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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픽 Jun 08. 2020

딴청 피우는 영화, <바보들의 행진>

1970년대 청춘영화를 중심으로

1970년대 대표 청년영화 중 하나인 이 영화는 두 명의 절친한 친구인 대학생 병태와 영철이 미팅에서 각각 영자와 순자를 만나면서 펼쳐지는 그들의 일상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뚜렷한 인과관계 없이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에 이러한 한 문장으로 영화를 요약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4PvzT5WnNrA&t=1819s


 무엇보다 영화는 딴청 피우기 선수이다. 예를 들어 이런 장면이 있다. 병태는 영자와 데이트를 하던 중 나중에 결혼하자며 능청스럽게 말하는데, 이에 영자는 ‘철학과 나와서 나중에 뭐 먹고 사느냐’며 발랄한 목소리로 거절을 표한다. 이에 병태는 상처받은 기색은커녕 뽀뽀하려는 수작을 부리고 영자는 그를 피하며 난데없이 여드름을 짜주겠다고 한다. 겉으로는 무해하고 해맑은 연인의 대화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자신의 무력함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어두운 청춘의 그림자가 덮여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거기다 그 속의 인물들은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다.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면서도 시종일관 밝게 들떠있는 영자, 멋지게 슛을 날리지만 헛발을 차는 병태, 자신이 무능함을 신나서 과시하듯 말하는 영철까지. 장발단속, 통금, 휴강 등 그들의 일상 속에 녹아있는 당시 유신 체제의 사회상을 생각해보면 이런 우스꽝스러운 인물들을 마냥 밝고 엉뚱하게만 볼 수는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시종일관 웃음이 흐르는 연극의 장면이 이어지다, 혼자 분장을 지우며 눈시울이 잠깐 붉어지는 영자의 모습처럼, 우울을 가리기 위한 메이크업으로써 웃음이 사용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웃음은 ‘우린 쪼다예요, 바보 병신이에요.’라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지식인의 무력함에서 오는 자조적인 웃음이다.    

  

 왜 이런 엉뚱하게 딴청 피우는 ‘웃기는’ 영화가 만들어졌는지는 극 중 응원 연습 장면을 통해 유추해볼 수 있다. 강의 중 교수는 응원 연습을 가겠다면 나가도 좋다는 말을 한다. 나가자는 영철에 병태는 자신은 남아있겠다고 하는데 ‘나는 나가겠어.’하고 말하는 영철의 모습이 상당히 비장하다. 이어지는 연고전 장면은 갑작스럽고 혼자 남은 병태가 칠판의 ‘이상국가’라는 글씨를 지우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 장면에서 스포츠로 표현된 ‘운동’이 사실은 학생 ‘운동’을 뜻하는 일종의 언어유희이자 검열을 피하기 위한 눈속임으로 보인다. 다행히 지금은 복원본을 볼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영화의 상당 부분이 잘려나갔다고 한다. 이러한 검열을 피하기 위해 영화는 단지 ‘바보들의 행진’인 척 눈속임을 하고 있는 것 아니었을까. 따라서 1970년대 영화는 유신체제를 떼어놓고 맥락을 파악하기 힘들다. 또한 이 영화의 미학은 오히려 그 우스꽝스러운 자기 검열에서 나오는 것이라 생각한다. 병태와 영철이 장발 단속을 피해 도망치는 장면에서 쓰인 노래 ‘왜 불러’가 절묘하게 그 장면과 맞아떨어진 것처럼 말이다. 장발 경찰이 장발 단속을 하고 있는 황당한 규제에 절묘한 가사와 리듬을 통해 웃음을 만들어낸 지점이 인상 깊다.


 한편 중반부를 지나며 순자가 영철을 버리고 도망간 장면 이후로 영화는 웃음기를 조금씩 거두기 시작한다. 우리 사회에 믿음이 필요하다며 500원을 받아간 신문배달부를 기다리는 영철의 모습은 나름대로 영화의 주제의식을 발현하고자 함으로 보인다. 또한 결말에서 영철의 자살과 병태와 영자의 이별 장면은 느슨한 플롯을 나름대로 봉합하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행동의 이유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드러나 있지 않고 다소 갑작스러운 지점이 있다. 영철의 이루지 못한 이상을 상징하는 고래와 그를 잘 나타내는 노래 ‘고래사냥’이 비극적인 분위기와 주제를 다소 형성하고는 있지만 역시 한계가 있다. 1970년대 청년영화가 가장 비판받은 지점이 바로 이 주제의식의 부족이고, 이는 하길종 감독 스스로도 시인한 부분이다. 때문에 청년영화가 <바보들의 행진>을 기점으로 서서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필름이 잘려나갔기도 했지만 그 전에 이미 감독이 자기검열 속에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에 영화는 끝내 완성된 형태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술은 사회적 맥락 속에서 관객과 상호작용하는 것이 아닌가. 따라서 당시 관객은 필름 속 비어있는 부분을 스스로 유추해가며 저항의 씨앗을 싹틔웠을 것이라 생각해본다. 사소한 이유로도 금지곡을 만들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어느 때보다 영화를 만들기란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을 역으로 이용해 새로운 미학을 창조해낸 당시 감독들에게 새삼 경외심을 느낀다. 관객의 몫으로 남은 잘려나간 필름 사이사이를 메우며 <바보들의 행진>과 그 시대를 기억하겠다.     



■ 참고자료 

홍혜정, 1970년대 청년영화의 감각성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문학석사학위논문, 2017년 2월, p.67-113

이효인, <바보들의 행진>의 탈구심적 미학, 현대영화연구, 2017년 02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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