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영화가 만들어지기까지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 영화를 전공하면서 유일하게 완벽히 이해한 문장이다. 하지만 그렇게 탄생한 영화가 상영되지 않은 채, 외장하드 안에서 잠들어 있다면 그건 감독의 자기만족일 뿐 아닐까. 영화는 극장에서 상영되어 관객들을 그 판타지 속으로 이끌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예술은 관객과 상호교류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우디 앨런의 <카이로의 붉은 장미>에서는 바로 그 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 영화는 스크린에서 탈출한 배역 때문에 벌어지는 사건을 담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한 관객의 영화에 대한 사랑 이야기를 그려냈다.
현대의 대부분 유명한 영화감독이 그렇듯, 우디 앨런은 어린 시절부터 영화광이었다고 한다. 그는 종종 토요일 오전 극장 줄의 맨 앞에 서서 극장이 문을 열기 한 시간 전부터 가 있었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하지만 궁전 같은 극장 안에서 서너 시간을 보내고 밖으로 나왔을 때 귀환해야 하는 현실은 "세상에서 가장 괴로운 경험"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그에게 영화는 문자 그대로 판타지의 세계이며 이는 현실과 이분법적으로 대비되는 것이다. 현실의 고통과 반대 지점에 있는 판타지의 유혹은 그가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테마이기도 하다.
주인공 시실리아는 대공황이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가난 때문에 힘들어 하고, 남편의 외도와 거친 언행들로 인해 고통 받는다. 그런 그녀에게 삶의 유일한 낙은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다. 영화를 볼 때만큼은 현실의 고통스러운 일들은 잊히고 그 현란한 세계에 빠져 환희를 느낄 수 수 있다. 극장에서 그녀의 표정은 판타지 세계의 주인공만큼 행복해 보인다. 시실리아가 보는 영화 <카이로의 붉은 장미>는 ‘샴페인 코미디’라는 장르로 부자들이 턱시도와 드레스를 입고 나이트클럽에 가고 대저택에 살면서 늘 샴페인을 마시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이는 대공황이라는 암울한 시대적 상황과 대비된다. 이처럼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환상을 영화 속에서 찾을 수 있기에 시실리아를 비롯한 관객들은 극장을 찾는다. 이는 2015년의 한국 영화계를 떠올리게 한다. 당시 사회적으로 정권의 무능함이 큰 이슈였고, 국정농단으로 인해 국민들은 무력감에 빠져 있었다. 그에 걸맞게 권선징악 소재가 성행하였다. <베티랑>, <암살>, <내부자들>과 같은 영화가 그 예이다. 관객들은 2시간만이라도 권력가들이 혼쭐이 나는 장면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위해 극장을 찾았다. <카이로의 붉은 장미>에서는 단순히 일시적인 주인공 개인의 탈출로써 영화가 기능했지만, 관객이 여러 명으로 확대되면서 영화는 현실에 대한 담론을 생산하는 사회적 기능을 하기도 한다.
관객 개인이 영화의 판타지를 경험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중요하다. 현실은 쉽게 변하지 않는데, 두 시간동안 환상의 세계로 떠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지 않은가. 우디 앨런은 극장에서 나서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괴로운 경험”이라고 했지만, 필자는 좋은 영화를 보고 나면 산 정상에서 내려오듯 가뿐한 기분을 느끼곤 한다. 하지만 어찌 되었건 영화는 끝이 나기 마련이고 판타지는 말 그대로 환상일 뿐이다. 영화 밖으로 나온 탐은 영화 속 캐릭터 그대로이다. 같은 영화의 다른 캐릭터들이 그를 따라 스크린 밖으로 나오려고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것은 그만이 사랑 때문에 과감히 행동할 수 있는 낭만주의자로 설정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백스터는 시실리아에게 사랑만 있으면 어떻게든 살 수 있다고 낭만적으로 말하고, 완벽한 키스를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키스를 나눈다고 해서 불이 꺼지지는 않는다. 물론 돈 한 푼 없이 사랑만으로 살 수도 없다. 시실리아는 그런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현실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결국 그녀는 그토록 좋아하던 영화 속 주인공과 로맨스를 나누면서도 계속 혼란스러워하다 현실을 택한다. 물론 현실의 탐 백스터 배역을 택한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길은 그녀를 속이고 할리우드로 돌아간다. 필자는 시실리아가 길과 낭만적인 사랑을 찾을 것이란 결말을 기대하고 있다가 덩달아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우디 앨런은 환상은 깨지기 마련이고, 현실은 그대로 남아있을 뿐이라는 것을 보여줬다. 그렇다고 해서 결말이 비관적으로 표현되지는 않았다. 마지막 장면에서 시실리아는 언제나처럼 영화를 보면서 환희에 찬 얼굴을 한다. 그 때, 이 영화는 궁극적으로 영화에 대한 사랑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결국 판타지가 아닌 현실을 택했지만, 그렇기에 탐은 스크린으로 돌아갔고, 영화라는 판타지는 계속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환상은 다시 시실리아의 현실 속 삶에 의미를 줄 것이다.
한 편의 영화는 작가, 제작자, 감독, 배우, 다양한 스텝들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완성된다. 영화를 만든 이에게도 당연히 영화는 소중하지만, 그렇게 탄생된 영화가 아무런 관련이 없던 누군가에게 소중한 의미가 된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영화는 단지 두 시간 동안 스크린에서 흘러나오는 움직임들이지만, 그것을 보는 사람들에게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때로는 삶의 원동력, 탈출구 혹은 유일하게 위로해주는 친구를 만나는 것을 뜻한다. 또한 관객이 다수로서 기능할 때는 사회적인 담론을 형성하기도 한다. 이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에게도 원동력이 되어준다. 백년 남짓한 짧은 역사를 가졌지만, 앞으로도 영화에 대한 사랑은 쉽게 식지 않을 것 같다.
■ 참고 자료
김형석, 「우디 앨런의 명작 다시 보기 ‘카이로의 붉은 장미’」, SCREEN M&B, http://movie.naver.com/movie/magazine/magazine.nhn?nid=524, 2017. 11.05.
조민준, 「세계영화작품사전 : 삶의 부조리와 모순을 다룬 영화 ‘카이로의 붉은 장미’」, 씨네21,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82018&cid=42621&categoryId=44449, 2017. 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