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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ssie Nov 11. 2023

악역은 어디에나 있다

중요한 것은...

미성년자일 때에 유학을 떠났다.

나름 모범생 타입의 바른생활 청소년이었지만

뒤돌아 보면 아직 엄마의 품이 필요한 시기였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지금도 이미 늦었다"며

유학을 보내달라고 했다던 딸에게

"대학생이 되면 보내주겠다"고 말하던 어머니,


대학생이 되려면 멀었는데 생각지 않은 곳에

보내기로 결심한 어머니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나중에 알았지만 엄마는 나를 보낸 뒤

6개월 동안 거의 매일 울었다고 하셨다.


동생이 초등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와 보면

엄마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고 있었다고 한다.


멋도 모르던 나는 "진작 올 걸 그랬다"고 할 만큼

나름 잘 지냈고, 엄마가 운 적 있는지조차 몰랐다.


엄마는 그리움과 사랑을 편지와 EMS로 표현했다.


그래서 유학 초기부터 엄마의 편지에 담긴 사랑과

우체국 대형 박스 안에 담긴 한국 간식들을 먹으며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날도 새로 온 엄마의 편지를 열어 보았다.


사랑하는 딸아
..


매 편지마다 풍경의 묘사가 멋들어지게 곁들여지던

엄마의 편지는 마치 문학 작가나 시인의 작품 같았고

전국 경필대회 금상일 것만 같은 아름다운 글씨체는

하나의 예술 작품을 보고 읽는 듯한 기분까지 들었다.


(집을 도둑맞으며 편지의 대부분을 잃게 되었고,

지금 내가 엄마의 편지를 기억하거나 흉내내기엔,

한글 표현력이 청소년기보다도 훨씬 떨어져 있어

현재 언어수준으로 도저히 불가한 점이 아쉽다)


셀 수 없이 받은 편지 중 단 한 마디,

읽은 날로부터 지금까지 잊을 수 없었던 한 문장,

나는 엄마의 그 한 마디를 가슴에 새겼다.



이 세상에는 늘 악역이 있기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 악역을 맡지 않아야 한다는 점'
이란다.

 
 

엄마의 말은 맞았다.


Dogs Who Are Totally Happy They Destroyed Your House 악역과 순역의 좋은 예


어디에든, 악역이 있었다.

어느 날에는 내가 악역을 하게 되기도 하였고,

어제는 아버지가 별안간 나에게 악역을 자처하셨다.

고의일 리 만무하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 반복되고

잦아진다면 참으로 슬픈 일이며 피하고 싶을 것이다.


생각했다.

나에게 악역인 상대에게 똑같이 대응한다면

서로가 서로에게 악역을 도맡았을 뿐 아닌가.


내가 악역을 맡지 않기 위한 결정적인 순간은 바로

상대가 악역을 제대로 소화해 내고 있을 때였다.


평온한 하루의 시작에 예고 없이 쏟아진 폭격처럼

애석하게도 상대의 짜증과 불평에 휩쓸리지 않으려

더욱 상냥 더욱 친절 더욱 나긋나긋하순간에도

나의 심장은 미친 듯이 쿵쾅대며 경고음을 울려댔고

오늘로 이틀째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이 눈물은

악역을 맡지 않았기 때문에 흐르는 것이 아니다.


만일 나도 악역이 되었다면

이 눈물을 흘릴 자격이 없어졌을는지 모른다.


폭격의 잔해를 복구하듯 마음을 지키려던 나는

필사적으로 주기도문과 시편 23편을 반복했고

분명한 도움을 받았지만 완전히 괜찮지는 않았다.


적군의 폭격은 내가 지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쏟아지는 미사일의 공격에서 벗어나려면


1. 죽거나 (죽으면 공격의 유무와 무관하여지므로)

2. 피하거나

3. 방어하거나

4. 적을 없애야 한다.


1과 4는 '생명'에 관련된 것이므로 다룰 수 없고

2는 연을 끊지 않는 이상 완벽히 피하기 불가능하며

3은 내가 어제 시도했던 것들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악역들은 보통 친절한 예고편과 함께

방어기회를 잘 주지 않고 불시에 들이닥치므로

속수무책으 당하거나 혹은 그에 맞서

서로 악역 배틀을 뜨는 일도 일어난다.


악역 배틀을 떠서 이기면 과연 성공일까?

악역에 승자는 없다.


매번 악역을 맡는 사람(도 있겠지만!)보다는

악역(惡役)과 순역(順役)을 번갈아 하는 이가 많다.

그러니 나도 경계를 늦출 수 없는 것이다.


천만 다행히, 나는 아직 악역을 맡지 않았고

앞으로도 맡지 않을 생각이다.


눈물은 나의 몫이다.

                    

그럼에도 어머니의 말씀에 백 번 천 번 동의한다.


이 세상에는 어디에나 악역이 있기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 악역을 맡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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