화된 자존감은 이를 감추고자 또 다른 거짓말을 구성한다. 거짓말의 속성이다. 어쩐지 불합리하다, 고 J는 생각한다. 내게 거짓말을 하게 만든 무뢰한들은 아무 생각도 없어보인다. 자존감이 떨어진다. 그러나 이제 와서 진실을 말할 수도 없다. 어느 순간 말려버린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건 역시 당당히 진실을 말하는 거겠지, 생각한다. 나는 동성 애인과 살고 오늘은 당신과 저녁을 보내고 싶지 않아요! 그러나 진실은 늘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거짓된 세계에서 진실의 자리는 추문이 차지한다. 어제까지 평범했던 J는 문란하고 비정상적이고 비사회적인 이상한 사람이 된다. J는 추문으로 조리돌림 되는 자신을 상상한다. 추문의 J는 묻는다. 정말 이것이 가장 이상적인 거였냐고. 


 진실로, 진실로 인간을 대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상태라고는 생각한다. 그러나 희생이 고귀한 가치라고해서 모든 인간이 희생하기를 강요할 수는 없듯이, 진실도 그렇다. 어떤 사회에서 특정한 진실을 말하는 일의 대가가 클 때, 개인에게 그것을 감내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는 법이다. 



 거짓말이라는 행위가 모든 개인에게 동등한 수준의 부담, 즉 대가를 요구하는것 같지는 않다. 우리는 권력자들이 줄담배 피우듯 거짓말을 늘어놓는 것을 본다. 그건 그들이 거짓의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거짓말의 대상에 비해 철저히 ‘우세’에 있다고 생각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진실’은 그들의 거짓말에 의해 구성되기 때문에, 그들의 거짓말의 대가는 진실을 믿는 다른 이들이 치르게 되는 것이다.

 

이 세계의 진실, 사실은 그 자체로는 측정불가한 개념이다. 사르트르가 지적했듯이, 세계의 진실은 ‘실천적인 지식을 가진 전문가에게 허구적인 보편성을 주입함으로써 구성된 특정 계급의 가치’에 가깝다. 그 가치는 ‘진실’로 인정되는 것의 단위를 제공한다. 예컨대 ‘이성애주의’, ‘정상가족’, ‘자본축적의 욕구’, ‘근로의 의무’ 따위. 얼핏보면 단위처럼 보이지 않는 이 가치들은, 우리 사회에서 소위 ‘정상시민’의 순도를 측정하는 명백한 패러미터로 기능한다. 제시된 네 가지중 하나만 없어도, 다수의 눈에 우리의 삶은 거짓된 삶으로 전락하고 무언가 항변해야할 것 같은 압박감을 느끼게 된다.


권력자들은 거짓된 삶을 살면서도 늘 ‘검증’하는 우세의 위치에 놓여있다. 그들에 의해 우리의 말과 삶은 쉽게 거짓말이 된다. 그 구도가 흔들리지 않는 한, 우리의 말은 손쉽게 거짓말이 되고 지속적인 열세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약자인 우리가 거짓말을 하며 ‘우세’에 설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전통적으로 약자의 거짓말이 우세에 서는 - 긍정되는 - 필드는 ‘학문’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경외로운 자연에 대항해 해석하는 미약한 인간의 역사. 학문의 영역에서 인간은 불가해한 세계를 이해할 있는, 즉 관찰할 수 있는 사태를 만들기 위해 ‘개념’을 도입했다. 그러나 지식이 확장될수록 고안된 개념들은 더 이상 새로운 현상을 설명하지 못하였고, 과학자들은 관찰의 범주를 넓히기 위해 새로운 방법을 창안했다. 그것은 조작적 정의였다. P. W. 브릿지맨이 『근대 물리학의 논리』라는 책을 통해 처음 사용한 조작적 정의는, “관찰할 수 없는 것을 관찰 가능하도록 한 개념이 관찰되는 사태를 정의의 한 부분으로 포함시키는 정의”이다. 시간을 육안으로 볼 수 없으나 조작적으로 정의된 시간 개념에 따르면 누구나 1일을 24시간으로, 1분을 60초로 받아들인다. 정말이지 멋진 거짓말이다. 


 조작적 정의는 근대물리학에서 태동했지만 사회학, 심리학 등에서 보다 절실히 사용되는 듯 하다. 진리값의 측정단위 자체가 자연과학에 비해 규명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영역의 학술논문에서 개념의 조작정 정의을 어떻게 하였느냐만큼, 창의성과 엄밀함을 도전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부분은 없어보인다. 그 ‘거짓말’을 얼마나 잘 하였느냐가 중요한 평가기준이 되고 적극적으로 긍정되는 이유는, 그것이 현재로선 불가해한 현상이나 세계를 해석하고 변화시키리라 기대되기 때문인 것이다. 조작적 정의는 약자인 거짓말인 동시에 약자에 의해 구성되는 새로운 진실의 단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거짓말’이라는 개념은 ‘진실의 조작적 정의’로 정의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 무뢰한들을 바라본다. 여전히 그들은 이해할 수 없는 존재처럼 느껴진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던 것 뿐이다. 그들을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규정하고, 단지 피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면 지금의 열세의 구도를 바꿀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낡고, 경직된 언어를 관찰하여 틈을 발견한다. 새로운 진실을 만들 수 있는 거짓말을 생각한다. J씨는 혼자살아? 가족에 대한 새로운 진실을 생각한다. 혼인신고하지 않은 동거인도 가족에 포함될 때가 아닌가? 아니오, (동성애인인)가족과 살고 있습니다. 좋아, 다음. J씨는 여자친구 없댔지? 내가 괜찮은 여자 소개해줄게. ‘여자’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생각한다. 젠더는 섹스에 앞선지 오래 아닌가? 아, 말씀 안드렸나요? 사실 (스스로를 여성스럽다 생각하는) 여자 친구 있습니다. 좋아, 자연스러웠어. J씨는 오늘 저녁에 끝나고 뭐하나? 별 일 없으면 나랑..  ‘별 일’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생각한다. 아, 죄송합니다. 오늘 저녁엔 긴히 처리해야할 일(사랑하는 애인과 넷플릭스에 맥주 한잔하기)이 있어서요. 


 세상의 무례함에 J들이 주눅들지 않고 마음껏 거짓말할 수 있기를, 그리하여 새로운 진실을 은근슬쩍 조작해낼 수 있기를 바라며.       

작가의 이전글 영화 <소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