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정복 연대기 (남궁석)는 최초의 표적 항암제인 '글리벡'에서부터 '허셉틴' 그리고 최초의 면역관문억제제인 '여보이'와 이후 키트루다, 옵디보에 이르는 인류의 여정을 다루고 있는 책입니다.
처음 바이오 의약품 업계에 발을 내딛었을 때, 지인께서 저희 회사에서 만드는 약은 무엇인지 질문을 주신 적이 있습니다. 당시 저는 1세대 화학항암제와 2세대 표적항암제의 차이를 설명드렸습니다. 화학항암제는 암세포를 융단폭격하는 방식이기에 암세포 이외에 일반세포들도 무차별적으로 죽일 수 있는 부작용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반면 표적항암제는 암세포를 유도미사일로 공격하는 방식이기에 암세포만을 선택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당시 저는 3세대 면역항암제의 존재를 알지 못했기에 그 기전을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최근 가졌던 친구와의 만남에서 화학항암제, 표적항암제, 면역항암제의 차이를 설명해주었습니다. 친구는 융단폭격 방식과 유도미사일 공격 방식에 대한 비유를 듣고, 3세대 면역항암제는 전쟁에 AI 로봇을 동원한 것이 아니냐는 비유를 했습니다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AI 로봇은 인간이 새롭게 개발해낸 공격무기일테지만 면역항암제는 지금까지 암세포가 사용해왔던 면역세포 회피기술을 무력화시키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써 면역세포는 암세포를 인식하여 공격할 수 있게 됩니다.
표적치료 원리, 출처: 삼성서울병원, 표적치료에 대한 이해
암세포가 사용해왔던 면역세포 회피기술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암세포가 비자기 (Non-Self)가 아닌 자기 (Self)이기 때문에 인간의 면역시스템이 암세포를 공격할 수 없다는 것이 학계의 주류 의견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학계의 정설에 의심을 품고 인간의 면역시스템이 암을 치료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과학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의 끈질긴 연구 끝에 결국 노벨위원회는 제임스 앨리슨 (70) 미국 텍사스대 앤더슨 암센터 교수와 혼조 다스쿠 (76) 일본 교토대 명예교수를 2018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로 선정한다고 밝혔습니다.
제임스 앨리슨 (70) 미국 텍사스대 앤더슨 암센터 교수와 혼조 다스쿠 (76) 일본 교토대 명예교수, 출처: 노벨 위원회
이렇듯 3세대 면역항암제까지에 이르는 인류의 여정은 끈질긴 도전의 연속이었습니다.
유전자 이상으로 타이로신 인산화효소에 변형이 일어나 세포가 증식할 필요가 없는데도 증식하라는 잘못된 신호를 전달하면, 조절 메커니즘이 무너지고 세포가 무차별적으로 증식해 악성 종양이 됩니다. 유전자 이상으로 인한 악성 종양의 생성이라는 암 생물학 패러다임은 1980년대 중반에 정립됩니다.
미국 FDA는 2001년 5월 이마티닙을 성분으로 하는 글리벡 (Gleevec)을 만성 골수성 백혈병 환자의 1차 치료제로 승인했습니다. 그리고 글리벡은 암에 나타나는 특이적인 분자 타깃을 억제하는 화학물을 이용하면, 큰 부작용이 없이 암을 치료할 수 있는 표적항암제가 가능하다는 것을 실제로 보여준, 개념증명 (proof of concept) 사례가 되었습니다. 글리벡은 최초의 단백질 인산화효소 저해제이자 최초의 표적항암제가 됩니다. (출처: 암 정복 연대기)
Gleevec, 출처: Time
항체의약품 개발에 필요한 기술들도 하나씩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B세포처럼 특정한 항원을 인식하는 항체를 분비하며, 동시에 골수종세포처럼 계속 증식하는 하이브리도마가 개발되었습니다. 한 가지 항원만을 인식하는, 화학적으로 조성이 동일한 항체인 단일클론항체 (monoclonal antibody)의 제작 방법도 개발되었습니다. 1985년, 울리히 연구팀은 EGFR (epidermal growth factor receptor, EGFR) 유전자를 탐침으로 이용해 원래의 EGFR과 상동성 (homology)을 지니는 인간 상피세포 성장인자 수용체 2 (human EGFR 2, HER2)를 발견했습니다.
쥐에서 얻은 HER2 항체가 종양이 주입된 쥐의 암 성장을 억제한다는 결과는 얻었으나, 이 결과를 사람에게 적용해 약을 만들려면 쥐에서 얻어진 항체를 인간화해야 했습니다. 폴 카터 (Paul Carter)가 중심이 된 제넨텍 연구진은 전에 발견한 HER2를 인식하는 쥐 유래 단일클론항체의 인간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우선 쥐에서 유래한 HER2 항체 4D5의 상보성 결정부위 영역 (complementarity determining region, CDR)을 인간 항체에 도입하였습니다. 단순히 CDR 영역을 쥐 항체의 것으로 바꾼 항체는 HER2에 매우 강력하게 결합했지만, 유방암세포를 억제하는 능력은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CDR 영역 이외에도 CDR 영역 사이를 연결하는 프레임워크 (framework) 영역의 아미노산 5개를 쥐에서 유래한 항체로 바꾸는 작업을 추가했습니다. 그러자 항체의 결합력은 약 250배 이상 강해졌고, 쥐 항체와 비슷한 수준으로 암세포의 성장이 억제되었습니다. 인간화된 항체의 성분명은 트라스투주맙 (trastuzumab)으로 지어졌습니다. (출처: 암 정복 연대기)
Trastuzumab 기전, 출처: 삼성서울병원, 표적치료에 대한 이해
제넨텍은 암세포에 특이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검증된 항체의약품인 허셉틴 (trastzumab)을 이용하여 항체-약물 결합체 (antibody-drug conjugate)를 만드는 연구를 계속했습니다. 우선 암세포에 단백질을 인식하는 항체는 단백질과 결합해 식세포작용 (endocytosis)으로 세포 안으로 들어갑니다. 세포 안에서 링커가 분해되면 약물이 세포 안으로 방출되고, 세포독성을 유발하여 암세포를 공격합니다. 허셉틴에 강력한 미세소관 (microtubule) 합성 저해제인 메르탄신 (mertansine, DM-1)을 붙이면, 메르탄신이 암세포 안으로 들어가 미세소관 합성을 저해하여 결과적으로 세포분열을 억제하고, 암세포의 증식을 막아 사멸시킵니다.
2013년 FDA는 제넨텍의 항체-약물 결합체인 T-DM1 (캐싸일라 (Kadcyla))을 허셉틴과 택솔로 치료받은 HER2 양성 전이성 유방암 환자들에게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했습니다. (출처: 암 정복 연대기)
Kadcyla 기전, 출처: 약업신문
2세대 항암치료제는 표적 치료제 (targeted therapy)입니다. 글리벡 (Gleevec, 성분명 : imatinib)이나 허셉틴 (Herceptin, 성분명 : trastuzumab)은 저분자 화합물과 항체라는 차이가 있지만, 암세포의 증식을 억제하는 원리는 같습니다. 암세포에서 더 많이 만들어지는 단백질에 작용하여 그 기능을 억제함으로써 암세포의 사멸을 유도합니다.
표적 치료제는 암세포에 많이 있는 단백질에만 작용해 상대적으로 부작용이 덜하고, 암에 선택적으로 작용하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표적 치료제가 큰 효과를 보여주는 암들은 대개 하나의 암 유발 단백질에 의해 지배되고는 하는데, 대부분의 암은 여러 종류의 유전적인 변화를 가집니다. 따라서 한 가지의 암 유발 단백질을 억제하는 표적 치료제만으로 여러 종류의 암에 대응하기 어렵습니다.
화학요법제는 많은 종류의 암에 적용할 수 있지만 정상 세포와 암세포를 가리지 않고 공격하니 부작용이 걱정이고, 표적 치료제는 암을 특이적으로 공격하니 부작용이 적지만 적용할 수 있는 암이 적습니다. 여러 종류의 암 치료에 적용할 수 있으면서도 암세포만 특이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3세대 항암치료제가 필요했습니다. (출처: 암 정복 연대기)
1990년대 초반, 마크 젠킨스 (Marc Jenkins, 1955~)과 제임스 앨리슨 (James P. Allison, 1948~)은 각각 인간과 쥐 모델에서 CD28이 T-cell Receptor (TCR)와 더불어 공동자극인자 (costimulation)로 작용해야만 T세포를 활성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TCR이 T세포의 활성화를 결정하는 주된 자물쇠라면, CD28은 보조 자물쇠이며, 이를 여는 주된 열쇠인 항원-MHC와 보조 열쇠인 B7-1/2와 상호작용해야 비로소 T세포 활성화가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연구가 진행되면서 CTLA-4 (cytotoxic T lymphocyte associate-4)가 CD28과 정반대의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T세포 활성화를 자동차 출발에 비유하자면, TCR에 의해서 MHC/항원 복합체가 인식되는 것은 자동차에 시동을 걸기 위해 열쇠를 돌리는 것이고, CD28에 B7-1/B7-2가 결합하는 것은 엑셀레이터를 밟아서 차를 출발시키는 것입니다. CTLA-4에 의해서 T세포의 활성화가 억제되는 것은 브레이크를 밟아 속도를 줄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CTLA-4는 T세포가 함부로 활성화되는 것을 억제하는 면역관문 (immune checkpoint) 단백질이었습니다. (출처: 암 정복 연대기)
The future of immune checkpoint therapy, 출처: Science
PD-1도 CTLA-4와 마찬가지로 T세포 활성을 조절하는 단백질입니다. PD-1과 CTLA-4는 모두 T세포의 기능을 억제하지만 차이가 있습니다. CTLA-4는 T세포의 CD28이 항원전시세포의 B7 단백질과 결합해 T세포 활성화를 개시한 직후, T세포 활성화 단계에서 활성화를 조절합니다. PD-1은 이미 활성화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의 T세포 활성을 조절합니다. CD28과 CTLA-4는 주차장에서 차를 빼거나 주차할 때 사용하는 엑셀러레이터와 주차 브레이크라면, 이미 활성화된 T세포에서 작동하는 PD-1은 도로에서 달리고 있는 차의 속도를 조절하는 엑셀러레이터와 브레이크입니다. (출처: 암 정복 연대기)
문제는 각종 암세포에도 PD-L1이 있다는 점입니다. 때문에 암세포에 특이적으로 있는 항원을 인지하는 T세포의 암세포 공격도 억제됩니다. 암세포 표면에 있는 PD-L1과 T세포 표면에 있는 PD-1이 서로 상호작용하여 T세포 활성화를 억제하기 때문입니다. 바이러스 등 병원체에 만성적으로 감염되어 있는 상태에서 세포독성 T세포 (CD8 T세포)가 항원전시세포나 암세포로부터 계속 항원 자극을 받아도 T세포가 더 이상 활성화되지 못하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이 과정에도 PD-1과 PD-L1의 상호작용이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출처: 암 정복 연대기)
2011년, 임상3상 결과를 바탕으로 미국 FDA는 BMS의 anti-CTLA-4 항체인 이필리무맙을 흑색종 치료제로 사용할 수 있게 허가했습니다. 최초의 면역관문억제제인 여보이 (Yervoy)가 탄생했습니다.
머크는 2013년 1월 전이성 흑색종을 치료하는 치료 물질로 펨브롤리주맙의 혁신 치료제 지정을 받았습니다. 2014년 9월에는 이필리무맙으로 치료받은 전이성 흑색종 환자를 대상으로 한 PD-1 항체 치료제로 승인받았습니다. 치료제의 이름은 키트루다 (keytruda)였습니다. 같은 질병을 대상으로 승인을 받은 BMS의 PD-1 항체인 니볼루맙이 옵디보 (opdivo)라는 이름으로 판매 승인을 받은 것보다 3개월 빨랐습니다. (출처: 암 정복 연대기)
2018년 10월, 제임스 앨리슨과 혼조 다스쿠는 2018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가 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노벨상 수상은 이들이 발견한 면역관문억제 단백질과 이를 억제하는 항체가 암 치료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물론 면역항암 치료가 암을 치료하는 길에서 넘어야 할 산은 많습니다. 면역관문억제제인 CTLA-4나 PD-1 억제제에 반응하는 환자는, 사용이 허가된 암을 앓고 있는 전체 환자의 30% 내외에 불과합니다. 30%는 적은 숫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아직 70% 정도의 환자는 면역관문억제제의 치료 효과를 보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좀 더 많은 암 환자가 면역항암 치료로 생명을 구하려면 CTLA-4와 PD-1/PD-L1 이외의 새 면역관문 타깃을 찾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많은 연구자가 면역체계를 운용하는 조절 단백질 쌍을 발굴하고 있으며, 새 면역관문 타깃을 억제하는 다양한 항체들도 개발 중입니다.
바이오마커 부분도 풀어야 할 문제들이 많습니다. PD-L1 발현 수준은 면역관문억제제의 효과를 예측할 수 있는 지표처럼 사용되지만, 이 정도의 예측 능력을 지닌 다른 바이오마커는 없습니다. TMB (종양변이부담, tumor mutation burden; 암 조직의 시퀀싱 결과에서 1백만 염기서열마다 관찰되는 돌연변이 수)처럼 전체적인 돌연변이 정도를 알아볼 수 있는 지표도 불충분합니다. 새롭고 정확한 바이오마커 발굴이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미 개발된 여러 항암 치료제와 면역관문억제제를 조합해, 더 높은 치료 효과를 낼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출처: 암 정복 연대기)
제임스 앨리슨과 혼조 다스쿠의 연구는 인간의 면역체계가 암세포를 비자기 (Non-self)로 인식하게 하여 치료할 수 있게 하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암 치료 '패러다임'의 변화 이후 신약 개발에 뛰어든 국내 제약업체들의 이야기, 그리고 이와 같은 '기획 독서'를 통해 내가 얻고자 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계속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