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켄 윌버 <무경계> 서평
그들이 예수에게 말했다.
“어린아이처럼 되면 그 왕국에 들어가는 겁니까?”
예수가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가 둘을 하나로 만들 때,
안을 밖처럼, 밖을 안처럼, 위는 아래처럼 만들 때,
그리고 남자와 여자를 하나로 만들 때,
너희는 그 왕국에 들어가리라.“
- <도마복음 中>
이 책은 우리가 현재의 경험을 여러 부분으로 단편화시키고 경계를 설정함으로써, 스스로를 다른 사람들과 외부세계로부터 - 심지어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어떻게 끊임없이 소외시키고 있는지를 탐구하는 책이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는 자각을 인위적으로 분할하고, 구분하면서 경험과 경험, 삶과 삶이 서로 투쟁하도록 분열을 만든다고 한다. 예컨대 이성 대 본능, 마음 대 몸, 삶 대 죽음, 주체 대 객체 등의 구분은 우리의 삶을 고통스러운 전쟁터로 만든다는 것이다. 저자는 동서고금의 신비가와 철학가들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이런 경계를 만드는지, 그리고 그 경계에 대해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탐구한다.
1. 나는 누구인가 ?
-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나인 것’과 ‘내가 아닌 것’ 사이의 경계선을 긋는 행위에서 비롯한다. 대부분의 사람들, 유기체로서 자신을 인식하는 사람들이 가장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공통된 경계선은 ‘피부경계선’이다. 피부 안쪽의 것은 모두 ‘나’이며, 그 밖에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는 것이다. 경계선은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사람들은 ‘나’라는 유기체 속에서도 특정 부분을 좀 더 친밀하게 느끼며 그것과 동일시한다. 예컨대 ‘마음’, ‘정신’ - 해부학적으로 표현하자면 뇌- 등이 그것이다. 마찬가지의 원리로, 에고의 내부에는 또 다른 경계선이 지어질 수 있다. 우리가 자신의 마음의 일부분 중 ‘내가 아닌 것’이라며 부정하게 되는 것이 있다. 즉, ‘나’ 가 정체성 경계의 어느 수준에서 정의되었느냐에 따라 우리는 ‘자아’를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가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듯이, 군사학적으로 보자면 ‘경계선’은 ‘전선’을 의미한다. 하나의 경계선을 기점으로 두 개의 대립된 영토가 설정되고, 이는 그 지점이 전투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한다. 예컨대 ‘나’의 인식이 전유기체 수준에 있는 사람은 외부 환경을 적으로 본다. 에고 수준에 있는 사람은 환경뿐만 아니라 자신의 몸뚱아리(대개 통제불가능한) 또한 이질적인 대상으로 본다. 페르소나 수준에 있는 사람은, 주지하다시피 더욱 극명하게 자신 대 ‘환경과 몸과 정신 내부의 원치 않는 부분들’과의 상시적인 전면전을 한다. 영혼의 경계선은 곧 영혼의 전쟁터를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계선은, 전장에 그어진 전선이 외부 상황변화에 대응하여 언제든지 재편될 수 있듯이, 수정불가능성을 내포하지는 않는다. 경계선은 언제든 다시 그어질 수 있다. 물론 그만큼의 노동이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그는 자아의 협착화를 야기하는 경계선들을 인식, 이를 재편하는 과정을 통해 자아의 확장, 자아와 신체의 통합, 궁극적으로는 합일의식에 이를 것을 강조한다. 자아의 위기와 위협을 느끼는 현대인이라면, 이 책을 통해 우리의 자아가 어떠한 방식을 통해 왜곡되고 또 다시 확장될 수 있는지에 대한 상당히 유용한 정보들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2. 아담의 위대한 과업과 파국 - 대극의 인식
- 창세기에 따르면, 아담에게 부여된 최초의 과제는 자연계에 존재하는 동식물에 이름을 지어주는 일이었다. 자연은 이름표를 부착하지 않기에, 그는 동식물들에게 이름을 붙여준다. 아담은 복잡한 자연의 과정과 형상을 분류하고 그것들을 분리하여 인식하는 법을 배운다. 그는 유사한 동물들을 한 집단으로 묶는다. 다양한 동물 집단 사이에 마음속에 경계를 긋는 것이다. 그는 정신적, 상징적 구분선을 설정하는 위대한 과업에 착수한다. 자연은 지도화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아담은 최초의 지도 제작자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언가를 결정한다는 것은 선택할 것과 그렇지 않을 것 사이에 경계를 긋는 일을 의미한다. 작은 일부터 상상조차하기 어려운 거대한 일에 이르기 까지, 우리의 삶은 전부 경계를 설정하는 일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은 경계를 그으며 지식을 얻어갔다. 그러나 전술하였다시피 경계는 ‘어디서 전쟁이 일어날 것인가’를 의미하는 군사분계선이었다. 경계를 확고하게 다질수록 전쟁터 역시 점점 더 확고해졌다. 쾌락을 원할수록 고통은 더욱 두려워지고, 선을 추구할수록 악에 대한 강박은 강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비극적인 점은, 대부분의 인간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 대극 중 어느 하나를 근절시키려는 틀에 박힌 시도에 머물러왔다는 것이다. 악을 전멸시키려 애쓰는 것으로 선악을 다루고, 죽음을 상징적 불멸로 은폐하는 것으로 삶/죽음을 다뤘다. 한 쌍의 대극이 있다면 부정적이고 원치 않는 한쪽을 근절해야만 비로소 삶을 완전히 영위할 수 있으리라 믿는 것이다.
여전히 모든 대극은 암묵적인 동일성을 공유한다. 양극의 차이점이 아무리 명징해도, 양극은 다른 쪽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상호의존적인 것이다. “있음과 없음은 서로를 낳아주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를 전제로 성립되며, 앞면과 뒷면은 서로 따라다닌다.” 장자의 말대로, 대극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본질적으로 하나이다. 현대 문명의 객관성을 담보하는 과학의 영역에서도 이는 오래전에 밝혀졌다. 파동과 입자 간의 분리는 파자 속으로, 관찰자와 대상의 대립관계는 무너졌다. 주체 대 객체, 시간 대 공간이라는 오랜 대극도, 이제는 서로 잘 짜여진 하나의 연속체로 여겨진다. 우리는 시공간적 사건만을 논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경계선을 긋는 행위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무언가를 인식하고 결정하기 위해 선을 긋는 것은 우리의 오랜 관습이고, 고치기 힘든 습관이다. 그러나 그 선을 서로 완전히 대극되는 두 항 간의 경계로 받아들이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고통과 쾌락을 구분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고통으로부터 쾌락을 분리할 수는 없다.
하기야 이러한 철학적 사변은, 우리네 동양문화에서는 어쩌면 익숙하고 일반적인 사고방식일 지도 모른다. ‘해탈’한 자는 양극으로부터 해방된 자이다. 그는 평화를 찾기 위해 대극의 하나를 제거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투쟁을 만들어낸 경계가 애초부터 환상이었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여준다. 요컨대 그 둘을 초월하면서 감싸 안는 하나의 토대를 발견하는 것, 동양에서 말하는 열반, 해탈, 깨달음, 그 토대를 저자는 합일의식이라 부른다. 도마복음에서 역설한 천국의 실체는 이러한 합일의식의 세계, 즉 ‘대립 없음’, 곧 ‘비이원성’의 세계인 것이다.
3. 하강하는 자의 낭만 - 선성의 회복
저자는 표를 통해 최고도의 인식단계인 합일의식을 맨 아래에 위치시키고, 가장 협소한 자아인 페르소라는 최상위에 위치한다. 그는 자아의 확대 과정을 줄곧 ‘하강’으로 표현한다. 우리가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합일의식의 단계가 가장 내밀하고 잊혀진, 즉 자아의 원형이라는 암시이다. 즉, 태초의 인간 - 개인 단위에서는 ‘갓난아이’ - 는 온 우주와 자신 간 경계를 짓지 않는 ‘합일의식’의 단계에 있으나, 성장하고 의식이 발달하는 과정에서 경계를 지어오며 결국 협소한 자아로 귀결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합일의식이라는 단계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상태인가? 초개아, 켄타우로스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를 위해 경계의 점진적 해체를 의미하는 4단계 자아모형의 특징을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1) 페르소나 - 그림자 받아들이기
-가장 협소한 자아 형태, 자신의 내부에서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부분들로 인해 협착화된 자아이다. 프로이트의 <투사> 개념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자아가 느끼는 사회적 압력에 대해, 그것이 사실은 외부환경을 목표로 한 투사된 충동의 결과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동성애 혐오(내면의 동성애적 성향을 은폐하기 위해 타자에 이를 투사해 공격한다), 마녀사냥 등이 있겠다. 이를 상황에 대입하면 다음과 같다.
- <증상> 취준생 김기남은 취업준비를 하라는 부모님의 말에 큰 압박을 느낀다.
<그림자(원형 동인)> 김기남은 사실 취업을 멋지게 성공하고, 더 많은 인정을 받고 싶다.
그는 이를 인정하지 않지만, 여전히 압박을 느낀다.
그러나 정말로 아무런 욕망이 없다면 그는 의무감을 전혀 느끼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강력한 열등감과 거부감을 느낄 대마다 먼저 자신의 투사를 찾아보고, 이를 받아들이는 편이 현명하다. 대부분의 긴장상태는 이러한 동인을 인정하는 순간 대부분 해소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증상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장을 위한 기회인 것이다. 그런 자신의 투사를 거둬들인다는 것은 경계를 허물고 이질적인 것으로 생각한 것을 자신의 일부로 포함시키는 일이다. 이 과정을 통해 자아는 확대되고, 오랜 숙적이 동맹국이 되고, 서로 싸우던 대극이 마음을 열고 친구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모든 것이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보듬어줄만한 어쩌면 꽤나 사랑스러운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2) 켄타우로스 수준 - 스쳐가는 현재를 부여잡기
- ‘나’의 경계를 정신에서 신체로 확대하기. 정신과 신체가 반인반수처럼 하나가 되어 움직임. 페르소나 단계가 소외한 마음을 재소유하는 것이라면, 이는 신체를 재소유하는 단계. 마음을 잃어버린 사람은 거의 없지만, 우리는 대부분 이미 오래전 신체를 잃어버렸다. 서구의 오래된 정신-몸 이원론에서 기원한 블록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저자는 신체와 자아의 통합을 주장한다. 자아와 신체가 양 대극에서 서로 싸우며 감각의 확장을 막는 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수의 대 불수의의 대극이다. 자아가 통제하는 근육과, 그렇지 못한 근육 간의 대극이다. 인간은 불수의적인 작용에 대해서는 내가 아닌 것으로 느끼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저자는 요가를 포함한 명상 훈련의 중요성을 말한다. 요가의 달인들이 호흡을 생기라고 부르는 의미를 이해하고, 들숨과 날숨을 통해 생명력의 쾌감과 알아차림을 수련한다. 나아가 자신의 신체 내 마비되거나 둔감한 부위를 느낀다. 기의 흐름을 가로막는 블록들을 식별하는 것이다. 이 블록들은, 자아 수준에서 일어난 적의를 투사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신체의 과부하라고 볼 수 있다. 적개심을 발휘, 억제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미세한 근육들을 조이기도 하고 피로하게 한다.
중요한 것은 이 같은 훈련을 통해 스스로 블록을 만들어보기도 하고, 해소하기도 하며 그것이 나에 의해 통제될 수 있다는 감각을 느끼는 것이다. 이러한 ‘섬세한 알아차림’이 가능하면, 불수의적인 신체과정들을 자기 자신으로 느낄 수 있게 되고, 느끼는 것에 대해 다른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탓을 돌릴 필요가 없다는 의미에서 깊은 책임감이 발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전유기체는, 확장된 해방감을 가져다준다. 자아가 시간 속에 살며 이익을 얻고자 미래와 과거 속을 헤매는 데에 비해, 몸을 통제한다는 감각은 온전한 현재의 기쁨을 느끼는 데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이 분리된 역량이 아니라 하나의 전체성, 총체성을 이룸으로서 잠재력의 확장이 일어난다. 후술하겠지만 이러한 현재성에 대한 인식은, 초개아 및 합일의식에 이르는 준비단계가 된다.
(3) 초개아적 인식 - 시간의 연속성 인식하기
- 감정, 감각, 생각, 기억, 경험 등 자신이 동일시해왔던 것들로부터 탈동일시를 실행한다. 저자는 이 과정을 통해 떨어져나가고 남은 것을 ‘초월적 나’라고 말한다. “나는 마음과 몸과 감정을 갖고 있지만, 나는 그것들이 아니다‘ 라는 인식의 단계. 그러나 이 단계에 이르는 것이 이전의 단계들을 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그는 어떤 목적을 위해 멋을 부릴 수도 있고, 겉치레를 할 수도 있다.(페르소나) 또한 자신의 신체로부터 발현하는 기쁨을 느끼기 위해 명상을 할 수도 있다.(켄타우로스) 그러나 이제 그는 상황과 재량에 따라 그 외관을 사용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단계에 이르기 위한 세부적인 방법론과 서술들이 있지만, 구체적인 방법론은 책을 통직접 읽어보길 권한다. 이는 많은 철학자, 신비론자들이 말해온 세계의 총체성을 인식한 자의 시각과 거의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네가 너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라” 라고 얘기할 때, 그것이 “네 이웃을 ‘진정한 너 자신으로서 사랑하라”는 의미를 깨닫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은 어제의 자신과 1년 전의 자신과 기본적으로 동일하다고 느낀다. 외면은 늙고 소모되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식이 끝없이 거슬러 올라가는 것 또한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내 안의 ’어떤 것‘이 시간의 흐름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인식, 곧 과거나 미래나 불변하리라는 인식, 사적유물론적으로 말하자면 ’유적존재로서의 인식‘이 바로 이 단계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자신의 것‘이라고 부르는 한 지식의 덩어리가 과거의 특정한 지점에서 무로부터 갑자기 출현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부당하다. 오히려 이 지식과 느낌이 본질적으로 영원하며 불변한 것이며,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오직 하나라고 생각하는 편이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우리가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그 어느 것도 진정한 나, 아는 나, 내면의 나가 아니다. 그것은 지각될 수도 정의될 수도 없다.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불교를 비롯한 동양철학에서 우리는 이를 ‘해탈’이라고 부른다. 어느 미 대륙 원주민의 오랜 언령처럼, “당신 영혼의 심연에는 인류의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4) 합일의식 - 내려놓음
이 차원은 사실 언어로 표현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합일의식이란, 진정한 실재에는 경계가 없다는 단순한 자각이다. 그러나 이를 올바로 논하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 왜냐하면 이를 위한 우리의 언어 자체가 경계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시작은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의 경계에서 출발한다. 거칠게 말하자면 경험자와 경험된 세계 사이의 간극 말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이 최초의 경계만 간파한다면 모든 경계를 간파할 수 있다.
최초의 경계를 찾아보자는 말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단계에서 저자는 경험론과 인식론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시도를 한다. 그것은 경험과 느낌으로부터 떨어져 분리된 나, 즉 분리된 채로 경험하고 느끼는 나를 아주 잘 찾아보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이런 나를 결코 발견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시사한다. 우리는 ‘보는 자’라는 분리된 실체가 분명히 존재하고, 보는 행위라는 과정을 통해 ‘보는 자’가 대상에 대한 지식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을 대상과 전적으로 분리된 보는 자로 가정한다. 그러나 정말 그러한가? 귀를 기울여 모든 소리를 들어보자. 고함소리, 웃음소리, 자동차, 종소리… 그러나 한가지 들을 수 없는 소리가 있다. 그것은 ‘듣는 자’이다. 듣는 자를 볼 수 없는 것은 듣는 자가 따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보는 자 또한 마찬가지다. 냄새도, 맛도 마찬가지다. 이 문제를 숙고하는 생각하는 자 또한 마찬가지다. 거기엔 단지 나는 생각한다‘ 라는 현재의 생각만이 있을 뿐이다. (이는 데카르트 인식론의 문법적 환상 비판의 연장으로 시발점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로인해 ’분리된 나‘ 라는 최초의 경계는 환상임이 밝혀진다고 저자는 말한다.
어찌되었건 이러한 무경계의 순간에서 우리가 주목할 지점은, 그것이 무시간적 순간이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신비가들이 동의하듯, 합일의식의 순간은 시간의 틀에서 벗어난 영원의 순간이다. 그렇다면 시간 없는 순간이란 무엇인가? 사실 우리는 일상에서 이를 종종 경험한다. 무언가에 집중해 완전히 몰입하는 경험이 바로 그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슈뢰딩거는 이렇게 말한다. “현재는 끝을 갖고 있지 않은 유일한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는 끝이 없고, 그리하여 불사이다. 현재 순간의 종말을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영원이란 현재의 본질이자 무시간적 순간의 본질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현재에 살지 못한다. 과거에 저지른 수많은 행동을 후회하고, 미래의 결과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현재 자체에는 어떤 근본적인 문제도 없다. 거기에는 시간이, 과거가,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어제와 내일을 망각하는 심리적 술책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저 과거와 미래가 따로 없고 영원한 지금 위에 지어진 상징적 경계의 산물이며, 시간을 시제로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이어진 연속체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의 기억 또한 현재의 경험에 다름 아니며, 미래의 예견 또한 현재 경험의 연장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궁극의 의식 상태로 여겨지는 이 단계는 어쩐지 이전단계들과 달리 어떤 방법론을 통해 도달하는 것이 곤란한 것처럼 보인다. 무엇을 하더라도 옳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무시간적 현재를 찾기 위해서는 아주 짧은 순간의 시간이라도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미끄러짐의 과정에서 그는 서서히 자신이 하는 모든 짓은 실은 하나의 저항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가 합일의식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을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모든 움직임이 달아나려는 하나의 저항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진실로 이해하게 되면, 모든 저항은 진정된다. 자발적으로 모든 저항을 전적으로 내려놓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이 내려놓음 자체가 합일의식의 열림이라고 말한다. 즉, 그토록 저항하며 인식하고자 한 분리된 나로서의 자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진정한 나인 전자는 결코 태어난 적이 없으며, 죽지도 않을 것이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현재에 저항하지 않음은 현재 외의 다른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작도 끝도, 앞도 뒤도 없다. 이 순간을 둘러싼 경계들이 순간으로 녹아든다. 본증묘수. 본래의 깨달음이 곧 영묘한 수행이다. 영원한 지금이 바로 그 움직임인 것이다. 스즈키 노사는 이렇게 말한다.
“부처님으로부터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전수된 가르침은, 좌선을 시작할 때 아무 준비하지 않아도 이미 깨달음이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좌선을 하든 안 하든, 누구에게나 불성이 있다. 불성이 있기에 수행 시 깨달음이 있는 것이다. 본래 불성이 있다면, 우리가 좌선을 하는 이유는 우리도 부처님처럼 행동하기 위함이다. 우리의 길은 무언가를 얻기 위해 앉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수행이다. 선 수행이란 우리의 진정한 본성의 직접적인 표현이다. 엄밀히 말해, 인간에게는 이 수행 이외에 또 다른 수행은 없다. 이런 삶의 방식 이외에 또 다른 삶의 방식이란 없다.”
수행은 깨달음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이미 깨달은 본성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과연 오묘한 이치이다.
4. 총평 : 경계 허물기의 실천성
- 최근저작에서 비슷한 의식현상에 관심을 보였던 유발 하라리는, <극한의 경험>에서 전쟁 참전용사들이 현장에서 겪은 심리적인 현상에 주목한다. 뼈와 살점이 튀고 인간의 물질성과 그 헛됨이 표현되는 전장에서 참전자들은 극도의 흥분과 몰입, 삶의 진실과 마주하는 일종의 에피파니 현상과 조우했다고 증언한다. 하라리는 이러한 주관적 현상이 단순히 착란이나 병리적 현상, 혹은 일종의 보상심리 일 수도 있지만, 그것을 간증하는 이들의 의식과 거기에 내포된 의미를 계보학적으로 탐구하며 이렇게 말한다.
“전쟁의 시간은 위기의 시간이다. 전쟁의 불길 속에서 물질 구조가 녹아내리고, 사고와 행동의 방식과 방법 등 정신 구조마저 녹아버린다. 전투를 벌이는 동안 인간의 영혼을 둘러싼 겉껍질이 벗겨져 나가며, 인간이 때로는 자기 영혼의 심연과 자기 내면, 일상의 삶에 가려진 오래되고 굳건한 진실과 직접 맞닥뜨린다. 이때 인간은 사물을 더 철저하게, 더 폭넓게, 더 깊게, 더 진실하게 관찰한다.”
결코 객관적으로 인식될 수 없는, 이러한 비언어적 경험을 통해 그는 무엇을 증명하고 싶었을까? 아마 그것은 언어에 기반하여 형성되는 인간 정신의 한계에 대한 규명일 것이다. 기본적으로 우리의 정신이라는 것은 물질에 대한 언어활동의 소산이다. 자연으로 표현되는 물질은 원래 그 자리에 있으며, 아담이 그러하였듯이 인간은 이를 언어로 표현하고 그로부터 획득한 지식들의 총체로서 정신을 소유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인간의 언어는 모든 물질을 표현하지 못한다. 언어활동을 통해 새로운 개념을 창조하고 그 지평을 확대해나갈 뿐이다. 그것이 언어의 한계이며, 시간의 흐름에 의해 소멸한 인간 개별 정신의 한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허무주의에 빠질 필요는 없다. 켄 윌버가 합일의식을 통해 강조하였듯이, 진정한 진리이자 신의 섭리인 합일의식은 이미 주어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주어진 진실을 표현하고 저 자신의 해석의 범주를 확대해나간다. 그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것도, 해야 할 것도 없다. 스즈키 노사가 말한, ‘이런 삶의 방식 이외에 다른 방식은 없다’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인식의 소산이다. 이러한 류의 정신수행을 단순히 비실천적, 현실로부터의 도피로 단정지어서는 곤란하다. 왜냐하면 이 단계에서의 수행에서 발휘되는 움직임들은 깨달음의 표현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실천이라고 부른다. 도마를 비롯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줄기차게 강조했듯이 천국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주어진 신의 섭리가 여전히 존재하고, 그 위에서 정신의 범주를 넓혀갈 수 있는 곳이 곧 천국이다. 그러한 실천이 부재한다면, 우리는 천국의 토대를 인식하지도 못한 채 지옥에 부역하는 악마와 다름없어질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하듯 경계는 전쟁이다. 저자는 전쟁 상황 자체가 인간의 불행을 만들어내는 불가변의 조건이라고 말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 하라리가 말하듯, 전쟁의 시간은 위기의 시간이다. 내면에서 일은 전쟁의 시간에서 우리는 공고히 경계 짓고 만들어낸 물질들이 녹아내리는 것을 인식한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사유 속에서 이해된 물질들이 해체되는 이러한 모순의 상황을 적극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 때 우리는 지각되는 사물을, 물질을 더 깊게 더 진실하게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언어가 경계의 언어인 바, 그렇게 경계를 허물고 또 다른 경계를 설정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해서 확장되어 그어진 경계는 이전과는 명백히 다른 것일 것이다. 이렇게 극단으로 밀고 나가다보면 종래에는 더 이상 경계 지을 것이 없음을, 애당초 경계 짓기라는 행위 자체가 필요가 없음을 깨달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 책의 요지이다.
우리는, 적어도 나는 오랜 시간 동안 관념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자의적으로 나누고 결코 화해할 수 없는 영역으로 남겨두어 왔다. 고백컨대 필자는 모든 것을 물질로 보는 일에 아직도 서투르다. 모든 것이 하나라는 인식으로 나아가는 일은 물론 머리로는 이해해도 실제로 만만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론적 태도를 평시 겸비하고 물질을 바라보는 훈련을 지속한다면, 어찌되었건 적어도 더 포용력 있는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내 자아와 외부 세계 간에 얼마만큼의 경계를 지었는가? 타인을 마주하고 매 순간 살아가는 것에 부담이 느껴질 때면 페르소나 단계에서 점검을 시작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전망이 보이지 않고 조급할 때면 과거-현재-미래의 기계적 도식에서 벗어나 시공간의 연속성에 대한 인식을 시도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이다. 모든 순간이 현재라는 것을 인식한다면 그만큼 우리의 실천이 적용될 수 있는 범주 또한 무한해짐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새로운 관점으로 ‘유적 존재로서의 인식’의 의미와 자신의 수준에 대해 다시 한 번 검토해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