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말 첫 번째 홍콩 여행을 다녀오고 열망이 좀 식을 줄 알았는데, 되려 활활 불타올라 결국 어린이날 대체휴무일 연휴를 이용해 두 번째 홍콩 여행길에 나섰다. 첫 번째는 홍콩 도심 관광 스폿 위주로 다녔다면, 이번에는 되도록이면 관광객이 적은 곳으로 쉬러 온 목적이 강했기에 고민하다가 란타우 섬과 라마 섬만 천천히 구경하기로 했다.
Lucky, 비즈니스 석으로 업그레이드
대한항공 오전 8시 첫 비행기를 이용했는데, 시작부터 좋은 예감이 비즈니스석으로 업그레이드를 받았다. 실적이 엄청난 이용자가 아니어서 혹시나 했는데 비행기가 만석이어서 업그레이드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여러모로 혼자 오기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코노미 플러스가 아니라 서비스도 비즈니스석으로 받아 승무원들이 알뜰 살뜰히 챙겨주고 이착륙 때 인사하는 모습을 보며 이것이 돈의 위력인가 하고 내심 웃었다. 다음에는 아예 비즈니스석으로 하거나, 마일리지로 비즈니스석 승급이 가능한 티켓을 구입할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아침 비행기다 보니 간편한 조식이 나오는데, 한/중/양식 3가지 옵션 중에 중식(해산물 & 밥 & 야채)를 택했다.
과일도 여러 종류를 아기자기하게 한 조각씩 준다.
Mui Wo 마을, 「열혈남아(旺角卡門, As Tears Go by)」의 추억
마를 잡고 여행하는 편은 아니지만, 주성철 기자의 "홍콩에 두 번째 가게 된다면"을 보고 나서 든 생각이 그동안 본 홍콩 영화의 배경으로 나온 곳에 가보자 싶었다. 그렇게 고른 첫 번째 목적지가 Mui Wo(무이 워) 마을이다.
Mui Wo 마을은 영화 「열혈남아(旺角卡門, As Tears Go by)」의 아화(장만옥)의 고향으로, 소화(유덕화)가 잠시나마 혼란한 침사추이에서의 어지러움을 잊고 아화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곳이기도 하다. 그렇게 영화에 비친 평화로움이 마음에 들어 발걸음을 향하게 되었다.
Mui Wo 마을에 가는 방법은 다양하다. Tung Chung(퉁청) 역에서 3M 버스를 타고 갈 수도 있고, 홍콩 섬 Central Ferry Pier에서 페리를 타고 갈 수도 있다. 두 방법 모두 약 1시간 남짓 소요된다.
어차피 호텔은 시내에 있었기에, 갈 때는 버스를 타고, 시내로 갈 때는 페리를 이용하기로 했다. 버스는 급할 것 없다는 속도로 느릿느릿 산을 오르고 내리는데. 온통 푸르고 한적한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정신없이 구경하다 보니 금세 Mui Wo 마을에 다다랐다.
산을 가로지르는데, 터널이 아니라 구불구불 산을 올랐다가 다시 내려가서 란타우 섬의 경치를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다.
아직 성수기가 아닌지 전체적으로 인적이 드물었다. Mui Wo 마을로 가는 길에도 지나다니는 차도 몇 대 없었다. 바람 부는 소리, 파도가 출렁이는 소리, 나뭇잎이 부대끼는 소리 등 자연의 목소리를 제외하면 인공적인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아 평화롭고 또 평화로웠다. 그토록 바라던 고요함이 바로 여기 있었다. 「열혈남아(旺角卡門, As Tears Go by)」의 소화(유덕화)가 왜 란타우 섬에서 시간을 보낼 때 날 선 표정이 사라지고 부드러웠는지 알 것 같았다. 세상만사 시름따위 다 잊고, 이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누구라도 들 법한 평화로움이 가득한 분위기였다.
날씨는 온통 꾸물꾸물 흐려서 회색빛 하늘 가득한 점은 좀 아쉬웠지만, 그 덕분에 시원한 바람은 맘껏 누렸다.
날씨 탓인지, 사람도 거의 없어 거의 전세를 내다시피한 길거리.
바람이 꽤나 불어서 얕은 파도가 철썩이는 고요한 해변가를 보고 있노라니 여기가 천국이구나 싶었다.
그래도 나 같은 사람이 또 있는지, 저 멀찍이서 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도착할 무렵부터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기 시작해, 해변가 근처만 한 바퀴 돌고, 선착장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 "Ke Ho Restaurant 幾好餐廳"으로 몸을 피했다. 역시 해변가를 왔으니 해산물을 먹어야지 하고 메뉴를 펼쳤는데, 거의 2인 이상이나 먹어야 할 듯한 푸짐한 메뉴들만 가득했다. 그렇다고 여러 개 시키고 남기는 건 성미가 아니라 거의 이십여 분을 고민한 끝에 채소와 두부, 해산물로 이뤄진 pot 요리와 밥, 그리고 레몬티를 주문했다.
다른 메뉴는 못 먹어서 아쉽지만, 정말 환상적인 선택이었다. 달콤 짭조름한 소스를 바탕으로 모든 재료가 정말 신선했고, 특히 오통통한 새우의 식감은 쫄깃하기까지 할 정도로 탱글탱글했다. 두부도 속은 부드러우면서도 표면은 쫀쫀하니 씹는 맛이 좋았고, 청경채와 버섯 등 채소들도 어찌나 이리 싱싱하던지. 게다가 양은 무지막지하게 많다. 이렇게 좋은 음식의 가격이 밥, 레몬티까지 합쳐도 단돈 HK106. 두 배를 더 내라고 해도 기꺼이 낼 만한 수준이었다.
사진을 더 맛깔나게 못 찍은 게 한이다.
「열혈남아(旺角卡門, As Tears Go by)」의 아화(장만옥)가 일하던 식당에서도 이런 메뉴가 있었을까 싶었다.
배도 채웠겠다 노곤한 몸을 이끌고 홍콩 섬 센트럴로 가는 페리에 몸을 맡겼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비도 그쳤겠다, 마을의 더 안쪽까지 구경해도 됐었겠다 싶었는데 이런 아쉬움이 있어야 또 여행 갈 구실이 되는 거겠지.
조금씩 날이 개어 가던 하늘.
언젠가 다시 올 날을 기약하며 Mui Wo 마을을 뒤로했다.
페리의 2층에 앉아 바깥 경치를 구경하다가, 흔들거리는 기분이 좋아서 꾸벅꾸벅 졸다가를 반복했다.
어느덧 홍콩 시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배가 내릴 시간이 다 되어갈 때, 문득 내가 배 타는 걸 정말 좋아하는 족속이구나를 깨달았다. 2박 3일 내내 틈만 나면 규모나 거리에 상관없이 페리를 주구장창 타고 다녔다.
Mui Wo 마을에서 홍콩섬의 Central로, Central에서 구룡반도의 Tsim Sha Tsui로 페리를 타고 이동해서, 다음엔 어딜 갈까 하다가, 사실 여행의 주 목적 중 하나인 음반을 구입하러 첫 번째 여행 때 갔던 CD warehouse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이제는 파일로도 노래를 살 수 있는 시대라지만, 아날로그 감성이 날이 더해가는 요즈음이라 음반 CD 수집 취미에 다시 눈을 떴다. 한참 구경하다가 산 음반은 유덕화 아저씨의 CD 4개와 장학우 아저씨의 CD 1개.
1. 유덕화
如果有一天 / 여과유일천 (2003)
心藍 / 심람 (2000)
再說一次我愛你 / 재설일차아애니 (2005)
天開了 / 천개료 (2001)
2. 장학우
吻別 / 문별 (1993)
뿌듯한 마음을 가득 안고, 호텔 Hilton Garden Inn Mongkok에서 체크인을 하고 1시간을 뒹굴뒹굴했다. 푹신한 이불 속에서 늘어지게 있는 게 휴양이지 다른 게 뭐가 있겠는가. 온도 조절하는 법을 못 찾아서 그런지 몰라도, 19도의 냉장고 같은 차가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호텔은 정말 옛 홍콩 영화에 나올 법한 분위기로, Mongkok 역에서 도보로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밤에는 못 다니겠구나 싶었지만, 1990년대의 홍콩 영화 속에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하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마치 시간여행을 하는 느낌이랄까.
1990년대의 영화 속에 나올 법한 분위기의 호텔 주변. 호텔 자체는 매우 깔끔하고 친절했다.
딱히 어디 가자!라는 마음이 없는 여행이었기에, 첫 번째 여행에서 보지 못한 '심포니 오브 라이트'를 보러 가자고 즉흥적으로 마음을 정했다. 가기 전에 배는 채워야 하니까, 구글 지도로 괜찮은 레스토랑이 없나 구경하다가 레스토랑 'Yuet Lai Shun 粵來順'이 눈에 띄었다.
Michelin Bib Gourmand으로 선정되었다는 문구가 흥미로웠고, 광동 요리 전문 레스토랑은 가보지 못했기에 들어갔는데, 이게 웬걸 단체석 중심의 테이블 구성에 머뭇거리고 있자니 직원이 말을 걸었다. 혼자도 먹을 수 있냐는 말에, 합석만 괜찮다면 자리가 있다고 해서 쭈뼛거리며 2인 테이블에 앉게 되었다. 메뉴를 열었는데 두 번째 곤혹스러움. 거의 기본 2인 이상이나 먹을 수 있는 메뉴에, 괜찮은 메뉴는 2인은 고사하고 4~6인 수준의 것이었다. 가격도 꽤 나갔기에, 한참이나 메뉴를 뒤적였지만 결국 오리고기구이에 밥을 주문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직원이 계속 체크하며 먹을만한지, 괜찮은지 물어봐 줘서 조금은 위안이 됐다. 음식 자체는 맛이 괜찮았다.
혼자 우걱거리며 오리 1/2인분을 먹어치웠다. 여기도 양이 많아서 몇 조각 남기고 말았지만...
저녁을 먹고 향한 곳은 kubrick 서점. 주성철 기자의 책에서 영화팬의 보물섬 같은 곳이라고 해서 기대했는데, 생각보다 외서가 많아서 한 바퀴 휙 둘러보고만 나왔다. 영화관이 있는 건물 1층에 있는데, 재밌던 건 건물 외부의 게시판에 붙어있는 글들 중 하나가 우리나라 영화인 "박하사탕"에 대한 것이었다. 중국어는 전혀 모르지만, 설경구가 철길에서 외치는 유명한 장면이 사진으로 들어 있어서 모를 수가 없었다.
과연 무슨 내용이 적혀 있었을까.
홍콩의 길거리, 그 오묘한 매력
서점을 뒤로하고 '심포니 오브 라이트'를 보러 스타의 거리, 혹은 Tsim Sha Tsui 선착장으로 향하는데, 길거리 분위기가 참으로 묘했다. 낯선데 어쩐지 익숙하기도 하고, 쓸쓸한 와중에 어딘가는 푸근한 정겨움이 느껴진다. 최첨단을 달리는 세련된 홍콩 속에 이렇게 시간이 멈춘 듯한 공간이 있다는 게 신기하면서도 마음에 쏙 들었다. 이런 매력에 홍콩을 자꾸만 찾게 되나 보다.
심포니 오브 라이트, 홍콩 야경의 상징
스마트폰과 더불어 미리 구입한 일회용 카메라로 정신없이 길거리를 찍고 난 뒤, 버스를 타고 Tsim Sha Tsui 선착장에 다다랐다. '심포니 오브 라이트'가 시작되는 오후 8시까지는 20여 분 남아있었는데도 벌써부터 인파가 드글드글했다.
아래로는 구룡 반도에서 바라본 홍콩섬의 야경 가득. 한국에서도 이런 야경 정도는 익숙하다지만, 홍콩만이 보여줄 수 있는 야경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안개가 좀 자욱하게 끼어서,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사우론의 탑'을 보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꼭두새벽에 나온 터라, '심포니 오브 라이트'가 끝나자 바닥까지 긁어모은 체력이 다 떨어져 이만 호텔로 발걸음을 돌렸다. 마지막으로 호텔 가는 길의 거리 한 장으로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