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에 정도가 있을까. 아름다운 이별 같은건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세상 모든 것이 그렇듯 이별도 아름다워질수 있다고 생각한다. 조심스럽지만 그것은 노력의 문제, 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어떻게 사랑을 시작해야하는지는 묻지만, 어떻게 이별을 시작해야하는지는 묻지 않는다. 우리는 이별이 도래한 후의 시간, 슬픔과 극복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마치 이별이라는 것이 늘 불가피하고 갑작스럽게 도래하는 재앙인 듯이. 그러나 일찍이 맞이되어야 하는 이별도 있다.
넷플릭스에서 <딕 존슨이 죽었습니다>(이하 ‘존슨’) 라는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다큐멘터리 감독인 딸이, 알츠하이머에 걸린 정신과의사 아버지 딕 존슨의 가상 장례식을 촬영한다. 딕은 촬영하는 중에도 계속적으로 악화되지만, 웃음과 재치를 잃지 않는다. 같은 병으로 사별한 아내에 대해 딕은 이렇게 말한다 “It was a long goodbye. We lost her several years before she actually passed.” 그리고 지금 그는 딸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잃어지고 있다. <딕 존슨>의 기획의도는 여기에서 출발한다. 죽음으로 잃는 자, 그리고 잃어지는 자 양측의 이별의 과정을 클로즈업함으로써, 슬픔이라는 것은 이별 자체가 아니라 그 과정을 기억하지 못하는 데에서 온다는 것을 명확히 한다.
<존슨>이 말하듯 알츠하이머의 가장 큰 허슬은 환자가 스스로 이별을, 죽음을 맞이하지 못하게 하는데에 있다. 기억을 잃는 과정에서 그는 사랑하는 이들과의 이별과 단절된다. 일생을 조망하고, 정리할 기회를 박탈당한다. ‘아이로 돌아간다’는 비유는 낭만적일수는 있어도 좋은 비유는 아니다. 아이에겐 이제 사랑과 이별을 결정할 미래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의도치않게 사랑하는 이들을 소외시키고, 종래엔 자기 자신으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된다.
‘죽음의 과정’을 이토록 명징하게 은유하는 질병이 있을까. 죽음이란 존재의 소멸이다. 존재는 기억을 통해서만 성립한다. 알츠하이머는 이를 섬뜩하고 간결한 방식으로 증명한다. 불필요한 육체적 고통이나 시각적인 병변 따위는 죽음의 본질이 아니라는 듯이, 알츠하이머는 유능한 장의사처럼 천천히 환자를 염습한다. 두려워해야할 것은 알츠하이머라는 질병 자체가 아니라, 잊힌다는 증상 자체임을 환기한다. 잊혀진다는 것이 죽음의 알레고리라고 할 때, 우리는 대부분이 죽음의 증상을 겪고 있음을 목도한다. 그것은 노화와 같은 생물학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존재가 잊고 잊혀지고 있으며, 대체로 저항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진단이다. 기억하고/되고자 하지 않는 이상 죽은 것과 다름없다 - 라는 건조한 명제가 차가운 비석처럼 꽂힌다.
메모리얼과 기록의 수단을 통해 인류는 죽음을 포함한 이별에 대항해왔다. 관혼상제는 축하나 애도하기 위해서기 이전에, 어떤 일이 있었다는 보증이자 기록이다. <존슨>은 존슨의 죽음에 대한 선제적인 애도이기 이전에, 존슨이라는 존재의 보증이다. <존슨>은 존슨을 통해 만들어진 파생물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존슨>이 잊히면 존슨도 잊힌다. 영화의 말미에서 감독은 존슨의 죽음을 3번 선언한다. (All I know is that D.J is dead) 아직 죽지 않은 존슨이 죽었다는 사실을 명명하는 역설적 선언을 통해, <존슨>은 존슨을 구원한다.
영화 <존슨>은 이별에 대한 환대를 이야기하고 있다. 지나간 사랑에 대한 지고의 애도는, 그것이 지나감을 인정하고 어루만지는 일임을. 다시는 오지 않을 일임을 받아들이고, 또 그래서 마지막까지 애써 사랑하는 일임을. 그래서 적어도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은, 일찍이 맞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이별이 아름다울 수는 없지만 이별을 환대하는 일은 그 자체로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이제 우리는 이야기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