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웠던 지난여름, 빌런과의 재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청명한 가을이 왔다. 그리고 가을을 맞아 아주 오랜만에 결혼정보회사에서 만남을 가졌다.
이번 만남 상대는 나보다 3살 많은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으레 그랬듯이 가까운 주말에 만날 줄 알았는데 이번 만남은 좀 달랐다. 몇 가지 날짜를 정해놓고 가능한 날을 고르라고 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는데 오랜 결혼정보회사 가입자로서 어떤 상황일지 추측이 되었다.
이분은 신입 회원인데 무난한 프로필을 가지고 있고, 신입 버프까지 받아서 만남이 꽤 성사된 것 같다.
그 만남들 중 나도 한 사람이라 만남이 없는 날을 선택하라고 한 듯하다. 이렇게 추리가 되니 잠시 고민이 되었다. 경쟁자가 많은 사람을 굳이 만나야 하는지 싶어서였다. 하지만 이미 만남이 성사되었고, 인연이라면 어떻게든 이어질 테니 만나보기로 했다.
토요일 저녁,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주말 저녁 식사 시간에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그는 만나자마자 저녁 식사 여부를 물었고, 안 먹었다고 하니 식사를 하러 가자고 했다. 그리고 미리 찾아놓은 식당으로 안내했다. 결혼정보회사의 만남 중 첫 만남에서 바로 식사를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 새로웠다.
이걸 보니 신입 회원이라는 추측에 더 확신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내 첫인상이 마음에 들어서 식사를 하러 가자고 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잠시 했다.
이야기를 나눠보니 그는 재미없지만 성실하며 선한 느낌이 드는 남자였다. 크게 호감 가는 부분은 없는데 크게 거슬리는 부분도 없는 사람이었다. 다시 만나볼 의향이 있는 정도의 호감도였다. 저녁 식사를 하고, 카페에서 더 이야기를 나눴다. 2차까지 만남이 이어진 걸 보면 그도 나에게 어느 정도 호감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만남을 마무리하며 카페를 일어나려는 순간, 그가 가방에서 뭔가를 꺼냈다.
이거 드리려고 가져왔어요.
그가 내민 건 미니북 세트였다.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나의 취향 저격이었다. 책선물이라는 자체도 마음에 들었지만 내가 좋아하는 책이어서 더 좋았다. 호감도가 확 올라가는 순간이었다.
결혼정보회사에서 첫 만남에서 식사를 한 것도 처음인데 선물을 받는 것도 처음이었다. 아니다. 지금껏 그 어떤 소개팅이나 맞선에서도 첫 만남에 뭔가를 받은 적은 없었다. 만남 시작도 새로웠지만 마무리는 더 새로웠다. 이것으로 나에 대한 호감도는 확실히 긍정 도장을 찍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날 밤 그에게 온 문자는 나를 혼란에 빠뜨렸다. 장문의 문자였는데 축약하면 오늘 만나게 돼서 좋았고 여러 가지 사정으로 11월이 되어야 다시 만날 수 있을 거 같다는 내용이었다.
아직 9월도 다 안 지났는데 11월이요?
그와의 만남은 처음부터 새롭더니 끝까지 새로웠다.
이건 애프터를 받은 것도 안 받은 것도 아니다.
이럴 거면 왜 선물을 준건지 이해가 안 갔다. 특이한 사람이다.
이해는 안 가지만 또다시 추리를 해보자면 그는 뒤이은 만남들이 예정되어 있고, 내가 괜찮았으나 다음 만남들을 포기할 정도로 압도적인 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거절할 필요까지는 없어서 여지만 남긴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나도 여지만 남기면 된다. 다음 만남에 대한 언급 없이 간단한 인사말로 답장을 했다.
이번 만남은 아직 열린 결말이다.
11월에 닫히게 될 이 결말은 해피엔딩일까? 새드엔딩일까? 솔직히 바로 애프터를 신청하지 않았던 걸 보면 새드엔딩일 가능성이 높긴 하다.
그런데 어쩌면 11월이 되기 전 결말이 날 수도 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 새로운 이야기를 쓸 수도 있으니까. 이것도 좋다.
과연 나는 어떤 11월을 맞이하게 될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하지만 아주 조금은 기대하며 기다려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