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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향 Jan 15. 2023

(4) 뭘 입어도 되지, 여기서는

그 몸에, 그 삶에 어떤 흉터가 있더라도

다른 체육관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우리 에어로빅 수업 복장 국룰은 레깅스에 스포츠브라에 커버업이다. 복장만 보면 헬스장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물론 운동 경력이 긴 분들 중에는 파랑 연두 주황의 화려한 에어로빅 복을 입고 오는 분도 있다. 호피무늬와 형광핑크 치마도 보았다. 조거바지와 크롭탑에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 휘날리며 오는 분도, 머리 질끈 묶고 힙합바지 입고 오는 분도 있다.   


시작한지 얼마 안 되는 초짜는 튀고 싶지 않았다. 가뜩이나 동작을 못 따라해서 '딱 봐도 초짜구나' 튀는데, 복장까지 튀기엔 간이 작았다. 일주일 동안 다른 분들이 뭘 입고 오나 스캔한 후 운동복 사이트를 들락거렸다. 운동복 브랜드가 이렇게 많다니. 운동복의 세계가 이렇게 넓다니. 레깅스 종류는 왜 이리 많아. 이건 브라캡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사이즈는 몇을 사야 하는 거야. 운동복 사이트에서 리뷰글 보는 게 하루의 큰 일과였다.


기본으로 검정과 카키색 레깅스, 검정색 코랄색 보라색 브라탑, 그리고 검정색 연회색 보라색의 반팔 커버업을 샀다. 처음에는 엉덩이를 가리는 긴 커버업이었다. 그러다가 배꼽이 보일락말락하는 짧은 커버업도 사보았다. 가디건을 벗고 자리에 서서 음악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아무도 내 엉덩이를 못 보도록 뒤쪽 기둥에 등을 대고 서 있곤 했다.


물론 음악이 나오고 5분만 지나면 내 엉덩이가 가려져 있는지 아닌지 알 바 아니다. 나 역시 다른 사람의 엉덩이에 신경 쓸 틈이 없으니까. 엉덩이는 그저 잘 흔들리면 그만이다. 납작하든 빵빵하든 처졌든 올라붙었든 여기서는 그냥 다 신나는 엉덩이일 뿐이다.    


조거바지나 레깅스에 스포츠브라와 얇은 커버업 하나가 유니폼이 된 한 달 반이 지나갔다. 5월 말이 되자 체육관 온도가 달라졌다. 아무리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도 20분쯤 지나면 온 몸에 땀이 흘렀다. 수업이 반쯤 지나면 매번 고민이 됐다. '커버업 벗을까?'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커버업을 벗으면 브라탑만 남는다. 어깨와 배꼽과 등이 다 보인다. 몸매가 드러나는 게 꺼려지는 건 둘째 이유다. 어릴 때 미니스커트도 잘 입고 다녔고 오프숄더도 좋아하던 사람인걸. 한겨울에도 살색스타킹에 미니스커트만 입고 나가던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지.......


브라탑만 입는 게 꺼려진 이유는 등 때문이었다. 어릴 적부터 피부가 곱지 않았다. 사춘기 좁쌀 여드름이 시작이었다. 입사 후에는 턱으로 성인 여드름이 번졌고, 가슴이나 등에도 여드름이 났다. 전용 바디샴푸로 깨끗하게 씻어도 별 소용이 없었다. 여드름이 나다 들어가다를 반복하니 등에 흉터도 많이 남았다.


20대 때 무한도전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런데 유재석이 박명수에게 “등드름 더러워!”라고 놀릴 때면 몸이 공벌레처럼 움츠러들었다. 예능에서 과장하고 희화화하는 게 일이란 걸 알지만, 막상 그 일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는 큰 상처가 된다. 남들도 더럽다고 생각하겠구나 하면 역시 들키지 않는 편이 나았다.  

여드름 브레이크는 역대급으로 재밌었지만, 희화화되는 것 같아 슬펐다.


하지만 가끔 등을 드러내야만 할 때가 있었다. 내가 입사하던 시절만 해도 전사 체육대회가 있었고, 신입사원들은 장기자랑 무대를 준비해야 했다. 남녀 짝을 지어 초급 살사 댄스를 준비했다. 5월의 햇빛 아래 등이 다 드러나는 공연복을 입었는데, 옆에 선 여자 동기의 등을 보고 깜짝 놀랐다. 사람 등이 이렇게 뽀얗고 매끄러울 수가 있구나. 환한 햇살 아래 빛나는 눈밭 같은 고운 등과 달리, 내 등은 끝없이 갈아야 하는 울퉁불퉁 돌밭 같았다. 파트너인 남자 동기가 날 더럽다고 생각하면 어떡하나 싶어 자꾸만 벽 쪽으로 붙어 섰다.

    

웨딩드레스 고를 때도 다른 무엇보다 등이 파이지 않은 디자인을 고르려 애썼다. 등 전체에 화장하는 것보다는 아예 덜 보이는 게 나을 테니까. 하지만 2부 드레스는 가려지는 디자인이 거의 없어 결국 등이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었다.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를 다닐 때 어쩐지 쑥덕이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나만 듣는 소리였겠지만.


“신부 등에 흉터가 너무 많네.”   




웨딩드레스를 입은 28살 이후로는 등을 내보일 일이 없었다. 그러니 아무리 더워도 커버업을 벗는 데는 꽤 용기가 필요했다. 며칠 동안 고민하다가, 6월에 새로 등록한 분을 눈에 들어왔다. 조거 바지에 브라탑만 입고 춤을 추는 모습이 가볍고 싱그러웠다.


이 얇은 커버업이 왜 그렇게 천근만근 무겁게 느껴질까. 벌거벗는 것도 아니고 한 장 벗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2주나 애를 먹니. 한번 벗어보면 되지. 너무 창피하면 다시 입으면 그만이지.    


커버업을 벗고 브라탑만 입은 채 자리에 섰다. ‘뒷사람이 등만 쳐다보면 어떡해?’, ‘등이 저게 뭐냐며 흉보고 있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의 소리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도 머리를 한번 흔들고 춤을 추기 시작하면, 걱정하는 목소리는 볼륨 0으로 조용해졌다. 앞사람의 엉덩이가 안 보이듯이 내 등도 아마 안 보일 테다.  

 

잠시 쉬는 시간이 되자 걱정하는 목소리가 볼륨 2, 3, 다시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머리를 풀어서 등을 가릴 걸 그랬나 하며 숨을 고르는데, 바로 앞자리 분이 말을 걸었다. 스쿼트하고 힘들어서 널부러져 있던 내게 곧 익숙해진다며, 그런 캔버스화 말고 운동화 꼭 사라고 친절하게 얘기해주셨던 분이었다.


"반팔 안 걸치니 이쁘네! 잘 했어."

"아....... 그래요? 너무 더워서요."

"맞아, 이제부턴 더워. 시원해보이고 좋다."

"........사실 제가 등에 흉이 많아서 계속 커버업 입었거든요."

"아이고, 여기서 누가 봐. 여기서는 뭘 입어도 되지."


그쵸, 하며 히히 웃었다. 참말 뭘 입어도 되지. 옆구리살이 삐져나와도, 윗배가 접혀도, 팔뚝살이 덜렁거려도 괜찮지. 몸에 새겨진, 그래서 삶에 새겨진 흉터와 주름이 다 드러나도 아무도 무어라 하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다 춤을 추는 몸이고 신나는 삶일 뿐이다.


둘러보면 그런 것 하나 없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도 다들 씩씩하게 뛰고 땀을 내고 있었다. 나도 머리를 고쳐 묶고 힘차게 뛰기 시작했다. 커버업 무게가 사라지자 한 뼘 더 높이 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등에 난 흉터 같은 건 금세 잊히는 곳, 등에 난 땀이 더 중요한 곳. 그런 곳이 바로 내 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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