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고 내가 보부아르 같다는 말은 아니다.
이상해 보일 수 있지만 가끔 나는 포털사이트 뉴스란에 '살해' 라는 단어를 검색해본다. 하루에도 수십건씩 벌어지는 살인과 폭력 사건들에 대한 뉴스를 보면 90%, 아니 95% 이상의 피해자가 여성이고, 가해자가 남성이다. 경찰청에서는 매년 범죄통계를 분석한 자료를 공개한다. 2022년 기준으로 전체 범죄자의 78%가 남성이다. 이 중 강력 범죄의 피의자는 95% 가 남성이다. 그렇다면 피해자를 보자. 강력 범죄에 해당하는 살인의 41%, 강도의 42%, 강간의 97% 피해자가 여성이다.
나는 41세 여성이다. 다행히 아직 생명의 위협을 느낄만한 공격을 받은 적은 한번도 없고, 살아남아 있다. 하지만 늦은 밤 좁은 골목길에서 반대편에서 오던 낯선 남자가 기습적으로 내 가슴을 움켜쥐었다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뒤돌아 가는데 나는 너무 놀라 한마디도 못했던 경험, 일하는 업계의 남성 어른이 당연히 나의 동의 없이 손을 덥썩 잡고 자기 자켓 주머니 안으로 넣었던 경험이 있다. 그 외에 자잘한 성희롱을 당한 경험은 일일이 말하기도 어려울 정도다. 놀랍게도 아는 사이에서 일어나던 이런 폭력들은 30대 중반 이후로 사라지긴 했다.
다행히 그래도 나는 여초 사회에서 성장했다. 나에게는 여동생이 한 명 있고, 어린 시절 가깝게 지냈던 사촌들도 모두 여자였다. 여중, 여고, 여대를 다니며 남성들을 만날 기회도, 딱히 그들 대비 차별을 받을 일도 없었고,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일하는 업계 역시 과거에는 여성 비율이 높았는데 그러다보니 나도 당연히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지금 나에게는 남편도 있고, 남성인 친구들도 있는데 이들은 대부분 모든 성별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평등하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전 세계적으로 발생하는 여성에 대한 정치, 경제, 사회문화적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견해를 페미니즘이라고 본다면, 내 생각에 이들은 모두 페미니스트들이다. 그들이 이 단어에 동의할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남편은 요리도 잘하고, 나보다 집안일을 덜 싫어하고, 섬세하고, 자신과 다른 젠더에 대해 편견도 많지 않고, 무엇보다 여성인 나를 '여자니까' 라는 생각을 가지고 대한다고 느낀 적이 없다. 남편도 페미니스트에 가깝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가 이 단어에 동의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매일 발생하는 여성 대상 범죄 뉴스를 보며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속상한 순간들이 종종 있었다. "왜 이렇게 많은 여자들이 매일매일 남자들한테 죽는거야? 극단적으로 말해서 남자에게 살해당하는 여자의 비율과 여자에게 살해당하는 남자의 비율이 비슷해져야 진짜 성평등이 이루어지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 라고 말하다보니 남편의 표정이 점점 썩어간다.
"너는 왜 모든 남자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생각해?
안 그런 남자들이 훨씬 많은데."
"그게 아니라 이렇게 남자들에게 공격받는 여자들이 많으니까,
여자들은 일단 조심해야지 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거잖아.
밤에 길에서 낯선 남자가 따라오는 것 같으면 무섭고,
남자친구에게 이별 통보를 할 때도 보복살인 당할까봐 무섭고."
이런 이야기를 하다보면 언성이 높아지고, 결국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한 채,둘다 속상한 마음으로 대화를 종료하게 된다.
그리고 건물의 여성전용 주차장을 보며 역차별처럼 느껴진다고 말하는 남편에게 "단순히 여자들 편하라고 해 놓은게 아니라, 어두운 주차장에서 여성들이 공격받는 일이 많으니까 최대한 대피할 수 있는 건물 출입구 쪽에 여성들이 차를 세울 수 있게 자리를 확보해 주는 거잖아." 라고 설명해야 할 때 처음엔 내가 알던 남편이 맞나하는 생각이 들었고, 솔직히 실망감과 함께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걸까 하는 약간의 두려움까지 들었다.
하지만 독일의 페미니스트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알리스 슈바르처가 1937년 로마에서 보부아르와 사르트르를 인터뷰한 내용을 보다가 마음의 안정이 찾아왔다.
남녀관계의 문제에 대해서는 보부아르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말하면서도 페미니스트들의 투쟁에 여성 뿐 아니라 여성들처럼 생각하는 남성들' 도 포함하는 게 좋지 않을까? 라고 묻는 자신의 질문에 보부아르가 '남자들은 결코 완전한 여자들처럼 생각하지 못한다'고 대답하자, '이 점에 관해서는 당신이 나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을 바로 인정하는 편이 나을 것' 이라고 말한다.
"이론적으로나 이념적으로 여성 해방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당신조차도 여성들이 자기의 체험이라고 부르는 것을 공유하진 않아요. 당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어요. (중략) 예를 들어 로마 거리에서 산책할 때 항상 위협을 느낀다는 사실을 남성인 당신은 몰라요. 제가 당신에게 그 이야기를 했을 때 당신은 이렇게 말했어요. "당신이 내게 이야기하는 것은 나와 별 상관이 없어요. 나는 여자들을 공격한 적이 한 번도 없으니까요."
보부아르와 결혼한 사르트르가 이 정도라니, 87년 전 인터뷰를 보며 위로받는 현실.
윤석남 (b.1939)의 <우리는 모계가족>과 <자화상>. 윤석남 작가는 한국 여성주의 미술의 대모라고 불린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화가의 인생을 시작한 그의 작품의 영원한 화두는 '어머니'다.
한국여성주의 미술의 계보 <발푸르기스의 밤 : 한국의 마녀들>展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