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이나 상황은 전혀 다르나 영화 속 인물에 가끔 내 모습이 투영될 때가 있다. "아비정전"의 아비(장국영)가 바로 그런 인물 중 하나였다. 장국영 16주기 추모 기획전으로 재상영된 "아비정전"을 보고 나온 뒤 한참이나 그 여운이 머물러 있어 처치 곤란의 상태였다. 아비의 발 없는 새에 대한 이야기가 머릿속에 깊이 박힌 채 당최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세상에 발 없는 새가 있다더군. 늘 날아다니다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쉰 대. 평생 딱 한번 땅에 내려앉는데 그건 바로 죽을 때지.
보통은 위의 대사를 더 많이 기억하리라 믿는다. 발 없는 새가 이 바람에 몸을 맡겼다 저 바람에 몸을 맡겼다 하듯이 양어머니는 물론이요, 애인으로서 한 여자에게 온전히 정을 주지 못하는 아비. 발 없는 새의 이야기는 아비의 삶 그 자체로 보인다.
영화 내에서 이 이야기가 주는 메시지도 중요하며 강렬하기에 우선순위를 매길 수 없고, 매기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 숨겨둔 어두운 부분을 건드린 대사는, 영화 후반부에 나온 발 없는 새의 진실이었다.
새가 한 마리 있었다. 죽을 때까지 날아다니던. 하지만 그 새는 어느 곳도 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새는 죽어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경험의 영향은 사회화 혹은 후천적으로 극복하고 바뀌어나갈 수 있다고들 한다.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개인의 기저에 깔려버린 이상은 그 경험을 없던 일로 치부하거나 지워버리는 일은 끔찍이도 어렵지 않을까.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아비는 처음부터 사랑을 주지 못하는 마음을 지니게 되어 버렸다. 누구는 버림받아도 남에게 더 따뜻하고 사랑을 많이 주는 이로 자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아비는 그러지 못했다. 메워지지 못할 구멍은 아비의 마음을 잠식해나간다. 누구에게 마음을 다 주지도 못하고, 받지도 못한다. 몸에 둘러진 무심함이라는 가시는 그에게 다가온 사람에게 상처만을 남긴다. 아비도 알고 있지만, 그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부분 이리라. 그 결핍과 슬픔을 장국영은 눈동자 속에 그득하게 담아내어 영화를 보는 사람마저도 그 감정에 가라앉게 만든다.
장국영. 내면의 슬픔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그만한 사람이 또 있을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리진(장만옥)은 아비에게 있어 조금은 특별한 존재였나 보다. 매표소에 뻔질나게 드나들며 그녀에게 눈도장을 찍고, 자신의 시계를 1분 동안 보게 하고는 이 순간을 영원처럼 기억하게 될 거라는 말을 남긴 '1분 사건', 그리고 그녀와 보낸 짧은 순간들을 볼 때만 해도 아비가 정착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결혼이라는 말을 수리진이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아비는 그녀를 밀어낸다. 그리고 정말로 그녀를 완전히 기억 속에서 지워버린 듯했지만, 영화 말미에 유덕화가 분한 전 경찰관이 1분 사건이 일어난 날에 대해 물었을 때 아비는 그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수리진과의 인연이 덜 엇갈렸더라면 아비는 조금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서로에게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친 아비와 수리진
한편으로 영화 제목이 시사하듯 '아비정전'은 틀림없이 아비의 이야기이다. 아비로 시작해 아비로 끝을 맺는다. 그런데 두 번 이상 보기 시작한 영화에 대해서는, 주변 인물 각자의 서사에도 뜯어보고 몰입하는 버릇이 생겨 아비의 주변 인물에도 눈을 돌리게 되었다.
아비 다음으로 눈이 간 인물은 의외로 수리진이 아닌, 선원이 된 경찰관(유덕화)이었다. 기본적으로 떠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 점에 있어 아비와 동류이다. 필리핀에서 짧지만 아비와 그가 대화를 나눈 순간 아비는 여느 때와 달리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 보였다. 그를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 앞에 있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비와 달리 그는 사회의 규율 안에 머무른다. 홀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선원의 꿈을 접어두고 경찰이 되어 착실히 일을 수행한다. 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선원의 길을 택한다.
아비와 또 다른 점이라면 그는 다정하고 또 다정하다. 본 적도 없는 수리진이 매일 아비 집 앞을 서성이고 있자니 아비를 불러내어주고, 빈손으로 온 그녀에게 택시비를 빌려주고, 잠자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남들과 비교하면 불행해진다며 선뜻 자신의 가난함을 인식한 일화를 들려주기까지 한다. 물론 그녀에게 호감도 있었으리라. 누구에게라도 털어놓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전화도 하라고 했으니.
아비의 집 앞에서 수리진과 처음 만나게 된 경찰관인 그.
상심한 그녀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주는 그 따뜻함과 배려심이 묵묵히 배어 나온다.
수리진이 혹여나 전화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에게 알려준 시간대에 그는 항상 전화부스 앞을 지킨다.
그의 다정함은 아비에게도 발현된다. 필리핀의 길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아비를 자신의 호텔방에 데려와 재워주고, 술을 먹고 싶어 하는 아비에게 자신의 와인을 기꺼이 권한다. 어떻게 보면 그에게 있어 아비는 연적(戀敵)인데, 연적에게도 그는 마지막까지 친절함을 베푼다. 기차역에서 돈도 안 내고 여권을 사려다가 쫓기게 된 아비를 외면할 수도 있는데, 투덜거리면서 그걸 같이 기차를 타서까지 도와주는 온정이라니.
유덕화 아저씨는 무뚝뚝해 보이지만 조용히 배려해주고 신경 써주는 인물을 섬세하게 표현해준다. 열혈 넘치는 캐릭터의 대명사가 되었지만, 이렇게 세밀하게 감정을 보여주는 연기도 잘하고, 어울려서 더 많이 해줬으면 싶다.
수리진(장만옥)은 아비와의 만남과 헤어짐 이후 '순간'을 '순간'으로 보내지 못하고 붙잡아버려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낸다. 원한다고 보내진 다면 이별이 그렇게 아픈 일은 아니겠지만. 게다가 아비와는 '1분 사건'도 있는데 그게 어찌 쉽게 잊힐 수 있을까. 그래도 경찰관(유덕화)에게 털어놓은 뒤 조금은 내려놓았는지 더 이상 아비의 집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아비와 만난 그 순간을 잊지 못하게 되어 버린 수리진
아비뿐만 아니라 덩달아 그녀의 이야기를 상냥하게 들어준 경찰관마저 잊었나 싶었다. 경찰관을 그만둘 때까지 그는 수리진의 전화를 받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영화 말미에 전화를 거는 그녀의 모습이 조금 안타까웠다. 처음은 그녀가 전화를 하지 않아서, 후에는 그가 전화를 받을 수 없는 곳으로 떠나버려서 엇갈려버린 둘의 인연
은 후에라도 다시 이어질 수 있을까 잠시 상상을 했다.
이름이 끝끝내 나오지 않은 아비의 친구(장학우)는 길게 등장하지 않지만, 절절한 순정파이다. 아비가 수리진 이후로 만남을 가진 미미(유가령)를 연모하지만, 미미가 이미 아비만을 바라보고 있는 걸 알기에 나서지 않는다. 그러다 아비가 필리핀으로 떠남을 알고 정신줄을 놓은 채 세차게 퍼붓는 비를 그대로 맞고 가는 미미가 걱정되어 그녀의 뒤를 따라가고, 아비를 찾아 필리핀으로 가고 싶다는 그녀의 말에 아비가 준 차를 주저 없이 팔고 그 돈을 미미에게 안긴다. 정 아비를 못 찾겠거든 그때 자신에게 와달라는 소심한 한 마디와 함께. 참으로 풋풋하고 귀여워 영화의 무거움을 약간을 덜어주는 인물이다.
아비의 애인인 미미를 짝사랑하는 아비의 친구
미미(유가령)은 아비를 수리진보다는 더 잘 파악하고 있었지만, 결국 그를 어쩌하진 못했다. 뒤늦게 그를 찾으러 필리핀으로 향했지만, 발 없는 새처럼 아비는 또 훌쩍 떠나 버렸다. 이번에는 영원히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어떻게 해서든 아비에게 맞춰보려는 미미였지만, 그렇다고 잡혀 있을 아비는 아니었다.
"아비 정전"은 순위를 매기지 못할 정도로 깊이 애정 하는 작품이다. 하지만 생각날 때마다 꺼내 보기에는 마음 시린 부분이 많아 상당한 각오가 필요하지만, 불쑥 생각이 나면 다시금 보게 만들게 되었으니, 내게 있어 이미 '아픈 새끼손가락'과 다름 없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