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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우 Dec 24. 2021

블라디보스토크 下

혼자 떠난 러시아, 그곳에서 생긴 이야기.

https://brunch.co.kr/@seewoosight/3


이전 글에서 이어집니다. 




숙소에서의 나는 하루의 마무리와 시작이 가장 느린 사람이었다.

 

스스로 자초한 일이다. 아무도 간섭하지 않고 한심해하지 않는 혼자만의 여행 패턴이 좋았기 때문이다. 모두가 일어나는 아침에는 샤워실이 붐볐고 타인의 체액이 섞였을지 모르는 물방울들이 거울과 벽면에 사방으로 튀어있었다. 내가 일어나는 12시 즈음은 모두가 숙소를 빠져나가 조용한 분위기가 흐르는 시간이었다. 샤워실은 그 흔한 머리카락 하나 없이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었다. 내가 일어나기 직전에 청소를 마쳤을 직원은 그 시간이면 꼭 공용 식탁에 홀로 앉아 커피를 마셨다. 그의 몸 일부로 내리쬐는 하루 중 가장 강한 햇볕이 따뜻하고 달콤해 보였다. 나흘 동안 같은 방을 쓰는 사람들의 얼굴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그러한 풍경은 하루의 시작에 항상 자리하고 있었다. 아무런 계획도 없던 나는 숙소를 나서면 점심 메뉴를 정하고 그에 따라 발걸음을 정하는 방향성을 가지기로 했다.


수제버거를 좋아하는 내가 숙소와 아주 가까이에 위치한 수제버거집을 가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바 자리에 앉아 뉴욕 양키즈 모자를 뒤집어쓴 남자 직원에게 양고기 패티가 얹어진 버거와 호가든 생맥주 라지 사이즈를 주문했다. 시원한 맥주를 먼저 내어주는 양키즈맨의 오른쪽 팔뚝에는 그와 제법 잘 어울리는 타투가 새겨져 있었다. 뒷모습이 너무 섹시해서 사진을 찍었다. 옅은 노란색의 호가든은 유럽식의 가게 인테리어와 궁합이 잘 맞는 컬러를 보였다. 맥주가 가득 담긴 컵이 바닥에 닿자마자 서두르듯 몇 모금을 들이켰다. 시원하고 깔끔한 맛이었다. 오렌지 껍질 같은 뒷맛이 났다. 비트가 강한 음악을 들으며 햇빛을 쐬고, 기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큰 사이즈의 맥주를 마실 수 있다는 건 드문 일이자 큰 행복에 가까운 일이었다. 맥주를 서빙한 양키즈맨은 그런 나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Enjoy it.”


이런 타이밍에 즐기라는 말은 정말이지 예쁘다. ‘맛있게 드세요’라는 말은 어딘가 강요스럽게 들렸는데, 즐기라는 말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식사 시간을 향유하라는 말로 들려서 기분이 좋았다. 식사 시간은 의외로 맛있는 것을 먹는 데에 그치는 행복이 아니다. 같이 먹는 사람이 중요하고 식사 시간 이전과 이후에 있었던 일이 중요하고 장소 또한 중요하다. 그 모든 걸 내 마음대로 최대한 즐기는 것이 좋은 식사라고 믿어본다.


즐거웠던 식사를 마치고 계산을 하려는 찰나에 지갑을 안 가지고 왔다는 사실을 알아챈 나는 아득해졌다. 할 줄 아는 회화는 감사합니다 와 안녕하세요뿐이었다. 무엇보다도 완벽에 가까운 기분을 이러한 불안으로 망치는 것이 싫었다. 섹시한 양키즈맨이 나를 신뢰하지 못할까 봐 겁이 났다. 남은 맥주를 들이켜고 용기를 내어 영어로 말을 걸었다.


“지갑을 숙소에 두고 왔어. 현금도 없어.”

“뭐라고?”


양키즈맨의 찌푸려진 미간을 하루빨리 펴주고 싶었다.
멋있다고 생각한 사람에게 상처 받기는 싫은 일이었다.


“너한테 카메라를 맡겨두고 숙소에 다녀올게. 그럼 괜찮지?”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마음대로 섹시함을 느끼고 신뢰감을 느끼는 건 얼마나 대단한 일일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4자리 비밀번호를 눌렀다. 지갑은 당연하게도 락커 안에 놓여있었다. 다시 돌아간 버거집에는 사람이 붐비고 있었다. 본격적인 식사 시간이 다가온 듯했다. 양키즈맨의 타투가 바쁘게 움직이는 바람에 잔상으로 보였다. 약간의 팁과 함께 음식값을 지불했다. 양키즈맨이 자신의 옷가지가 놓인 안전한 공간에서 내 카메라를 꺼냈다. 고맙다는 인사에 유어 웰컴이라는 통상의 답변이 들렸다. 별일은 아니지만, 평생 잊지 못할 식사가 될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와 나는 각자의 세상을 살다가 티끌만큼의 시간 동안 부딪혔고 약간의 담보로 인해 서로를 신뢰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여행에 익숙해진 어떤 밤에는 5명의 한국인과 유명한 바에 들어가 도수가 높은 양주를 나눠 마셨다. 이 모임에 가장 늦게 합류한 사람은 나였다. 블라디보스토크 여행 정보를 나누는 카페를 통해 나가 보게 된 모임이었다. 모두가 혼자 이곳에 왔고 나이대가 비슷하며 다양한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그들은 모임이 결성된 이후로 많은 일정을 함께 해왔다고 말했다. 일종의 패키지여행과 같은 여정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는 곳을 비슷한 순서로 여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계획을 묻는 그들에게 계획이 없다고 말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내가 가본 곳은 아주 기초적인 코스이며 블라디보스토크에 왔다면 아직도 많은 곳을 가야 하는 듯했다. 그런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려다가 감사하다고 답하는 편이 빠르겠다 싶어서 그렇게 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화에서 내가 끼어들 틈이 좁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심지어는 이렇게 허비하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유로운 여행을 하는 나에게 가장 많은 것은 시간이었다. 혼자 여행을 왔으니 누군가와 대화를 하느라 시간을 쓸 일도 없었다. 카페에 앉아있을 때나 맥주를 마실 때면 아이폰 메모장을 켜 친구들에게 편지를 썼다. 이곳에서 찍은 사진을 엽서로 만들어 뒷면에는 손글씨로 편지를 옮겨 적을 계획이었다. 눈앞의 사람들은 한국으로 돌아간 이후에 가평에서 만날 계획을 짜고 있었다. 가까스로 술집을 빠져나온 나는 그들과의 연락을 끊고야 말았다.


어떤 점심에는 북한 식당을 갔다. 종업원들은 북한 사람이었다. 처음 만나보는 국적의 사람들이라 떨리면서도 왠지 모르게 범죄를 저지르는 기분이 들어 우스웠다. 평양냉면과 녹두전을 시키며 코카콜라 한 병을 시켰다. 젊은 북한 여자의 손에 쥐어진 미국산 콜라가 그렇게 이질적일 수 없었다. 소극적일 줄 알았던 종업원은 의외로 당당했다. 다른 종업원과 수다를 떠는 모습이 매우 낯설게 느껴졌다. 그런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실례임을 깨닫고 눈을 피했다. 국가와 환경은 개인을 규정지을 단서가 될 수 있을까? 차별은 그 지점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내가 받아온 교육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선택된 정보로 구성된 편협한 시선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 최소한 사람을 판단할 때에는 피부로 느낀 만큼만 하자. 그러려고 노력하자. 그런 다짐을 했다.


어느덧 마지막 날이었다. 

공항으로 올라오는 길을 책임져준 택시 기사는 대부분이 받는 캐리어 추가 요금을 받지 않았다. 

한국으로 돌아와 엽서를 주문하고 편지를 옮겨 적던 나는 양키즈맨의 안부를 가끔 상상했다. 편지를 받고 누군가는 울었고 누군가는 의례적인 고마움을 말했다. 소주에 취해 택시를 타고 홍대로 넘어가는 도중, 가장 가까운 친구 한 명은 자기가 이런 걸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다는 소리를 했다. 주고 싶어서 줬으니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힘주어 답했다. 택시에서 내렸더니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한 조명에 묻혀 용도를 다하지 못하는 가로등이 보였다. 자신을 꾸미는 것에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한 또래들도 보였다. 가장 친한 친구에게 마지막으로 편지를 주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각자의 환경과 변해가는 것들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하기에는 번잡한 상상마당 부근에서 새벽을 보냈다.




https://youtu.be/AwhgrvTG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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