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예민하다. 난 내 예민함이 싫고, 그것에 지치고, 그것을 병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예민한 이유를 분석해봤다.
1. 기억력이 좋다.
뜬금없이 자랑하는 거 같지만 난 기억력이 좋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난 보고 들은 것들이 내 의지와는 별개로 그림이나 사진처럼 하나의 장면으로 머리에 저장이 된다. 서울대에서 기억력 하나로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던 적도 있었다. 물론 난 천재도 아니고 그 정도로 기억력이 좋진 않지만 기억력이 좋은 편은 맞다. 시험기간엔 시험 범위에 해당하는 책을 모조리 외웠고, 일상생활에서도 남들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을 나는 비교적 정확히, 시간의 순서대로 기억하곤 한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나이가 들수록 좋았던 기억들은 점점 사라지고 안 좋았던 기억들만 남는다. 의식적으로 좋았던 기억을 떠올려보려고 해도 잘 되지 않아 명상 등을 통해 아예 생각을 안 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안 좋은 기억들이 나도 모르게 날 엄습할 때, 나의 온 신경이 곤두서게 된다.
2. 저주받은 몸이다.
'축복받은 유전자 테스트'라는 게 있다.
비염 / 아토피 / 내성발톱 / 수족냉증 / 다한증 / 다래끼 자주 나는 눈 / 안구건조증 / 알레르기 / 천식 / 심한 생리통 / 평발 / 변비 / 사랑니 / 무좀 / 난시 / 악성 곱슬 / 빈혈 / 탈모 / 불면증 / 척추측만증 / 모공각화증 / 무지 이반증 / 교정 필수인 치열 / 과민성 대장증후군 / 여드름
위 리스트에서 해당하는 게 하나도 없으면 조상신께 감사해야 하고, 몇 개 이하면 축복받은 유전자, 몇 개 이상은 저주받은 유전자, 뭐 이런 테스트이다.
처음 이 테스트를 보고 친한 친구들 15명이 있는 카톡방에 해보라고 공유를 했다. 날 빼고 적으면 한 두 개, 많으면 세 개 등 다섯 개를 넘는 친구가 하나도 없었다. '보통 다섯 개에서 열개 사이 아닌가?' 하면서 공유를 했던 나는 무려 13개. 모든 건 상대적인 거라 병을 앓고 있는 사람에 비하면 아픈 것도 아니지만, 이런 것들을 전혀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비하면 그들보다 나는 숨만 쉬고 있어도 인생에 피곤하고 신경 써야 할 점이 13개나 더 있는 것이다. 심지어 그것들은 항상 내 몸에 붙어 있기 때문에 잊을 수도, 관심을 끊을 수도 없다.
중학생 때부터 변비와 대장증후군을 함께 갖고 있던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이동에 대한 스트레스가 컸고, 고등학교 때부터 허리가 아파서 더 고통받으며 공부했어야 하며, 21살 때부터 불면증으로 1년 365일 중 360일 정도를 항상 수면부족으로 살아야 했다.
일상생활 속 고통은 인생을 지치고 피곤하게 하며 인간을 예민하게 만든다.
3. 불안 장애(강박증)가 있다.
엄밀히 말하면 장애는 아니다.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니까.
어려서부터 마음 한 구석에 항상 불안이라는 게 있었다. 그건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고, 보여주지 않았으니 그저 내가 타고난 기질이라고 할 수밖에. 목욕탕에서 욕탕에서 넘쳐나는 물을 보면서 엄청난 홍수가 나서 세상이 물에 잠기면 어쩌지 하는 걱정을 했고, 방에서 나갈 때 방에 모든 게 제자리에 있는지 몇 번이고 확인하지 않으면 방에서 나가질 못 했다. 어릴 때는 그게 심하지 않았고, 남들도 다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무엇보다 건강했다. 몸도 마음도 건강해서 그런 기질들이 힘을 쓰지 못했다.
회사생활에서 운이 나쁘게도 미친놈들이랑 같은 팀에 있으면서 몸과 마음이 많이 피폐해졌다. 그때 이 불안이라는 놈이 어마어마하게 커졌다. 그중에서 가장 날 괴롭혔던 건 건강염려증이었다. 거기엔 이유가 있는데, 그 이유는 위의 2번과 이어진다. 몸에 아픈 데가 많으니 고통에 예민해지고, 아프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강해질수록 더더욱 건강에 대한 염려증이 커지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만했다. 애들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애들이 태어나자 나의 건강염려증이 세 배로 늘어났다. 나, 그리고 애 둘의 건강까지 염려하게 됐으니 말이다. (아내의 건강은 그렇게 염려되지 않는 편이다...) 항상 딸들이 잘 못 될까 봐 이상한 상상들을 하면서 걱정을 하고 산다. 어디서 아이들 사고를 들으면 우리 아이들은 과연 건강하게 자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에 밤잠을 설친다. 그런 불안들이 극대화되는 날은 하루 종일 그 불안에 사로잡혀 온 신경이 곤두서는 날도 있다. 그런 날 아이들이 위험한 행동을 하면 여지없이 소리를 지르게 된다.
제발. 위험한 행동 좀 하지 마!!
아주 가끔, 지금까지 살면서 다 합쳐 다섯 번도 안되지만, 불안에 쌓여 망가지는 내 모습에 자괴감까지 드는 날에는 더 이상 불안이라는 애랑 싸우고 싶지 않을 만큼 지쳐서 그냥 죽어버리는 게 더 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어제가 그런 날이었다.
나날히 점점 더 예민해지고 있다. 아내는 힘들어하는 나에게 회사를 때려치울 생각을 하지 말고 정신과를 가보라고 한다. 나도 지금보다 더 심해지면 언제든지 정신과에 달려갈 생각이다. 정신과에 가지 않으려는 이유는 정신과 병력에 대한 거부감이 아니라 한 번 약을 먹기 시작하면 계속 먹어야 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점점 나이가 들면서 내 예민함이 아이들에게 전염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차라리 내가 평생 약을 먹으면 먹었지 그것만은 절대 하고 싶지 않다.
어쩌면 빠른 시일 내에 정신과에 다녀온 이야기를 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