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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현 Mar 29. 2021

중독에 관한 단상 1



 “도시라는 지옥을 혼자서 정찰하고 뒤를 밟으며 유람하는 보행자, 즉 도시의 풍경을 지극히 육감적으로 발견해가는 관음적 배회자가 장비를 갖추면 사진가가 되는 것이다. 지켜보는 즐거움을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감정을 이입하는 데도 뛰어난 만보자는 이 세계가 ‘그림같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 보들레르


 내가 다니던 대학가에는 헌책방이 많았다. 해동고서, 도동고서, 이름들이 무슨 무협지에 나오는 비법서 같았다. 해가 잘 들지 않는 후미진 건물이나, 반지하에 자리하고 있었다. 내가 그곳을 처음 찾은 이유는 전공서적 때문이었다. 학교 차원에서 공동구매를 한 원서들을 학기초에 사야 했는데, 나는 늘 타이밍을 놓쳤다. 원서들은 해외구매를 해야해서 비쌌고, 배송도 오래걸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헌책방을 돌다가 우연히 필요한 책을 단돈 천 원에 구했고, 그 이후로 나는 틈만나면 헌책방에 갔다.


 내가 자주 가던 곳 이름은 ‘헌책방’이었다. 서로 무림 고수라고 자웅을 겨루는 와중에 이름이 ‘고수’인 격이었다. 지하도 아닌데 습윤한 먼지냄새가 풍기는 곳이었다. 코가 좀 근질거렸지만 묘하게 냉랭한 느낌이 드는 냄새였다. 책방 주인은 책으로 둘러 쌓인 입구쪽 카운터에 반쯤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누가 들어오면 흘깃, 안경을 살짝 내리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열 평도 안되는 협소한 공간은 말 그대로 책으로 가득차있었다. 서가를 가득 채우고 나온 책들이 모종의 규칙성을 갖고 바닥에 쌓여있는것 같았다. 찾기 힘든 책을 주인장에게 물어보면, 그는 무언가 머리속으로 계산하는듯 잠깐 멈췄다가 이내 느릿느릿 움직이기 시작했다. 위치를 정확히 기억하는건 아니었던거 같다. 십여분 이상, 꽤 오래걸릴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TV쪽으로 시선을 옮겼고, 거기에선 우리말 겨루기나 생활정보 프로그램같은 따분한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TV는 그를 지루함이 아니라, 어떤 두려움으로부터 지켜주고 있는 것 같았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주인장은 머리에 비진 땀을 흘리며 무표정한 표정으로 찾던 책을 툭 건네줬다. 어떤 때는 절레절레, 그 책은 봤는데 이젠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젠 없다고? 나는 팔린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런 의미는 아닌것 같았다. 책방이 책을 삼키기라도 한단 말인가. 그러면 나는 더 캐묻지 않고 다른 책을 찾았다. 그는 다시 느릿느릿 조용히 자리로 돌아가 TV볼륨을 높였다.


 그런 주인이 왠지 신경쓰이기도 해서, 나는 원하는 책을 못 찾아도 한권씩은 사고 나왔다. 생전 안 읽을 이상한 책을 사는 경우도 많았다. 꿉꿉한 책먼지가 시야를 흐리게 하는게 틀림없었다. <선형대수학 입문>, <슬픔이여 안녕>, <문화의 수수께끼>(한길사 번역초판), <제국주의론>(해적판) 같은 책들. 약속이나 한것처럼 페이지들은 누렇게 변색되어있고, 퀴퀴한 물자욱들이 농담처럼 번져있었다. 낡은 책장을 넘기며 나는 이 책의 원래 주인은 누구였을까 상상하곤했다. 어떤 경위로 여기까지 왔을 지 궁금했다. 곳곳에 단서가 있었다. 맨 앞페이지에 작은 편지말이 쓰여져 있기도 했고, 페이지마다 자근한 메모같은게 새겨져있기도 했다. 본문보다 그런 게 재밌을 때가 많았다. 일부러 그런 낙서가 많은 책들을 고르기도 했다. 책에 담긴 사연과 역사가 깊을수록 가격은 낮았다. 자본주의의 몇 안되는 아름다움이었다. 

 헌책방의 경험은, 중고품에 대한 호기심을 연쇄적으로 불러일으켰다. 나는 알라딘의 회원이 되었고, 낡은 것에 대한 관심은 책이라는 카테고리를 넘어섰다. 한동안 빈티지라는 이름이 붙은 거면 뭐든 좋아했다. 피부에 뭐 생길거 같지 않은 정도면 뭐든지. 빈티지 자켓, 빈티지 글라스, 빈티지 시계, 빈티지 재즈 뮤직.. 콜록거리면서 동묘 구제시장을 돌아다녔다. 세운상가를 구경다녔다. 앤티크 상점에 쭈뼛쭈뼛 들어가 구경했다. 정작 무언가 사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그저 구경했다. 나는 작고 예쁜 죽음들을 조망했다. 


 나는 사람들이 자기가 살아보지 않은 시대를 그리워한다는게 늘 신기했다. 90년대 생인 우리는 시티팝으로 대표되는 일본 버블 경제기의 정서를 그리워했다. 바우하우스의 시대를 그리워했다. 누벨바그를 그리워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답은 하나였다. 실은 우리가 오래전 부터 살아왔다는 것. 나는 빈티지가 주는 그런 미묘한 기시감을 좋아했다. 그것들은 내가 죽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물론 현실적으로 말도 안되는 얘기였다. 영혼불멸이니, 그런 추상적인 개념을 신봉하는 건 아니었다. 그보다는 어떤 근본에 대한 욕구같은 거였다. 나는 내 존재 근거가 부실하다고 느꼈다. 부실하다, 는 말은 금방이라도 무너질것 같았다. 내가 희미해지고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아니, 애초에 선명한 적도 없었던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세상에 대한 이해가 명확하고 확실해질수록, 나는 가난해지고 있었다. 무협지로 치자면 기를 모으다 주화입마에 빠지는 것 같았다. ‘나’를 보장할 어떤 확실한 기준같은게 필요했다. 


 사람들은 오래된 것에 대한 신앙을 갖고 있었다. 소위 ‘근본’이었다. 오래된 사물을 통해 근본욕구를 채우는 일은 부적절하고 유치한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머리와 달리, 가슴은 그 일을 무척 좋아했다. 사람들이 명품에 집착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명품은 빈티지의 아류였다. 명품에 있어 가치는, 초기 원조 모델로부터 얼마나 달라지지 않았는가에 달려있었다. 거의 똑같은 제품들, 예컨대 복각 제품들은 늘 베스트셀러였다. 빈티지는 명품을 포함하는 상위 개념이었다. 누구로부터 숭배를 받느냐의 차이였다.


 낡은 책에 새겨진 육필에 집착하는 이유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나는 오래된 사물에 담긴 육감과 조응하는 일에 목말랐었다. 그 순간만큼은 인간 육체의 슬픈 한계성을 극복하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오래된 아이디어 -예컨대, 책의 본문-와 조응하는 일과 분명 달랐다. 죽은 사람의 글을 읽는 일과, 녹음된 음성을 듣는 일의 차이와 같았다. 죽음을 붙잡아두는 일이 가능하다는 깨달음과, 어떤 식으로든 우리는 계속 존재해왔다는 냉온한 진실을 마주했다. 


 오래된 것들에 집착하고, 그 이유를 언어로 설명하는데 계속적으로 실패하면서 나는 매머드뼈를 수집하는 원시인의 표정을 상상했다. 이제는 없다,고 말하는 책방 주인의 얼굴이 교차했다. 중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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