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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성훈 Apr 21. 2021

vol. 75 - 안녕을 비는 밤.

아침 출근길에 한 남자를 봤습니다. 수레에 재활용품을 잔뜩 실은 남자. 동네 사람들과 안면이 있는지 이해할 수 없는 말로 서로 인사를 건냈습니다. 순대국집에 가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온 동네 재활용품은 다 걷었네.'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은 양을 그는 수거했습니다. 얼마 전 '가난의 문법'이란 책에서 재활용품 수거 노인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기에 그 모습이 심상하게 보이지만은 않았습니다. 


점심 시간. 그 남자를 다시 봤습니다. 여전히 수레는 꽉 차 있었습니다. 아마도 두 번째 수거. 그는 프로처럼 보였습니다. 말이 성치 않아 보였지만 자기 할 일은 해내고 있었기에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밥을 먹고 돌아오는 길. 사무실 앞에 구급차가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건물일까요?" 동료에게 말하고 올라가 보니 한 사람이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 남자였습니다. 수레는 건물 앞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집에 오는 길. 어쩌면 그에게 오늘은 최고로 많은 양의 재활용품을 모은 날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태로 쓰러지게 된 날. 삶은 참 잔혹하고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삶은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을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작은 것들의 신>을 겨우 겨우 읽어내다 편지 한 통을 쓰려는 밤. 그 남자 분의 일화가 떠오른 건 무슨 일일까요. 뒷 일은 알 순 없지만, 그 분의 안녕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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