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 카르텔의 붕괴를 꿈꾸며.
나에게는 많은 여자 선배들이 있었다. 업계 특성이기도 하지만, 우리 회사가 과거 업계 1위에 있을때는 팀장급 이상, 그리고 임원 중에도 여자 선배들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다.
나는 대기업의 한 계열사에서 일하고 있다. 과거 다른 사업에 비해 수익이 나지 않고, 가끔은 실적이 계속 마이너스 였기 때문에 빛 좋은 개살구 취급을 받았던 사업. 하지만 2010년대 초반 갑자기 잘 되기 시작했고, 그룹에서도 이 사업 자체를 눈여겨 보게 되자 그룹 지주회사에서는 관리 업무를 평생 한 타 계열사 남자 임원들을 보내 회사를 밀착 관리하기 시작했다. 현업을 모른 채, 숫자로만 관리를 해 온 그들은 과거 데이터에만 집착했고, 미래 가능성을 예측할 직관은 없었다. 발전은 더딜 수 밖에 없었고, 경쟁사들은 치고 올라오고, 자유롭게 일을 하고 성과를 내던 인력들은 달라진 회사 분위기와 외부에서 빗발치는 스카우트 제의에 하나 둘 회사를 나갔다. 질책을 받기 시작한 관리자들은 오래된 밥그릇을 뺏기게 될까봐 두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업계에서 오래 일한, 아는 척 하는 기존 리더들이 눈에 가시였을 거고, 그 중에서도 여성 리더들은 더 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들은 다른 곳에서 으레 그랬듯이 자연스럽게 형님 카르텔을 만들기 시작했다. 서로 형님 아우 하며, 수시로 담배 타임을 가지고, 주말에는 골프를 치러 다니며 자기들끼리 끌어주고 밀어주기를 하게 된 것이다. 사업에 대한 고민 보다는 어떻게 하면 튼튼한 줄을 붙잡고 위로 올라갈까에 집착하다보니 결과는, 지금 현실이 말해주고 있다. 그들이 여성 리더들을 내보낸, 어쩌면 스스로 이 정치 게임에서 기권을 외치게 한 과정은 너무 세심하고 주도면밀해서 유치하기 짝이 없다. 물론, 그렇지 않은 남성 리더들도 많이 있다. 여전히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능력이 있어 회사를 이끌어 나가고 있는 사람들. 하지만 최상위를 점령하고 있는 형님 카르텔은 같은 남성이어도 그런 자들을 그들의 울타리 안에 넣어주지 않는다.
'야망' 이라는 단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는 'Boys, Be Ambitious.' 라는 말이 어릴 때 부터 싫었다. 당연하지 않나. 나와 같은 소녀들은 저 말이 격려하는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으니까. 저게 뭐야? 싶다가 정말 거지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 회사 생활을 하면서 나는 '야망' 이라는 단어보다는 '열정' 이라는 단어를 더 긍정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는데, 아마도 '야망'은 지금 내가 하는 일에 순수한 마음 보다는 다른 욕심, 꿍꿍이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였던 것 같다. 하지만 회사의 형님 카르텔 남성들은 자신의 '야망'을 드러내는 것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이를 자랑스럽게 말한다. 열정은 없고 야망만 가득해서 문제이긴 하지만. 아무튼, 그래서 나는 언젠가부터 여자 선배들이 야망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일단 나부터도 달라져야 겠지만.
얼마 전에 회의실에서 있었던 일이다. 팀장님 포함 팀 전체가 새로운 업무 분장 때문에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팀 내 특정 파트의 파트장을 맡고 있는데, 몇달 전, 다른 팀에서 J가 우리 팀, 내 파트로 옮겨 왔다. J는 자기 의견이 뚜렷하고, 조금은 내성적이어서 쉽게 친해지기 어려운 타입이지만, 자신이 맡은 일을 (나보다도) 훨씬 전문성 있게 잘해 큰 도움을 받고 있다. 내가 보기에 새로운 업무를 J가 하면 제일 잘 할 것 같고, 그도 선호하는 업무인 것 같아서 이렇게 말했다.
나: J님은 열정적이고, 야망도 있으니까 이 일을 하면 너무 잘 할 것 같아요
J : 아, A님, 제가 야망이 있는 건 아니고요 (여기서 A는 나다.)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좋은 뜻으로 이야기 한 것이고 비꼰 것이 아닌데 오해했구나. 그래서 황급히 말을 보탰다.
"J님, 야망이 있는 게 나쁜게 아니라 좋은 거잖아요.
저는 J님이 너무 이 쪽에 아는 것도 많고, 열심히 하셔서 같이 얘기할 때마다 엄청 자극 받는 걸요."
나는 왜 굳이 J에게 '열정'과 '야망'을 동시에 말했을까.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다. 나도, 여자 후배들도, 여자 선배들도 열정만 가지지 말고 야망도 가졌으면 해서. 남자들에게는 어릴 때부터 야망을 갖기를 독려하면서, 사회 생활하는 어른 여자가 야망이 있다고 하면 욕심 많고 속물 같은 이미지를 덮어 씌우는 것은 누가 언제부터 시작한 걸까.
요즘의 나는 솔직히 좀 지쳤다. 어릴 때는 열정도 야망도 있었지만 살다보니 원래 꿈꿔왔던 목표의 변두리에서만 맴돌고 있고, 존경했던 여자 선배들은 하나 둘 떠나고 없다. 그래서 나 역시 스스로 상처받지 않게 위해 야망을 접었고, 열정은 자기만족을 위해 행복할 만큼만 부리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팀에는, 우리 회사에는 여자 후배들이 남자 후배, 동료들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이 사람들은 나처럼 지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들이 끝까지 싸우고 이겨내서 더욱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야망을 이뤄냈으면 좋겠다. 내가 몸소 그 길을 닦아주긴 어렵겠지만 응원하고 계속해서 말해줄 순 있으니까.
여자들이여, 원한다면 망설이지 말고, 야망을 가져라.
미에 올리세 키에르고르 Mie Olise Kjærgaard (b. 1974) 의 작품. 덴마크 코펜하겐 기반으로 활동하는 미에 올리세 키에르고르는 생동감 넘치는 붓질과 역동적인 구도를 이용해 스포츠를 즐기고, 짐승에 올라타 거침없이 질주하는 등 활동적인 여성들의 모습을 묘사하여 여성의 주체성과 자유를 강조하며, 여성들의 연대 의식을 담는다.
<GAMECHANGER> @파운드리 서울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