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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leblue Mar 27. 2020

어제의 불행

뉴욕에서 느낀 코로나와의 일상

나에게도 드디어 재난문자가 오기 시작했다. 시카고의 공원 출입을 금지한다는 문자였다. 그리고 2020년 3월 26일 뉴스엔 뉴욕시티 확진자가 23,000명에 도달했다는 내용이 제일 먼저 보인다.

나는 재택근무는 2주 차에 접어들고 있었으며 이미 저번 주 수요일에 뉴욕을 떠나 시카고에 왔다. 물론 시카고의 상황이 좋은 것만은 아니지만 흡사 전쟁을 치르는 모습의 뉴욕에 비하면 여긴 평화롭다고 느껴진다.

매일 nyc coronavirus 또는 illinois coronavirus를 구글에 검색해 확진자수를 보고 있자니 이제는 내일의 숫자가 궁금하지도 않다. 그러면서 트럼프를 포함한 뉴욕 주지사, 뉴욕 시장, 일리노이 주지사 등 평소라면 관심도 가지지 않았을 사람들이 매일 하는 기자회견을 챙겨본다.

나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모두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결과였다. 그렇다고 생각하니 또다시 화가 나기 시작했다. 뉴욕은 거의 방치 수준으로 2월 그리고 3월을 내버려 뒀고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4월이 다가오고 있다.

02.27
미국에서의 코로나 바이러스의 심각성을 처음으로 느낀 건 2월 27일 학교 후배와 연락하면서이다. 로마 학기를 하고 있었던 친구는 갑자기 다음 주에 미국으로 돌아간다고 말했다. 아직 로마와 뉴욕은 확진자가 0명이었던 탓에 처음에는 과한 조치가 아닌가 싶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이 문제에 대해 가장 빠르게 대처한 건 학교였다. (공립학교 제외) 학교는 재빠르게 로마에서 학기를 다니고 있는 학생들을 일주일 안에 미국으로 오게 했고 14일간 자가격리를 하게 시켰다.

03.04
아무도 심각성을 느끼진 않는데 마스크가 동나기 시작했다. 우리 회사 중국인 직원들은 이미 매일 아침 마스크를 끼고 출퇴근을 하기 시작했다. 홈디포는 이미 품절이었고 온라인으로 시키는 건 불가능해서 재고가 있는 지점에 미리 전화를 해서 수량을 확인해야 한다고 했다. 참 기이한 현상이다. 결국 회사 사람이 알려준 중국 사이트에서 마스크를 주문했다. 아마존으로 주문한 마스크는 한 달이 지난 지금도 오지 않고 있다.

03.05
주말엔 시카고에 갔다 왔다. 애플스토어와 스타벅스 리저브는 사람으로 가득했다.

03.06
나는 매일 도시락을 싸기 시작했다. 외식은커녕 배달음식도 신경 쓰였다. 워싱턴은 이미 심각한 상태였다. 홀푸드도 이번 주부턴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다. 출근길 지하철엔 여전히 사람이 많았다. 긴장감이 돌았다. 회사 건물 엘리베이터에 코로나 바이러스 관련 공지문이 처음으로 붙었다. 딱 3가지를 
강조했다.
1. 손을 자주 씻고 기침할 때 소매로 가릴 것 
2. 감기와 같은 증상이 있고 최근에 코로나 위험지역에 여행을 갔다 왔다면 병원에 갈 것. 그렇지 않았다면 우선 집에 있고 의사에게 전화를 할 것.
3. 아프지 않다면 마스크를 쓸 필요가 없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썼다 해도 걱정 말 것. 사람들은 다양한 이유로 마스크를 쓴다.

재택근무에 대한 권고도 마스크 착용에 대한 권고도 없었다.

03.09
처음으로 마스크를 착용하고 출근했다. 지하철 열차 한 칸에 마스크를 쓴 사람은 나를 포함 3명 정도였다. 안 그래도 만원인 지하철에서 눈에 띄게 마스크를 착용한 나에게 모든 사람들이 눈총을 보내오는 것 같았다. 시선과 눈치가 나를 더 힘들게 해서 다음날부턴 착용하지 않았다.

03.10
학교에선 봄방학 이후로 모든 수업들을 온라인으로 대체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많은 학생들이 봄방학 때 집에 돌아가거나 여행을 가기 때문에 그 이후에 있을 혼란에 대비해 큰 결정을 내린 것 같았다. 하지만 학생들에게 봄방학은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3일 후 학교는 비상사태임을 알리고 모두 집으로 돌아가라고 발표했다.
회사는 중국사람들만 걱정이 가득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한국은 이미 초토화가 된 상황이라 부모님의 안부를 가끔씩 묻는 정도였다.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출퇴근을 하다 보니 이번 주는 몸이 계속 아팠다.

03.11
룸메 언니가 아침에 우리 또래의 한 한국 여성이 penn station 근처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았단 이유로 폭행을 당했다는 뉴스를 전해줬다. 한국 지상파 뉴스에도 뉴스가 났는지 한국의 부모님은 크게 걱정했다. 마스크를 써도 폭행당하고 쓰지 않아도 폭행당하는 곳에 살고 있다니 새삼 평소에 걷던 거리도 무서워졌다.
회사는 결국 긴급회의를 했다. 무려 3월 11일까지도 심각성을 못 느끼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불안에 떨어서 일에 집중을 못하는 것보단 재택을 선택하자는 뉘앙스였다.
하지만 서버 문제를 해결해야 했기에 나랑 다른 한 명은 금요일까지 출퇴근을 했다.

03.12
한 시간 일찍 출근을 해봤지만 아직까지 지하철은 만원이다. 뉴욕시에선 출퇴근 시간을 유연하게 조정시켜 사람들이 지하철에 몰리지 않을 것을 권유했다. 뉴욕시 공립학교들은 아직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었다.

03.13
금요일 모든 짐을 들고 집에 왔다. 유니언스퀘어엔 아직 사람이 많았다. 마지막 지하철이라고 생각하고 집에 오니 일주일 동안 느꼈던 긴장감과 피로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03.14
사재기가 시작됐다. 집 앞 코스트코 규모의 큰 슈퍼마켓이 텅텅 비었다. 그래도 자주 올 수 있는 곳이라 생각해서 당장 필요한 것만 샀다.

03.16
재택근무를 시작했다. 이때부턴 많은 회사들이 재택근무를 시작했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룸메 언니는 계속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탔다. 뉴욕시의 확진자 수는 400명을 돌파했다. 그리고 열흘이 지난 3월 26일엔 23,000명을 돌파했다. 뉴욕의 공립학교도 결국 문을 닫았다.

03.18
시카고로 떠났다. 공항 가는 길 우버 기사도 마스크를 꼈다. 나도 마스크를 끼고 비닐장갑을 꼈다. 공항에 도착하니 아무도 없었다. 직원들은 마스크도 끼지 않고 서로 얘기 중이었다.
승무원들은 승객들을 아무 자리에 앉게 했다. 그렇게 두 시간을 날아 시카고에 도착했다.

그 이후로 뉴욕은 유령도시이자 전쟁을 치르는 도시가 되었다. 쿠오모는 모든 시민들에게 집에 있을 것을 선포했고 진단을 시작하자 확진자 수는 천명 단위로 올라갔다.

03.25
회사 사람 한 명이 컨디션이 좋지 않음을 밝혔다. 오전에 회의할 때만 해도 목소리가 괜찮았는데 오후엔 감기에 잔뜩 걸린 목소리였다. 열이 나고 기침을 한다고 했다. 오후 회의를 끝내면서 회사 사람들 목소리가 다들 안 좋다.

03.26
친한 학교 선배 언니의 회사는 모든 프로젝트가 홀드 됐다. 하필 하는 프로젝트들이 다 뉴욕시여서 그런 걸까. 내일부터 하는 일들은 돈을 받을 수 없다고 대표가 전했다고 한다. 뉴스에서 나오는 경제위기, 실업자 얘기가 한층 피부에 더 와 닿았다. 우리 회사는 괜찮은 걸까. 오늘도 클라이언트 미팅을 했는데 아무 말 없는 거 보니 괜찮은 게 아닐까. 생각이 많아진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는 편도로 무려 400만 원이 넘었다. 한국에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이지만 미국의 상황은 무력감을 크게 느낀다. 중국과 한국에서 난리가 나고 있을 때, 워싱턴에서 첫 사망자가 나왔을 때, 위기 상황임을 인지할 수 있는 순간들은 많았다. 이 순간들을 놓친 걸 아쉽다,라고 표현하기엔 분위기가 무겁다.

그리고 오늘 오후, 시카고 밀집 장소 근처 공원도 폐쇄가 됐다.
요즘은 환기를 자주 하게 된다. 하루에도 수십 번 창문을 연다. 바깥공기가 이렇게 시원하게 느껴진 건 오랜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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