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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bby Feb 12. 2024

최선을 다했고, 책임을 다할 수 없어서 도망쳤다(상)

회사와 이별을 했다

퇴사한 지 1년이 지났다. 

퇴사를 하며 고마운 분들께 메시지를 남길 수 있었다

3년 간 최선을 다했다. 결국 그 자리를 떠나야만 했던 달콤하고도 씁쓸했던 퇴사 이야기를 이제서야 남겨보려 한다. 2023년 가장 예상하지 못했지만 가장 중요했던 그 순간을 정리하는 이야기.


나는 무엇을 얻었나


역병이 창궐하던 시기, 몇 달간 공석이었던 B2B 솔루션 기업의 유일한 마케터로 입사했다. 주인 없이 놓여져 있던 일들을 처리하고 회사의 마케팅 방향성을 잡느라 힘들었지만, 출근을 하면 퇴근까지 내가 정한 to-do 리스트를 지우면서 달리고 또 달리느라 즐거웠다.


감사하게도 코드에프라는 회사는 성장에 욕심내게 해 주는 좋은 동료, 할 수 있는 것은 마음껏 하게 해 주는 좋은 상사, 일하는 사람에게 협조적인 회사 분위기를 갖춘 회사였다. B2B 기업이라 대중적이진 않았지만, 내실이 있었고, 내가 잠시 떠나있던 마케팅 업무를 다시 시작하기 최적이었다. 


잘 하는 것만 하고 싶었지만 잘 하지 못하는 것도 해내야 했던 3년. 주어진 모든 일을 해냈고, 새로운 일들을 끊임 없이 시도했다. 초년생 때보다 더 열심히 쉬지 않고 달렸고 많은 것을 얻었다. 



1. 브랜딩 스킬셋을 획득하고 브랜딩 전문가가 되었다


마케팅을 하다보면, 회사의 전략이나 브랜딩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는 판단이 드는 때가 있다. 특히나 B2B사업을 하는 회사에서 내외부의 다양한 이해관계자들과 마주하다 보면, 마케팅 전략과 사업 전략이 따로 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코드에프 역시 그랬다. 


코드에프가 당시 마케팅하던 API 서비스는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 난이도가 있는 편이었다. 사업은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되고 있었고 마케팅 전략은 아예 없었다. 기업 고객 위주였던 코드에프 특성 상, 온라인 광고 위주의 디지털 마케팅도 큰 효과를 보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마케팅 보다는 근원적인 전략 설정과 서비스 브랜딩이 필요했다.


합류 후 첫 3개월 동안 다른 것 고민하지 않고 서비스 비전 선언문 제작에 매달렸다. 코드에프의 API 서비스는 정체성이 모호했고, 개발자를 위한 문서만 제공하고 있었다. 쉽게 한 마디로 서비스를 설명할 수 없었다. 보통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풀어내 설명하는 것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사내의 개발/기획 파트의 많은 분들과 기야기 나눈 후, 겨우 한 문장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불편하고 번거로운 것은 우리가 할게요, 여러분은 더 나은 서비스에 집중하세요" 는 그 당시 서비스 슬로선으로 만들어서 아직도 쓰이고 있는 문장이다. 


코드에프 API 의 서비스 슬로건은 지금도 API 개발가이드에 메인으로 걸려있다


문장 하나하나를 다듬는 과정에서, 비전 선언문 이면에 회사의 방향과 철학이 깔려야 한다는 진리를 브랜딩 작업을 하며 체득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창의적인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비전 선언문이나 슬로건 문장들을 오래도록 붙들고 끙끙거리기도 했다. 과정은 고통스러웠지만, 작업을 반복하면서 더 좋은 브랜딩 결과물을 만날 수 있어서 즐겁기도 했다. 


2022년에 직접 진행한 기업 통합 리브랜딩 작업은 아직도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 


회사의 철학과 서비스 진행 방향과 사업 전략을 고려해, 핵심경험을 중심으로 기술 기반의 서비스 제공이라는 코드에프의 정체성을 다시 확립시킨 매우 세심한 작업이었다. 그동안 쌓은 경험치를 기반으로 가장 정성스럽게 풀어낸 애정어린 결과물이었으나, 회사명이 바뀌면서 외부에서 많이 사용되지는 않았다. 아직도 API 서비스와 개발가이드, 통합 홈페이지에 브랜딩 결과물들이 남겨져 있지만 애초 의도했던 상당 부분 의미가 달라져서 더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도 세상에 제대로 나오지 못한 리브랜딩 결과물이지만 브랜딩 프레임워크가 조직 내에 자리잡고 안정적으로 정착되기 시작했을 때 진행한 작업이기 때문에 더더욱 애정이 간다. 


코드에프에 있는 동안 모든 서비스의 탄생을 함께할 수 있었고, 내 손을 거쳐 자리 잡은 브랜딩 결과물들은 나의 커리어에서 흩어진 점 같아 보였던 마케팅 전략 커리어를 이어주는 하나의 선이 되었다. 


2. 좋은 동료들을 얻었다


2020년 합류할 당시 나는 개발자 몇과 기획자, 디자이너, 퍼블리셔,사업 담당자 등으로 이루어진 10명 남짓의 API 서비스를 만들고 운영하던 '데이터랩' 이라는 팀의 전략과 마케팅을 담당했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내가 생각했을 때 회사가 100여 명으로 성장하기 까지 회사의 성장은 이 경험많은 시니어들로 이루어진 '데이터랩'이 이끌었다. 


'데이터랩'에서 만난 동료들은 업무 스킬과 커뮤니케이션 스킬이 탁월했다. 내부 브랜딩을 하기 이전부터 코드에프 내부에 자리잡고 있던 좋은 문화는 모두 '데이터랩'에서 탄생했다고 해도 무방하다. 업무의 전문성을 유지하면서도 다양한 이해관계자들과 부드러운 소통을 하는 방법, 협업을 원활하게 하며 내가 원하는 일의 결과를 얻어내는 동시에 상대방을 배려하는 방법 등. 나는 이 때 만난 분들에게 이제까지 일했던 곳에서는 쉽게 배울 수 없었던, 함께 일하기 위해 꼭 필요한 다양한 소프트스킬을 배웠다.  


'데이터랩'에서 만난 이들은 납기일을 잘 지키며 Work Ethic이 뛰어난 분들이었다. 


협업이 빈번한 IT 기업은 납기일 준수가 가장 중요한 미덕이다. 약속한 날짜에 일을 끝내는 것은 매우 정상적이고 당연한 일이지만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지키지 못하는 것이 '납기일' 이다. 단순히 수동적으로 납기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주어진 시간 내에서 최상의 결과물을 내는 것은 더더욱. 


미국에서 인턴을 하며 경험한 Work Ethic 이라는 단어.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 보다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최고의 품질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과 비교하지 않으면서 능동적으로 일할 줄 아는 태도가 좋은 분들이라 여전히 본받고 싶고, 현재도 나와 함께하고 있는 분들에게 이러한 태도를 본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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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데이터랩'에서 만난 동료들은 각자의 일이 가진 가치를 존중하고, 상대방의 일을 폄하하거나 얕잡아보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각자의 존재 자체에 대해 고마워 하며, 우리 모두가 한 팀이며 함께 달리는 팀메이트라는 믿음이 있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서로의 일을 믿어주고 그 가치에 대해 알아봐 주며 서로의 힘듦을 이해해주는 좋은 동료들을 만나 나는 자극 받을 수 있었고, 성장할 수 있었다. 


3. 좋은 팀원들을 만나 팀장으로 성장했다


내가 잘 해서 좋은 팀원들을 만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건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10년 여를 B2B 전략과 마케팅 일을 하면서 대표이사나 상무, 팀장 등 상급자와 일할 기회는 많았지만 직접 팀원을 데리고 일을 해본 경험이 많지 않았다. 팀원을 뽑기 시작할 시기, 나는 사람을 관리하는 것보다 플레이어로 더 뛰고 싶어 했던 실전형 인간이었다. 


회사가 순탄하게 성장을 하며, 내게 주어진 일이 많아지고 혼자서 핸들 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사람을 뽑아서 팀을 꾸려야 하는 시기도 빨라졌다. 장기적 계획에 있었던 일은 아니기 때문에 당장 사람을 뽑아서 협업을 해야만 했다. 5명의 팀원을 뽑는 동안, 수많은 이력서를 검토하고 면접을 진행하느라 정작 내 일을 못해서 야근하기도 일쑤였다. 내가 맡고 있던 실무를 떼어 가서 해 줘야 하는 분들을 만나야 했기에 인사팀에 모두 맡길 수 만은 없었다. 

마지막까지 감동을 안겨주었던 팀원분들께 너무 감사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면접을 보는 시간을 통해 나는 또 성장할 수 있었다. 면접을 보면서 직장인이 아닌 직업인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인 지, 성장의 욕구를 가진 사람인 지에 중점을 두며 질문을 하고 한 분 한 분을 공부하듯 파헤치기 시작했다. 면접 한 시간으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 지 알겠으며, 그 사람의 가치를 내가 어떻게 판단 하겠나. 모르는 사람을 뽑아서 같이 일을 하는건, 대단한 우연과 필연이 겹쳐져야 일어나는 기적과 같은 일이다.


그렇게 만나게 된 소중한 팀원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일해주는 좋은 분들이었다. 내가 모르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에 팀원들의 역할 하나하나가 너무 소중했다. 어떤 일이든 우리 팀원들에게 맡기면 120%를 해왔다. 팀원들이 성장하고 열매를 맺는 모습들을 보며 기뻤고, 내가 부족하니 대신 팀원 복이 있나보다 생각하기도 했다. 


장단기 계획을 세우고, 각가의 자리에 배치를 하고 R&R을 나누는 팀장의 일. 누군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고 배울 수 있는 곳도 없어서 혼자서 끙끙 앓기도 했다. 회사의 성장과 함께 가기 위해 "성장전략실" 이라고 이름 붙이며 회사의 성장을 위해 다양한 기획들을 준비하고 있던 2023년. 팀원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더 많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도 전에 나의 회사는 산산조각 났다.


다음편에서는 회사와 이별하던 그 시기, 우당탕탕 일도 많고 마음도 다쳤던 이 시기에 대해 더 자세하게 써보려고 한다. 


스타트업에서 가장 큰 투자는 사람을 뽑는 것이라고 누가 그랬었다. 내가 하려고 했던 일, 하고 있는 일을 회사가 인정하고 사람을 붙여준다는 것 자체가 가장 큰 투자였다는 뜻이다. 나를 믿고 팀원들을 뽑아 팀을 꾸리게 해 줬던 대표에게도 새삼 고마워진다. 사람 관리보다는 플레이어가 맞다고 생각했던 그 때. 다시 플레이어가 되어 이것저것 하려고 보니 나와 함께 일해주었던 팀원들이 더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새로운 회사에서 여전히 불확실한 일들을 확실하게 만들기 위한 일들을 하고 있다. 가늠할 수 없고 예측도 할 수 없는 일들. 결국에는 해내야 하는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2024년의 시작이 생각보다 희망차거나 힘이 넘쳐나진 않지만 2023년 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기대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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