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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백일의 썸머 Jul 26. 2020

젊음을 연장하는 이상향의 도시, 샹그릴라

잃어버린 지평선_제임스 힐턴




'샹그릴라'라고 하면 제일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무엇이냐고 질문하면, 아마도 사람들의 대답은 높은 확률로 호텔이라 답할 것이다. 나 역시 샹그릴라는 유명 여행지에서 자주 마주친 호텔의 이름으로만 익숙하게 알고 있었고, 샹그릴라 호텔에 묵어본 적은 없지만 이 호텔의 외관이 아주 화려했던 것을 고려하면 고급 호텔에 속할 것이라고 추측해본다. 실제로도 샹그릴라는 하룻밤 묵는데 비싼 가격을 지불해야 하는 고급호텔이기도 하다.


사실상 샹그릴라 호텔이 투숙객들에게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고급 호텔이여만 하는 이유는 '샹그릴라'라는 단어가 어디서에서 부터 기인했는지를 알게 된다면, 납득이 가능하다. 우리가 비싼 가격을 지불해서 다른 고급 호텔이 아닌, 샹그릴라에 머물러야만 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호텔이름에 있다.


'샹그릴라'라는 단어의 어원은 제임스 힐턴이 1933년에 출간한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에 등장하는 히말라야 산맥 어디쯤에 위치한 가공으로 만들어진 도시의 이름이다. 이 도시가 특별한 이유는, 지도 어디에도 표시되어 있지 않고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베일에 쌓여있다는 점과, 그래서 사람들의 의도적인 접근이 어렵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곳이니 당연히 이 도시를 목적으로 두고 방문하는 사람들은 없지만, 이 도시에 한번 발을 들여놓게 된다면 오랫동안 젊음을 유지하며 수백년을 살 수 있는 특권을 얻게 된다. 가공의 도시라고 해도, 이보다 달콤한 곳이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

젊음을 늦출 수 있는 곳, 샹그릴라


소설속에 등장하는 '샹그릴라'는 히말라야 산맥에 위치한 이상향의 도시로 그려졌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이 도시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중국의 실제 존재하는 마을의 이름을 2001년에 샹그릴라라고 변경한다. 물론 샹그릴라라고 이름붙인 이 마을은 히말라야 산맥에 인접해 있다. 이상향의 도시를 직접 마주하고 싶은 이들을 위해, 운남성에 위치한 지금의 샹그릴라는 중국의 관광수입원이 되어 주고 있다.


샹그릴라는 미의 핵심에 가로놓인 수수께끼에 둘러싸여서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다. 밤 공기는 싸늘하게 정적을 지키고 있었다. 카라칼의 거봉은 더욱더 가깝게 보였으며, 낮에 보는 것보다 훨씬 더 가깝게 보였다. 콘웨이는 육체적으로 행복을, 정서적으로 만족을, 그리고 정신적으로는 안식을 느꼈다.

 - '잃어버린 지평선' 중에서


주인공 콘웨이는 잘 생기고 두뇌가 명석한 인물로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을 수 있는 능력이 충분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출세보다는 파란만장한 삶을 추구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어느 날, 콘웨이를 비롯한 4명이 탄 비행기가 납치되어 샹그릴라라는 곳에 불시착함으로써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놓이게 되지만, 동양문화에도 낯설지 않은 경험이 있고 낯선 상황에 놓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 도전적인 인물은 샹그릴라에서 삶의 위안을 얻게 된다. 더군다나 소설속에 그려진 시대배경은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되고 있으니, 전쟁속의 삶은 어느 것도 보장해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에 콘웨이는 이 곳에서 행복, 만족 그리고 안식이라는 위로를 받았을지 모를 일이다.


샹그릴라를 벗어나게 된다면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길은 보장받을 수 없고, 더욱이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은 샹그릴라에서 특권으로 누렸던 젊음의 지속성은 샹그릴라 밖 세상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사라진다는 것이다.


젊음을 연장하는 특권을 얻을 수 있는 것 이외에도, 전쟁이라는 현실과 단절된 샹그릴라에서는 아무런 어려움없이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되는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삶과 이상향의 삶 가운데에서 콘웨이와 나머지 일행의 갈등은 심화된다.

세상으로 다시 돌아갈 것인가?
불시착한 곳의 삶에 남을 것인가?


두 가지 삶중에서 어느 한 가지를 선택하기까지 주인공 콘웨이를 비롯해 나머지 일행들은 자신들이 각자 처한 상황을 여러 가지 변수로 두고 고민하지만, 나에게 제일 흥미로웠던 부분은 예상하지 못하게 수백년을 살 수 있는 특권을 가지게 된다면 어떨 것인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게 된 것이다.


늙지 않고 생을 지속할 수 있는 불로장생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 두번 생각하지 않아도 참으로 매력적이다. 오랜시간 회사생활에 매진하며 살았는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이뤄놓은 것 없이 인생의 내리막 길로 내려가는 시점에 당도했다 생각해서 우울한 시간을 보냈던 당시를 생각하면, 당장 젊음을 늦출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으로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막상 내 앞에 무한의 시간이 주어지고 젊음을 유지하며 살 수 있다면, 이 문제에 어떻게 답할 것인가? 불로장생이 매력적인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절대 가질 수 없는 '그 무엇'이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샹그릴라에 살더라도 언젠가는 죽음의 순간을 맞이해야 하는데, 수백년을 살 수 있다고 해도, 언젠가는 마감되어야 할 그 생에 아쉬움이란 건 없을까?


그런 나이가 되도록 살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중략) 그러나 나 자신은 반쯤 죽어가는 상태까지 산다는 것에 무언가 끌리는 점이 있다는 걸 생각하니 소름이 끼칩니다. 기왕에 산다면 짧고 즐거운 인생을 택하겠어요.

- '잃어버린 지평선' 중에서


샹그릴라밖의 삶을 살기를 원했던 콘웨이와 대립한 인물, 맬린슨이 이상향의 존재를 의심하며 한 말이다. 이것은 또한 이상향의 삶을 동경하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질문이라 생각한다. 맬린슨에게 샹그릴라는 원하는 것이라면 쉽게 얻을 수 있고 평온한 삶을 지속할 수 있는 곳이지만, 그것을 다르게 생각하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삶에서 느낄 수 있는 다양한 감정들을 배제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삶은 지루하고, 어떠한 역동성도 없이 권태만 남은 삶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상향의 도시도 인간의 모든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곳은 아니였다. 젊음의 연장, 그리고 평온한 삶과 맞바꿔야 했던 것은, 샹그릴라밖에서는 당연시 되었던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었던 다양한 인간욕구의 충족이였다. 결국 주인공 콘웨이와 그의 일행이였던 맬린슨이 대립한 이유는, 우리가 동경해 마지않았던 불로장생을 누릴 수 있냐 없냐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다양한 감정과 욕구를 삶의 한 가운데에 놓고 살 수 있냐의 문제였던 것이다.

다양한 인간욕구의 실현보다
젊음의 가치가 우위에 설 수 있는가?


결국 콘웨이와 맬린슨은 원래 그들이 속해있던 시끄럽고 불안정한 현실로 돌아가기 위해 샹그릴라에서 탈출을 감행하게 된다. 샹그릴라로 돌아올 수 있는 아주 희박한 가능성을 감안하면서, 그들은 현실로 되돌아가는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샹그릴라에 남겠다고 거의 결심을 굳힌 콘웨이가 현실로 되돌아가는 선택을 했을때는 조금 의아하기도 했지만, 그 역시 맬린슨과 마찬가지로 샹그릴라의 삶을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에 현실로 돌아가는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선택의 기로에서 당신이라면 어떤 길을 택할지 한번 생각해 볼이다. 젊음을 연장할 수 있는 이상향의 삶도 누군가에게는 선택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잃어버린 지평선'에서는 얘기하고 있으니 말이다.


소설의 마지막은 현실로 돌아온 콘웨이의 행방이 묘연해지고, 이런 콘웨이의 행방을 쫓는 그의 친구는 콘웨이가 다시 샹그릴라로 돌아간 것이라 짐작하며 마무리가 된다. 물론 콘웨이가 샹그릴라로 돌아가는 것에 성공했을지 실패했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지만, 이 소설이 내게 던진 질문은 오랫동안 여운으로 남는다.


당신에게 우선시되는 삶의 가치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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