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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ayne Lee Jun 05. 2023

#1 경리단길 그래픽

다양한 장면으로 채운 몰입의 공간

‘O리단길’을 걸어 보셨나요? 전국에만 30개 가량이 있으니 인상적이고 새로운 공간을 좋아하는 여러분이라면 최소 한번은 스쳐 지나갔을 겁니다. 한 상권이 리단길로 불린다는 것은 요즘 가장 핫하고 트렌디한 상권 중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길의 시작점인 경리단길은 가보셨나요? 새로 생긴 인상적인 공간을 찾아 이 길을 정말 오랜만에 찾았습니다. 다양한 장면으로 채운 몰입의 공간, 그래픽(GRAPHIC)입니다.

경리단길은 저마다 개성이 넘치는 식당과 카페의 다양하고 독특한 먹거리가 유명한
문화와 젊음의 공간이다.


초입에 적혀 있는 설명문의 일부입니다. 과거의 경리단길은 외국인이 좀 많은 작고 아기자기한 동네였습니다. 이후, 이태원역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던 메인 상권의 확장과 함께 이국적인 이태원 상권 안에서도 가장 독특한 상권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지하철 역과 멀고 언덕이며 길도 좁고 공간도 작아 상권으로 성장하기에는 제약이 컸지만, 이 모든 단점을 콘텐츠 하나로 돌파해냈습니다. 편하게 방문하기는 쉽지 않은 상권이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사람들을 스스로 찾아오게 하는 “이 곳 아니면 없는” 독특한 콘텐츠가 가득한 상권이었죠.


뜨겁게 SNS를 달구던 과거도 잠시, 오늘날의 경리단길은 너무도 빨리 그 열기가 사그라들었습니다. 대로변 양쪽으로 활기를 되찾고 있는 한남동과 이태원역 일대와 비교하면 그 한산함이 더 와닿습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듯 치솟은 임대료, 이국적인 왁자함을 더하던 미군 기지의 이전, 코로나19로 인한 상권의 전반적인 침체 등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결국에는 경리단길을 유일무이하게 만들어줬던 여러 콘텐츠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래픽(GRAPHIC) 내부. 이태원에 새로운 공간이 생겼다고 했을 때 그 곳이 경리단길일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핫한 상권과 공간이 매일같이 등장하는 요즘, 이태원 어딘가에 새로운 공간이 생겼다고 들었을 때 사실 그 ‘어딘가’가 경리단길일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무언가 새로운 시도를 하기에 이곳은 여러모로 바람 하나 파도 하나 없이 잔잔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소개할 공간은 이러한 차분함을 “오히려 좋은” 기회로 살려냈습니다. 결국 경리단길의 성공은 정말 가고 싶게 잘 만들어 둔 콘텐츠가 정말 가고 싶은 곳은 멀리서도 찾아오는 취향 강한 이들과 알맞게 만났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이 곳은 바로 그 본질에 집중하였습니다.


‘트렌드’라는 조류를 놓쳐도 노를 저어 줄 ‘마니아’들이 찾아준다면 꿋꿋이 그리고 충분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 “어른을 위한 술 마시는 만화방”이라는 유쾌한 컨셉은 그래서 가능했을 겁니다. 네, 우리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술과 만화책, 멋진 공간이 다 모인 이 곳 그래픽(GRAPHIC)은 올해 초 경리단길에 문을 연 그래픽 노블(Graphic Novel) 전문 공간입니다.

유려하게 휘어진 덩어리들이 층층이 쌓여 있는 외관이 주변의 주택가 사이에서 시선을 확 사로잡습니다. 책을 콘텐츠로 한 공간인 만큼 거친 질감에 결이 촘촘한 하얀색 외장재를 사용하여 마치 책을 켜켜이 쌓아 놓은 듯한 형태를 구현했는데요.


종이 한 장 한 장처럼 미세한 굴곡을 따라 햇빛이 적당히 들고 나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붉은 벽돌집이 즐비한 곳이다 보니, 자기 주장이 강하지 않은 하얀색과 특별한 기교를 가하지 않은 담담한 외관이 오히려 눈에 확 들어옵니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 중 하나는 바깥과 안을 구분 짓는 창문이 보이지 않았다는 점인데요. 밖에서는 안을 궁금하게 하고, 안에서는 밖이 궁금할 세 없이 몰입하게 하려는 의도가 엿보였습니다.

일부러 꽤나 느긋하고 애매한 시간을 골라 방문했음에도 1시간을 넘게 기다려 겨우 입장하였습니다. 건물의 뒤편에 마련된 입구로 들어가자, 복잡한 바깥 세상 만사는 잠시 잊으라는 듯 어둑어둑한 대기 공간이 방문객을 맞이합니다.


이윽고 스르륵 열린 문 사이로 들어가 처음 마주한 건 다양한 장르의 책과, 그만큼이나 다양한 각자의 방식으로 책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픽(GRAPHIC) 곳곳에는 방문객이 선호하는 다양한 형태로 독서를 할 수 있는 다양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OONN metaworks

방문객들이 본인의 취향에 더 쉽고 정확하게 닿을 수 있도록 구분하고 제안하는 건 이제 모든 서점의 기본적인 미덕이 되었습니다. 그래픽은 거기서 한발짝 더 나아갑니다. “행태가 형태가 되기를 원했다”는 제작자의 표현처럼 이 곳에서는 앉거나 쪼그리거나 기대거나 눕거나 서서 각자가 편한 방식으로 몰입할 수 있도록 공간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몰입을 위한 공간이기에 공간 자체의 조명이 강하지 않습니다. 대신, 천장의 큰 창을 통해 들어온 자연광을 적극 활용하여 적절한 밝기를 확보한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천장으로 들어온 자연광과 은은하게 비치는 실내의 조명이 은근한 비율로 뒤섞여 눈이 편한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2층과 3층의 구석에서 아늑하게 누워 책에 집중하고 있는 분들을 부러움의 눈빛으로 살짝 바라보다 다음 번에는 좀 더 일찍 오겠다는 다짐을 슬쩍 하며 자리로 향했습니다.

[고독한 미식가]와 [심야식당]을 잔뜩 읽었습니다. 멋진 공간을 찾아다니는 이와 멋진 공간을 꾸리는 이의 이야기라니, 참으로 절묘합니다.

이 날은 평소에 관심이 컸던 [고독한 미식가]와 [심야식당] 여러 권을 잔뜩 들고 와 자리에서 읽었습니다. 우연이었지만 하나는 식당을 찾는 미식가의 이야기, 다른 하나는 무엇이든 만들어주는 심야식당의 주인 이야기였네요. 만약 무엇이든 요리해 주는 심야식당에 맛있을 때는 아낌없이 감탄하는 고로상이 방문한다면 그 인상을 얼마나 다채롭게 표현할지 재미있는 상상도 해봤습니다. 아마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항상 그러하였듯이 또 과식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결국 그래픽 노블은 그림으로 쓰인 소설입니다.


한 컷 한 컷 허투루 채우지 않은 한 장은 한 문장 한 문장 허투루 쓰이지 않은 소설 한 장만큼 울림을 가집니다. 이 곳에서 포착한 다양한 몰입의 장면들은 어느 것 하나도 허투루 기획되지 않았습니다.


다양한 방식의 몰입은 결국 다양한 방식으로의 기억으로 이어질 테니까요. 누군가에게는 평소에 읽고 싶었던 만화책을 실컷 읽은 경험으로, 누군가에게는 무심코 넘긴 아트 북에서 영감을 얻을 기회로,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유년 시절로 되돌아간 추억으로 말이죠.


그리고 그 기억이야말로, 이 곳을 인상적인 곳으로 기억하게 하는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그래픽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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