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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현 Mar 09. 2022

보는 것(Look)과 보이는 것(See)들의 세계

넷플릭스 영화 <돈 룩업 Don't Look Up> 

 얼마 전 화제가 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돈 룩업>을 보았다. 


 영화 속 ‘돈 룩업’의 장면들과 타이틀의 부정 명령문은 지나간 역사속의 현장과 슬로건들을 소환한다. 나는 특히 이미 우리에게는 (정신병리학적 용어로) 익숙해진 한 현상 -공황- 이 계속 떠올랐는데, 그건 이 영화가 가진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의 대립을 착란증에 가깝게 희극적으로 묘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할아버지처럼 편안한 죽음을 맞고 싶다’는 인용구와 함께, 시작부터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영화 속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대통령 집무실 앞에서 이루어지는 내러티브에 주목했다.

 공황장애를 앓는 민디 박사는 신경안정제 1알을 1/4로 쪼개어 먹으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지금 이 상황을 통제하고 있으며, 이 정도로도 괜찮다고. 그러나 관객들은 모두 알고 있다. 그는 이 상황을 통제할 수 없을 것이며, 어떠한 것도 통제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이 영화는 거칠게 요약해본다면 다음과 같다. : 현대의 기술로도 통제될 수 없는 재앙이 도래할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혜성을 발견하고, 궤도를 예측하고, 충돌을 예상하고 조치를 취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일련의 과정들은, 현대 과학의 정석적인 연구방법론이 불확실성의 세계에서 얼마만큼 무용한지를 증명하는 듯하다. 이는 집무실 앞에서 심스 장군이 민디와 디비아스키를 속이며 공짜 스낵을 돈 받고 파는 장면을 통해 익살스럽게 은유된다.


 디비아스키는 계속해서 심스 장군에 대해 생각한다. 3성 장군에, 국방부에서 일하는 엘리트 군인이 대체 왜 10달러를 벌고자 거짓말을 했을까? 이에 지구방위합동본부 요원은 일전에 ‘스팅’을 만났던 자신의 일화를 소개한다. 거짓말 안하고, 스팅이 자신의 눈 앞에서 눈 하나도 깜짝하지 않고 크게 방귀를 뀌었다고. 그러고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게 전략이라면 성공한 셈이죠. 나는 아직도 그가 매력적으로 보이니.”


 심스 장군, 스팅, 혜성. 이들(행위)의 공통점은 ‘불가해하다는 점’이다. 심스 장군이 사기를 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은, 그가 이 공고한 자본주의-계급 사회 체계의 정점에 서있는 인물 중 하나라는 점이다. 그런 이가 푼돈을 벌기 위해 사기를 칠거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하는 것이다. 스팅의 행위는 대중의 긍정적 인식을 자본으로 사는 연예인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는 믿음을 해친다. 그리고 지구가 멸망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해치는 혜성의 존재. 디비아스키는 인간에게 내재된 무의식적이고 근본적인 믿음이 - 곧, 근대적인 인식론이 흔들리는 상황에 처한 회의주의자로 표상된다.


반면에 민디 박사는 말주변이 없고 외재적 상황에 흔들리는 듯 하지만, 기본적으로 신념형 인물이다. 그는 과학자로서 ‘통제’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인물이다. 그는 ‘통제’에 대한 스스로의 나약함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믿는다. 그러나 그는 불가해한 상황에 대한 통제 가능성을 지나치게 확신해 임무의 변수 - ‘피터 이셔웰‘ - 의 개입을 배제함으로써 실패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보다 더 큰 ’통제력‘을 가졌다고 믿는 피터에게 감히 저항하지 못한다. 자신의 프로젝트를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게 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소심한 반항을 한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알고리즘이었다. 너는 혼자 외롭게 죽을 것이라는, 예언. 민디 박사의 이러한 모습은 비록 그가 지배층의 태만에 반기를 드는 양심적인 과학자로서의 자아를 갖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성공한 과학자인 피터로 대표되는 통제계급의 논리에 철저히 복무하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피터 이셔웰이라는 인물의 본성을 가장 잘 드러낸 표정과 장면이 아닐까?

민디와 디비아스키는 극의 전개에 따라 그들이 가진 ‘통제’에 대한 대립되는 입장으로 인해 멀어졌다가, 종반부에는 다시 가까워진다. 이는 그들이 ‘신경 써서 보았던(Look)’ 것이 이 세계에 ‘보이기(See)’ 시작하면서 일어난다. 혜성이 맨눈으로 관측되기 시작한 것이다. 종말이라는 불가해한 현상이, 시각을 통해 별다른 설명 없이 받아들여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상황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 그러나 상황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태도가 변한 것이다. 이때부터 정치인들은 각자의 아젠다를 들고 대중들을 선동하기 시작한다.


실제로 이 장면은 대공황을 두고 일어났었던 부르주아와 노동계급의 각축전을 연상시킨다. 작가는 대통령 아들의 노골적인 대사를 통해 역사적 대립구도를 차용했음을 인증한다. 마르크스가 대중적 지지를 얻게 된 배경에는, 그가 주장한 ‘10년 주기설’이 대중들의 눈 앞에서 시현되었던 것에 있었다. 그는 자본주의는 공황 → 불황(디프레션) → 회복 → 호황이라는 주기를 갖는다고 말했고, 마르크스가 살던 시대였던 19세기 중엽의 자본주의는 공황에서 호황까지 대체로 10년의 주기를 가지고 운동을 했었다. 그의 이론에 회의적이었던 대중들과 학자들조차 이론이 현실화된 이후부터는 열렬한 지지파와 반대파로 나뉘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처음에 공황은 ‘불가해한’ 현상이었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엄밀히 말하자면 ‘불황’은 예측불가하고 방지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여전히 현상학적으로는 불가해하다. 그것이 도래하리라는 사실만이 오직 명확할 뿐. 사람들은 무언가 물리적으로 보이기 시작할 때 비로소 믿음을 갖는다. 그리고 그 믿음은 통제에 대한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역사는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구체적인 요구로 나아갔고, 그 결과 혁명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믿음이 사그라들고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자 세계는 다시 19세기 중반으로 회귀했다. 신경 써서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그 세계로.


 다시 작품으로 돌아와서, 실제로 혜성이 보이기 시작한 사실에 대해 민디 보다 더 기뻐한 것은 디비아스키인 것처럼 보인다. 믿음을 포기한 그녀는 혜성이 보이는 순간 - 비록 그것이 그녀가 알고 있던 사실과 아무런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 뛸 듯이 기뻐하며 민디에게 그 사실을 알린다. 영화는 이 지점에서 중요한 주제의식을 전달한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불가해한 현상을 통제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라는 점을.


 ‘받아들임’ 영화는 그 가치를 종반부에 배치한다. 어쩌면 지나치게 가짜 화해스럽고 타협적인 결말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형태의 결말 배치가 꽤 나쁘지 않다고 느꼈다. 불가해한 현상을 통제할 수 없다는 생각은 패닉만을 불러온다. 디비아스키가 그랬듯이. 역설적이게도 민디 박사와 디비아스키는 현실적으로 더 이상 가망이 없는 상황이 되자 노력한다. 그들은 이미 종말을 받아들였으며, 그렇기 때문에 최후까지 노력하는 것처럼 보인다. 재미있는 점은 이러한 종반부의 실천을 통해 알고리즘이 예언한 민디 박사의 최후가 바뀐 듯이 보인다는 것이다. 알고리즘은 그가 과학자형-권력형-신념형 인물이라고 생각했고, 그러한 측면에서 ‘받아들임’이라는 종교적인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라 계산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받아들임의 결말은 한편으로 ‘돈 룩업’을 외치는 집단이 대중들에게 바라는 양태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상황은 다소 까다로워진다. 영화는 이 문제에 대해서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블랙코미디임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풍자극과 달리 계몽성보다 핍진성에 더 초점을 맞춤으로써 독특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실제로 재난상황이 발생하면 흘러갈 수 있는, 개연성 있는 하나의 내러티브처럼 느껴졌다. 영화는 얄궂은 섬뜩함을 주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보도록(Look) 우회적으로 요구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풍자의 대상이 되는 집단이 조금 과하게 우스꽝스러워지면서 우회성이 약화된 것 같아 아쉽기도 했다. 비판의 대상이 너무 적나라해지면 메시지는 보다 직설적이게 되고, 직설적인 메시지는 계몽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굳이 타협형 결말을 배제하면서까지 피하고자 한 계몽성이 오히려 대두되는 꼴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영화는 불가해한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지와 더불어, 대중과 유리된 현대 사회의 분과학문 - 특히 과학 분야의-를 어떻게 소통해야하는지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준다. 특히 화법적인 차원에서, 민디 박사와 디비아스키, 그리고 지구방위합동본부 연구원, 그리고 피터는 모두 다른 방식으로 말한다. 그리고 중차대한 문제가 소통의 문제로 대중들에게 공유되지 않는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영화 속 대통령 아들이 우리가 하루에 몇 개의 멸망 시나리오를 보고받는지 아냐고 이죽대던 말이 기억에 남는 까닭이다. 그들에게는 보이지만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어떻게 매개할 것인가는, 비단 과학자 뿐만 아니라 이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세계의 모순을 매 순간 목도하는 우리들도 간과하기엔 무거운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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