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숙성된 회 한 점의 기쁨에는 어딘가 애석한 구석이 있다.
나는 사람들이 왜 나이드는 일을 싫어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근사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몸과 마음이 무르익고, 깊어지고, 그래서 더 많은 권리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성숙해지는 것은 나의 오랜 바람이었다. 나이듦이 성숙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나는 있는 힘껏 그들을 경멸하면서도 그 바람을 완전히 버리진 않았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느니, 그런 낡은 클리셰처럼.
나는 괴팍한 노인들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어딘가 늘 불만이고, 화를 내고, 꼬장꼬장한 그런 늙은이들이 나오는 이야기는 늘 재밌다. 영화 <그랜토리노>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완전 취향저격이다. 고집불통에 보수적이고, 틈만 나면 중얼중얼 욕하는 그런 노인들이 어쩌다보니 곤란한 일에 처하고 - 버려진 새끼 동물을 키우거나, 새끼 같은 누군가를 키우게 되거나 -, 원래는 정을 안주려고 했지만 이런저런 골치 아픈 우연에 의해 신경을 쓰게 되고, 결국 따뜻한 마음을 회복한다는 그런 서사. 누군가는 유치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런 스토리를 좋아한다. 사실 꼭 노인이 아니어도 된다. 내 기준에선 <레옹>도, 그런 늙은이의 서사니까.
나는 그런 이야기만이 줄 수 있는 종류의 믿음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노인에게 어떤 변화도, 발전도 기대하지 않으니까. 삶이 연극이라면, 그들은 어떠한 기대도 받지 못한 채 매번 일상이라는 무대에 올라야하는 단역들이다. 그들이 한때 주연이었는지, 조연이었는지를 관심 갖는 사람은 없다. 그들은 조명 받는 일조차도 두려운, 서서히 흩어지는 그림자다. 그래서 나는 조심스레 그들을 다룬 작품들의 은은한 조도를 애호한다. 흐릿해지는 인물의 원색을 드러내려 고심하는 채도를 애정한다. 세상 삐딱함도 둥글게 담아내려는 구도를 선호한다. 그러니까 나는 우리에겐 시간도 빼앗을 수 없는 저마다의 빛깔이 있다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영화 속 괴팍한 노인이 사랑스럽게 보이는 순간을 마주하면, 나는 별수없이 고개를 젓게 된다. 기분 좋게 한방 먹은 느낌이랄까, 그런 유쾌한 패배감을 느낀다. 한 인간의 신념이란 생각보다 거창한 게 아니지만, 그것을 지키는 일은 어떤 경우든 숭고하다는 진실을 마주한다. 그리고 나는 늘 그 반대로 생각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모름지기 신념은 거창해야하기에, 그것을 유지하는 일은 세운 다음으로 미뤄놓고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설령 꼰대가 될지언정 자신의 퀴퀴하고 보잘것 없는 신념을 지켜나가는 괴팍한 노인들의 얼굴을 바라본다. 심술이 덕지덕지 붙었다. 세월이 뜻대로 흘러주지 않은 탓이다. 다른 방식으로 보자면, 세월에 순응하지 않은 탓이다. 마흔이 되면, 나이가 들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는가. 그들은 온몸으로 책임을 지고 있다. 꼬장꼬장하게 자신이 지은 책무를 다하며 쓸쓸히 늙어가고 있다. 아무도 지키라고 한 적 없는 그런 책무를, 아무도 지키고 싶어하지 않는 낡은 책무를 지키는 노인의 모습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면, 사랑은 감히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싶다.
이 세계의 온도와 습도는 곳곳마다 달라서, 어떤 것은 썩고 어떤 것은 숙성된다. 나는 날씨나 풍요를 관장하는 신처럼, 숙성을 관장하는 신 같은게 있다고 믿는다. 숙성시킬 대상을 고르고, 진득하게 그의 일생에 적정한 온도와 습도를 가하는 그런 신. 다른 신들이 그의 능력을 보잘 것 없다고 비웃고, 세계의 어떤 신화에서도 그를 다루지 않았다하더라도 그는 말없이 자기 일을 수행할 것이다. 그리고 끝내 자기의 작품을 세상을 꺼내놓을 것이다. 퀴퀴하고, 꼬장꼬장하고, 한 점 덧없이 흩어지는 순간까지 꼿꼿히 서있을 그런 존재들을.
그러나 신은 그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그의 사랑이라고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