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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우 Dec 17. 2021

엄마의 SOS

다급한 전화, 그리고 그녀의 새 남편 민준.


몰려오는 피로감에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든 날이었다.


동생이 나를 깨운 시각은 오전 8시 즈음. 다급한 모습으로 나에게 건넨 전화기 속에서는 어딘가 심상치 않은 명옥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 대신 편의점에 나가 일을 해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허리를 삐끗해서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처음 듣는 명옥의 절박한 목소리였다.


샤워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나의 엄마는 늘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착각을 했던 걸까? 날이 상한 면도기가 턱 언저리를 자꾸만 따갑게 했다.


명옥의 전 타임 근무자는 이모부였다. 새벽에 일을 한 탓인지 조금은 부은 얼굴로 나를 맞이한 그는 늘 그랬듯 친가의 안부를 물었다. 그의 왜소한 어깨에 걸쳐진 보라색 CU 유니폼이 낯설어 알 수 없는 뭉클함을 느꼈다.


편의점을 나와 병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병실 안에 꼿꼿하게 누워있는 명옥의 모습은 이모부의 보라색 같은 느낌을 선사했다. 명옥이 집에서 잘 때면 곧잘 입는 바지, 윗옷. 그것들을 갈아입지 못했다는 것은 아침의 상황이 꽤나 심각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괜찮냐는 말을 건네는 나에게 명옥은 아무 말도 없이 나와 눈을 맞췄다.


불교에는 ‘눈부처'라는 말이 있다. 눈동자에 비추어 나타나는 사람의 형상을 이르는 단어다. 나는 실로 오랜만에 명옥의 눈에서 나의 모습을 보았다. 무엇보다도 감격스러운 명옥의 인사였다.


어제부터 허리가 이상했었다는 이야기,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났더니 그 상태로 움직이지를 못했다는 이야기, 명옥과 재혼한 민준이 10분 만에 달려와 걸쇠로 잠겨진 문을 따내고 들어왔다는 이야기, 생전 처음으로 119 구급차를 타봤다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명옥의 머리맡엔 내 몫으로 남겨둔 딸기가 놓여있었다.


먹고 싶은 것이 없냐는 나의 메시지에 단언하듯 없다고 답장했던 명옥이 민준에게는 커피를 사 와달라는 말을 했다. 서운하다기보단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의 이혼 이후로 나에게는 엄마가 가까이에 없다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그것은 엄마에게도 내가 가까이에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 명옥의 곁에 걸쇠 걸린 문을 따내고, 캔커피를 사다 줄 수 있는 동반자가 있다는 사실은 나를 안도하게 했다.


명옥과 나는 잠시 눈을 붙이기로 했다. 동네의 조그마한 병원인 탓에 옆 환자들과의 거리는 지나치게 짧았고, 명옥과 나는 마치 그것이 여태껏 삶을 살아왔던 방식인 듯 벽 쪽을 보고 누워 그들에게서 우리의 존재를 괴리시켰다. 간이침대에 가만히 누워 옥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선잠이 들었다.


명옥은 휴대폰을 진동으로 해두지 않는 습관이 있다. 우리가 선잠을 자는 와중에도 명옥의 휴대폰은 이따금씩 요란한 소리를 울려댔고, 주변의 환자들은 우리가 들으라는 듯이 저마다 한 소리씩을 했다. 명옥을 핀잔하는 소리가 듣기 싫어 몸을 웅크렸다. 허리가 아픈 엄마는 몸을 웅크리지 못했다.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엄청나게 시끄러운 목소리로 수다를 떨어대는 아주머니들의 틈 속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눈부처를 보며 작별 인사를 했다. 좋지 못한 기분으로 병실 밖을 나섰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한동안 생각했다. 근래에 타인에게서 눈부처를 본 일이 있는가? 기억하기도 힘든 그 기억이 미처 떠오를 새도 없이 활짝 열린 문 앞에는 민준이 서있었다. 가벼운 목례를 마친 우리는 각자의 자리로 발걸음을 옮겨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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