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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간비행 Feb 10. 2021

백미러를 확인하는 시간

  

해가 바뀌며 다른 근무처로 발령이 났다. 예상보다 빠른 이동에 배신이라는 말을 들으며 떠나 왔으니 못내 뒤가 켕긴다


헤어짐은 불시에 찾아오고 후회는 늘 늦다. 신규 후배를 맞으며 ‘잘 가르쳐주고 좋은 선배가 되어 보리라’했던 다짐은

바쁘다는 핑계에 자리를 내어주며 집행유예로 남았다.     


2019년 12월 말, 지역에서는 두 번째 규모, 학생 1,000명이 넘는 큰 학교, 1년 중 가장 바빠지는 1월을 코앞에 두고 인사발령 예고가 있었다. 인사담당자가 신규를 배정해서 미안하다며 전화를 했다.   

  

‘그럼 신규는 어디로 가야 하죠? 서로 배우며 잘할 수 있습니다’ 라고 사람 좋은 척 대답을 했지만 그건 전화를 받는 순간

걱정이 앞서던 스스로에게 확인하는 주문이 아니었을까.     


며칠 후 신규 현정이가 사무실에 합류했다. 꼼꼼했던 세입담당자의 후임으로 인계인수를 하며 이미 겁을 먹은 듯했다. 상기된 모습의 선한 인상이지만 요즘 밀레니엄 세대들은 맘에 안 들면 퇴근하며 퇴사를 한다던데, 선배도 후배도 긴장감속에 시작된 동행이다.        


처음은 다 그렇지.

현정이 역시 ‘좌충우돌, 우물에서 숭늉 찾는, 대략 난감’ 인

신규의 덕목을 저버리지 않고 황당함을 한껏 선사했다.

학생에게 엉뚱한 금액을 고지하는 바람에 날아든 목소리 큰 학부모의 항의 전화로 사무실은 겨울왕국이 되었다. 교사급식비를 학생방과후수업비로 징수하며 80명 넘는 선생님들에 한바탕 소란과 젊어진 웃음을 주던 날도 기억난다. 일을 혼자 해결해본답시고 다른 기관 담당자에게 씩씩하게 질문을 했다가 ‘그런 거 물어보는 거 아닙니다’라는 ‘친절한’ 대답을 들으며 미처 알려주지 못한 실장의 얼굴을 붉게 물들여버린 용감한 그녀.


1년을 꽉 채우고 2년 차에 접어들며 얼마간 업무에 익숙해져 가는 그녀이지만, 여전히 아득함에 한숨을 자주 내쉰다.

그 맘 알지.      


아득한 한숨이 빛나는 기대로 바뀌길 바라는 그 마음으로   갈길 모르고 막막하던 나의 그 시절을 건너온 얘기를 전하려한다. 월요일 아침, 티타임 시간에 늘어놓던 잔소리의 텍스트 버전이라고나 할까.     


끝날 것 같지 않던 그 시절, 자신의 시행착오를 거울삼아    다듬어 가며 성장할 수 있도록 기꺼이 곁을 내어준 사람들.

그 막막함이 전부가 아니라며 시야를 넓혀주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 준 세계가 있음을 알려주고 싶다.

백미러를 다시금 확인하는 시간이다.     




나는 교육행정직 공무원이다. 은행에서 야근이 잦았던 친구가 부러운 직업이라며 알려준 채용시험 공고. 그로부터 한 달 후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른 채 무작정 본 시험에 마지막 순위로 합격해서 지금까지 다니게 된 일터.      


나의 첫 발령지는 버스도 드문드문 다니는 외진 학교 행정실이었다.  워드만 겨우 치는 컴맹에 문서작성, 그 많은 법률 적용, 사무실 분위기 파악까지 모두 다 처음이었다. 같은 일을 반복해도 할 때마다 새로웠다.


‘내가 이렇게나 이해력 딸리는 바보였나?’ 자괴감의 탄식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어쩌나. 전임자는 다른 업체 근무경력으로 눈치도 빠릿빠릿한 정보처리 전공 OA 능력자. 그런 전임자와 매일 비교되며 어리숙한 쭈글이 신세를 자각해야 했으니...


‘아휴, 전임자는 그런 거쯤 척척 알아서 하던데, 그 자료 아직도야?’ 동료들의 솔직하고 야속한 재촉에 자꾸만 위축되었다. 채용공고를 알려준 그 친구 원망을 많이도 했다. 물 위에 뜬 기름처럼 낯설고 적응하기 힘든 신규 시절이었다.


두려움을 가득 안고 시작한 직장생활이 이제 21년 차에 접어든다. 그래도 돌아보니 부족한 것을 하나하나 배워가며 채워온 듯싶다. 백미러 역할을 해준 사람들 덕분이다.      


시작의 길에서 아는 것 도 없고 그 막막함이 끝날 것 같지 않더니, 이제 “결핍은 결점이 아니라 가능성이다.”라는 말에 진심으로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막막했던 일터는 나의 배움터, 삶터가 되었다.      


다시 생각해도 귓불까지 붉어지는 나의 신규 시절, 그 길을 알지도 못하고, 방향조차 묻지 못한 채 혼자 속앓이를 했다. 그에 비해 현정이는 모르는 것은 앞자리 선배에 열심히 물어가며 씩씩하게 ‘처음’ 을 마주하고 있다. 그렇게 야무지게 첫 단추를 끼우는 걸 보니 나보다는 훨씬 낫구나 대견한 마음이 든다. 그렇게 용감하게 지혜를 더하며 성장해가길 바라고 응원한다.       




우리는 뒤로 가려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더 잘 나가기 위해서 백미러를 본다. 미처 백미러를 확인하지 못하고 옆 차선으로 끼어들다 소름 돋는 경적음에 멈춤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아찔한 시행착오들을 겪고 나서야 한걸음 한걸음 더디게 숙성되어 간다. 백미러를 깨끗이 닦고 그를 통해 세상을 세심하게 확인하는 법을 배우면서...     


이제 집행유예로 남은 못다 한 잔소리, 현정에 의한, 현정을 위한, 현정의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그 얘기들을 백미러 삼아 빛나는 기대를 담은 넓은 시야로 세상을 살피며 힘차게 나아가리란 소망을 품는다.


후배 현정이를 만나 백미러를 다시 닦으며 한 뼘 더 자란    선배로서의 고백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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