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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향 Oct 04. 2022

3. 모르는 사람이 된다

여행하러 가는 기분으로

단골 서점 '카모메 그림책방'에서 4년 전쯤 처음 타로를 본 이래, 일년에 두 답답한 일이 있을 때 타로를 보곤 한다. 헝클어져 있던 생각이 카드의 메시지들을 들으며 조금 단정해진다. 특히 초봄에는 카모메 그림책방에 들러 타로점을 보는게 연례 행사가 되었다. 한 해 기운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서, 품고 있는 고민의 답도 모색해본다.


올해 3월에는 긴긴 겨울에서 간신히 빠져나오고 있던 시점이라, '무기력을 이기기 위해 무얼 해야 하나'가 큰 관심사였다. 선생님은 3장의 카드를 뽑아보라고 했다. 카드를 뽑는 순간은 언제나 두근두근 심장이 뛴다. 하나, 둘, 후우, 셋. 18 The Moon DIANA, 7 STAVES, 0 Beginnings TARA 카드가 차례로 나왔다. 카드를 찬찬히 살펴본 선생님은 3가지 처방을 내려주었다.


스스로 일하고 돈을 벌어라
요청사항을 단호히 물리쳐라
완전히 새로운 일을 시작해봐라.
완전히 새로운 일을 시작해보라


1-2월에는 윈터링을 하느라, 3월에는 둘째 학교 적응시키느라 일을 쉬고 조용히 지냈다. 석달 쉬었으니 이제는 다시 일해서 돈을 벌어야 할 때가 맞네. 오케이. 요청사항을 단호히 물리치라니, 누구의? 요구사항이 가장 많은 건 아무래도 아이들이다. 그간 일을 하다가도 아이들이 말을 걸면 일을 멈추고 도와주는 게 당연했다. 이제는 사안의 경중에 따라 그러지 않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아이들 요구 들어주다가 시간이 쪼개지고 찢기는 게, 무기력의 원인 중 하나이기도 했으니까.


문제는 세번째였다. 완전히 새로운 일. 초심자가 되는 일을 해보라는데 무얼 해야 할지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배우고 싶은 게 이렇게 없었나? 그나마 하고 싶은 걸 떠올려보면, 또 완전히 못하는 일은 아니었다. 뜨개질이나 그림은 어쨌든 '할 줄은 아는 일'이었으니까. 완전히 초심자가 되어야 하는 수영이나 요가가 떠오르기도 했지만, 마음이 통 끌리지 않았다.


몸과 마음이 강해지기 위해 운동을 하겠다는 건 의지였다. 그게 에어로빅이 된 건 우연이었다. 체육관에 간 첫날 바로 알게 되었다. 이게 바로 내가 기다리던 '새로운 일'이었다는 걸.  




시작한지 이제 일주일. 겉옷을 벗고 맨 뒷줄 구석에 고개를 푹 숙이고 섰다. 자꾸만 손으로 양팔을 쓸어내리게 된다. 초봄 냉기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서기도 하지만, 사실은 꽉 달라붙는 운동복이 영 어색해서 그렇다. 엉덩이도 허벅지도 가슴도- 몸을 어떻게 두어야 할지 몰라서 괜히 비비 꼬았다.  


쿵쿵 음악이 울리기 시작하면 그제야 움츠려들었던 몸을 편다. '옷이 너무 들러붙나' 같은 건 사치스러운 고민. 틀리는 건 당연하니, 목표는 안 틀리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덜 틀리는 거다. 눈을 부릅뜨고 쫓아가는 수 밖에 없다. 초심자의 제일 큰 덕목은 다름 아닌 뻔뻔함이다. 틀려도 된다는 마음, 틀리면 틀리는 대로 다음을 따라간다는 마음.


글을 쓰거나 다른 일을 할 때는 이런 마음을 먹기가 어렵다. 잘 하고 싶다. 틀리고 싶지 않고 창피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잘 모르는 건 애써 감추고, 빨리 따라잡아야 한다는 마음에 안간힘을 쓰게 된다. 그 마음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그 덕에 잘 하게 되고 열심히 하게 되고 먹고 살 수 있게 되니까. 하지만 매사에 이렇게 사는 건 좀 힘들다. 마음 근육이 늘 오그라들어 있다.


그런데 신기한 건 에어로빅 시간에는 이 마음 먹기가 된다. 1주일밖에 안 됐는데 동작을 모르는 게 당연하지! 이런 뻔뻔한 마음이 절로 든다. 따라할 수 있는 동작이 나오면 열심히 하고, 순서를 모르겠으면 눈치껏 움직이고, 그래도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모르겠으면 그냥 선생님이나 앞줄 수강생의 발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오늘 안 되면 내일은 되겠지. 내일 안 되면 그 다음주에는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이곳에 있으면 아무도 내가 책 읽고 글 쓰는 사람이란 걸 모른다. 그래서 편안하다. 이곳에서 나는 그냥 에어로빅 처음 배우는 초짜일 뿐이다. 반대로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내가 에어로빅하는 모습을 볼 수가 없다.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얼마나 얼마나 우스울 거야, 팔다리가 따로 노는 문어도 아니고! 남들은 모르는 내가 하나 더 생겼다는 게 제일 좋다.


모르는 곳으로 가서
모르는 사람이 되는 것이 좋다
모르는 도시에 가서
모르는 강 앞에서
모르는 언어를 말하는 사람들과 나란히 앉아
모르는 오리와 더불어 일광욕을 하는 것이 좋다
모르는 새들이 하늘을 날아다니고
여기가 허드슨 강이지요
아는 언어를 잊어버리고
언어도 생각도 단순해지는 것이 좋다
(....)
모르는 세상의 모르는 구름이 많이 들어올 수록
모르는 나의 미지가 넓어지는 것도 좋아
나는 나도 모르게 비를 맞고 좀 나은 사람이 될 수도 있겠지
모르는 새야 모르는 노래를 많이 불러다오
모르는 내일을 모르는 사랑으로 가벼이 받으련다

김승희, <여행에의 초대>



시인은 모르는 사람이 되기 위해 모르는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 나에게 에어로빅은 새로운 여행지이다. 햇빛과 강물은 없지만 그곳에는 음악이 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나는 '할 줄 모르는 나'가 되어 다시 태어난다. 가는 데 5분 밖에 안 걸리지만 아주 멀고 신나는 여행.


오늘도 나는 비행기 타는 기분으로 에어로빅을 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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