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인사 / 김영하 지음
굳이 장르를 나누자면 SF에 해당할 텐데, 작별인사는 그중에서도 휴머노이드에 관한 이야기다. 장기채집을 목적으로 길러지는 클론의 이야기, 가즈오 이시구로 작가의 "나를 보내지 마"가 떠오르기는 했지만 둘의 어필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나를 보내지 마는 읽는 데만 한 달이 넘게 걸릴 정도로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면 김영하 작가의 작별인사는 앉은자리에서 책을 끝낼 수 있을 정도로 흥미도에서 압도적이었다.
비슷한 장르의 비슷한 주제라도 같은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 바로 책을 읽는 독자들이 누릴 수 있는 큰 기쁨이다. 그래서 특정 장르나 주제에 실망한 경험이 있는 사람도 거기서 성급히 결론을 내리고 나와는 안 맞는가 보다 생각하기보다는 한두 권 정도 더 시도를 해보기를 권한다.
이 소설의 주제랄까 문제의식이랄까는 다음과 같이 간단히 정리할 수 있다.
무엇이 인간을 만드는가. 누가 인간을 규정할 수 있는가. 누구를 인간으로 규정하는가. 삶을 가치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사실 작별인사는 거대한 담론 앞에 어떠한 답도 내고 있지 않다. 소설은 답을 내리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이야기라는 던져진 질문을 통해 현실을 마주하게 하는 장치가 소설이다. 현실 앞에 선 독자가 마침표나 물음표 혹은 느낌표로 끝나는 문장 하나를 마음에 새기게 되면 그것으로 충분히 소설의 역할을 해 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래를 그리는 이야기들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기계의 인간지배다. 부정하고 싶지만, 이야기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을 보면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샌프란시스코 시내에서 돌아다는 무인 자동차를 볼 때마다 기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구체적인 살과 뼈를 입고 우리에게 다가올 날이 멀지 않은 것 같다.
인간은 유한성 앞에서 작아진다. 하지만 그 유한성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삶의 의미를 찾게 되고, 인간은 자신이 찾은 바로 그 의미를 통해 스스로의 존재를 뛰어넘는 무엇이 된다. 더는 작지 않은 존재가 된다. 모순처럼 들리지만 결국에 인간의 위대함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은 유한성의 한계를 마주해야 하는 인간의 숙명에서 오는 것이다.
작별인사가 질문을 던지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인간과 동일한 의식 수준을 가진 휴머노이드가 스스로 기계의 길을 포기하고 인간의 유한함을 선택한다면 그를 휴머노이드라고 할 수 있는가. 유한성을 마주한 그의 삶은 어떤 의미로 바라보아야 하는가. 의식의 업로드를 거부하고 삶에 마침표를 찍은 그와, 자신의 의식을 업로드하여 영원히 사는 인간 중 누가 더 인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가.
몸과 정신, 시간과 한계, 관계와 미래 사이에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작별인사.
책의 마지막, 작가의 말에서 김영하 작가님은 만남은 이별이 따르고 떠난 자는 반드시 돌아온다는 ( 회자정리 거자필반) 말을 하신다.
피할 수 없는 유한성과 한계를 받아들일 때 인간은 비로소 인간이 된다. 영원히 살겠다는 몸부림이야 말로 인간성을 파괴하는 가장 무서운 시도다. 회자정리 거자필반에 이어지는 말로 글을 마친다. 생자필멸 사필귀정. 태어난 자는 죽고 일이란 결국 정한 이치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안녕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일. 그 눈물 나는 일이 우리를 인간으로 의미를 지니고 살게 한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