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떠난 러시아, 그곳에서 생긴 첫 번째 이야기.
러시아로 향하는 저가 항공 비행기를 타게 된 것은 고민을 시작한 지 2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내려진 결정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인스타그램을 하다가 유명한 여자 두 명이 블라디보스토크에 다녀온 사진을 봤다. 사진 속 그녀들은 유명한 만큼의 자연스러운 자세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각자의 출근 시간에 곧잘 통화하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블라디보스토크 이야기를 꺼냈다.
“아침에 일어나서 인스타를 보는데 블라디보스토크 후기가 보였어. 알아보니까 항공권도 얼마 안 하고 먹거리도 괜찮아 보이네.”
“그래? 나는 잘 모르겠던데. 막상 가면 볼 게 별로 없대.”
“언젠가 여자친구가 생기면 같이 가보고 싶은 곳이야.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
전화를 끊고 사무실 근처의 산책로를 한 바퀴 돌았다. 지나간 그 애가 잠에서 깬 시간이면 자주 통화를 했던 곳이었다. 그 애 특유의 걸음걸이로 낯선 도시 한 복판을 귀엽게 걷는 모습을 잠시 동안 상상했다. 옆에서 나란히 걷던 나는 조용히 걸음을 멈췄을 거다. 의식하지 못한 채 앞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찍어줬을 거다.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한 컷 더 찍으려는 찰나에 왜 오지 않느냐며 뒤돌아보는 모습을 보고 긴장감이라곤 전혀 없는 웃음을 지었을 거다.
아버지의 저렴한 캐리어를 빌려 인천공항 안에서도 가장 구석으로 가야 하는 저가 항공을 이용했다. 아무리 그래도 면세점에서 조 말론 향수를 구매할 정도의 여유는 있었다. 통상의 가격보다 저렴하게 구매하려면 인터넷 면세점에서 미리 주문을 마쳐뒀어야 했다. 어떤 향인 지도 모르고 검증된 순위에만 의존해 향을 고르는 내가 익숙하게 미웠다. 자꾸만 헛돌아서 덜커덕 소리를 내는 캐리어의 바퀴에 괜한 화풀이를 했다. 수화물을 맡기고 탑승 절차를 마친 나는 늘 그랬듯 비행기의 통로 쪽 좌석에 앉았다. 아무리 익숙해지려고 해도 사람들이 여러 명 모여 지정 좌석에 앉아야 하는 곳에서는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는 사람이 옆에 앉으면 괜찮지만 모르는 사람이 내 옆에 앉으면 하염없이 불안하다. 통로에 앉는다는 것은 그 불안감을 절반으로 줄일 수 있는 선택이다. 극장에 갈 때면 통로 쪽 자리를 매번 양보했던 그 애보다도, 어느샌가 당연하듯 불편한 자리에 여자친구를 앉혔던 내 모습이 이번에는 떠올랐다.
3시간의 비행 끝에 도착한 러시아의 그 도시는 어딘지 모르게 차가운 인상을 선사했다. 내 나이대의 사람들은 자신을 꾸미는 데에 별다른 흥미가 없는듯한 옷을 입었다. 공항에서 일하는 직원의 옷은 빳빳하게 다려져 있었고 재킷 안에 보이는 셔츠의 단추는 목젖을 조일 듯이 채워져 있었다. 문을 열어주던 중년의 남성은 고맙다는 내 인사에 고개를 끄덕일 뿐 통상의 반응을 하지 않았다. 4일 남짓의 시간 동안 헤쳐나가야 할 수많은 환경 중의 하나겠거니 생각했다. 대부분의 여행객들은 공항에서 멀리 떨어진 시내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탔지만 오기를 부려 기차를 탔다. 해외에 갈 때면 지하철이나 기차를 타보려고 한다. 가장 짧은 시간에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을 구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과 홍콩에서 그랬듯 그가 의식하지 못하는 선에서 현지인의 모습을 한 장 찍었다. 하루빨리 한국에 돌아가 그 사진을 옮겨 보정하고 싶었다. 나에게 있어서 여행의 설렘이란 새로운 경험보다도 지금의 감정을 정성스럽게 남기는 일에 있었다.
기차를 탄 덕에 숙소에 이르기 전까지 꽤 긴 거리를 걸어야 했던 나는 10월의 한 복판에서도 초겨울의 날씨를 보여주는 블라디보스토크의 단면을 온몸으로 느끼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들의 언어가 영어가 아닌 점이 좋았다. 조금도 해석할 수 없으니 오히려 해석이 되는 기분이었다. 길을 걷다가 칭얼대는 아이를 쳐다보는 엄마의 눈이 사랑스러웠고, 그녀의 손에 들려진 장바구니 속 야채가 신선해 보였다. 어둑한 밤을 용서하지 못하는 우리나라의 가로등이나 간판들과는 다르게 필요한 만큼만 밝기를 내어주는 그곳의 배려와 본질이 좋았다. 보도블록의 모양이 달라 헛도는 바퀴에 마찰하는 소리가 다르게 들렸다. 덜그덕 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사진 몇 장을 찍다 보니 어느덧 숙소가 보였다. 평생 가볼 일이 없을 것 같던 러시아였고, 낯선 사람을 불편해하는 나의 첫 4인실 게스트하우스였다. 어찌 됐건 좋은 여행을 해보자는 다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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