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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픽 Jun 03. 2020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불안함의 세계

영화 <로즈메리의 아기>


#서론

 예술가는 고통을 예술로 승화한다. 고통은 인간적인 감정이고 누구나 겪는 자연스러운 상태이며 때로는 아름답기까지 하다. 예술은 그 단순한 사실을 알려주는 창구이다. 그런데 도리어 그를 무기로 다시 예술을 핑계로 누군가에게 고통을 행위는 단순히 사디즘에 가까울 뿐이다. 아이러니하다. 결국 예술은 인간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예술을 창으로 누군가를 고통 받게 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하자면, 결국 예술은 인간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너무나 당연한 진실이다. 또한 예술과 예술가는 분리 될 수 없다. 예술을 기술이라 부르지 않는 것은 그것이 단순한 기교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예술가의 사유가 담긴 것이기 때문이다.


 로만 폴란스키. 너무나 훌륭한 감독이다. 그러나 그가 범죄에 합당한 처벌을 받기를 원한다. 예술은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마주하는 것이고 맞서 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학도로서 교과서처럼 그의 작품을 접하고 있다. 그의 작품이 후대에 끼친 영향력이 실로 방대하기 때문이다. 지금 포스팅할 영화는 <유전>이라는 영화를 감명깊게 본 후, 그것이 오컬트 영화의 효시라는 <로즈메리의 아기>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찾아보게 된 것이다.


 뭐, 작품에 대한 평가를 감히 해보자면, 실로 대단하다. 역시 클래식만한 것은 없다. 또 오컬트 영화 중 뛰어난 수작으로 평가받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아류작들인 여타 영화에 비해 표현 수위는 상당히 부드럽고 세련된 점이 인상 깊게 다가왔다. 피칠갑으로 가득했던 <곡성>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본론

 서론이 길었다. 범죄자의 예술을 접하면서 스스로에게 그에 대한 의견을 묻고 명시해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불안감과 공포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모든 감정은 인간의 진화의 산물이 아로새겨진 것이고 그 존재 이유가 존재한다고 한다. 이 때, 불안과 공포라는 감정은 나 혹은 나에게 소중한 것이 손상을 입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기인한다고 한다. 이 때 그 실체를 알 수 없을 때라면 불안감은 더욱 증폭될 것이다. 이 영화는 주인공 로즈메리의 불안에 대해 다루고 있다.


 영화는 그녀의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기에  주인공을 따라가는 관객인 우리 역시 그녀에 고스란히 몰입해 그 공포를 고스란히 전달 받는다. 미스터리 장르로써 고전적이지만 탁월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또 로즈메리가 얻는 정보가 관객의 정보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그녀의 착각인지 아닌지 관객인 나조차 함께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의심하게 만든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길, 좋은 비극의 플롯은 중간의 인물이 어떤 과오나 실수 때문에 불행을 겪을 때 성립한다고 한다. 주인공 로즈메리는 평범한데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운 가정주부이다. 그녀의 남편은 배우라고 소개해도 아무도 그가 어디에 나왔는지 알아차리지 못 하는 무명 배우이다. 영화는 허밍하듯 자장가를 부르는 한 여인의 노래 소리가 들려오며 고층 건물로 빼곡한 도시의 풍경으로 시작한다. 그들이 입주하는 집에 살던 늙은 여자는 병원에서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왠지 수상쩍은 벽장이 있고, 그들의 친구 하치는 그 아파트에서 끔찍한 일만 일어났다고 경고하지만 그들은 왠지 그런 것쯤은 무시해버린다. 다른 집도 아닌 그 아파트에 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른 건 다름 아닌 영화 내내 끔찍한 일들을 겪을 주인공 로즈메리. 곧 그녀의 중대한 과오로 불행을 자초한 격이다. 그녀는 세탁실에서 이웃에 사는 젊은 테레사를 만나고 곧 그녀의 사고 현장을 목격한다. 그런데 그녀와 함께 사는 노부부는 그녀의 죽음 앞에 너무 태연하다. 그리고 할머니 미니는 딱 봐도 평범해 보이지 않는 지나치게 화려하고 수다스럽고 제멋대로인 성격을 가졌다.


 그들과 만난 이후로 남편은 점점 변해가기 시작한다. 경쟁 상대였던 배우가 갑자기 눈이 멀어 원하던 배역을 차지한 것이다. 로즈메리는 바빠진 남편에 서운함을 느끼던 차, 그가 먼저 아기를 갖자고 얘기하고 둘은 함께 밤을 보낸다. 그 때 마침, 미니는 컵케잌을 만들었다며 가져오고 로즈메리는 찜찜하지만 억지로 그를 조금 먹은 다음,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그날 밤, 악마에게 강간당하는 꿈을 꾸며 ‘이건 꿈이 아니라 진짜’라고 외치지만 결국 일어나서 그 일을 기억하지 못 한 채 임신을 하게 된다. 임신을 한 후 로즈메리의 불안은 점점 더 심해진다. ‘혈액 체취’라는 단어에도 벌벌 떨 정도로. 할머니가 소개해 준 새로운 의사는 임신에 관한 책이나 임신한 친구들 말은 듣지도 말고, 비타민도 먹지 말고, 자신이 특효 처방한 건강 음료만 마시라는 의사. 그녀가 아파트에 고립될수록, 친구들을 만나지 않고 외출을 하지 않을수록, 그녀는 점점 불안해져만 간다.



 로즈메리는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심지어 남편까지도- 자신의 아기를 노린다는 의혹에 점점 확신을 가지고 가출을 감행한다. 그녀는 원래 알던 의사를 만나 자신이 사탄들에 둘러싸여 있음을 말하고 도움을 청하지만, 그를 믿지 못 한 의사가 남편에게 전화함으로써 집에 강제로 끌려온다. 이는 필자가 영화에서 가장 무서웠던 부분이기도 하다. 가장 친숙해야 할 담당 의사와 남편이 가장 공포스러운 존재로 다가올 때의 위력이란. 집에 돌아와서 로즈메리는 출산을 한다. 그런데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떠보니 아기는 없고, 유산되었다는 말만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웃에서 들려오는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아기가 살아있을 것이라는 의심을 거두지 않는다. 자신의 모유를 받아가는 유모를 보며 로즈메리는 어떤 확신을 가지고 평소 의심이 갔던 옷장으로 들어가 비밀의 공간을 발견하게 된다. 그녀는 부엌칼을 가지고 그곳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자신의 주변을 맴돌던 이웃들을 모두 마주하고, 드디어 자신의 아기를 발견한다. 그러나 예상치 못하게 아이가 사탄의 아기라는 것을 깨닫고 로즈메리는 큰 충격에 휩싸인다. 결국 그녀는 사탄의 아기를 자신의 아기로서 받아들이고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사탄 세계의 일원으로 동화된다. 다시 평범한 아파트 건물의 모습이 보이고 오프닝처럼 허밍소리가 들리며 영화는 끝이 난다.    


 

 그녀에 이입해 있었기 때문에 처음 결말을 접했을 때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결국 모성애로 귀결되는 결말이라고 생각했기에. 미아 패로우의 칼이 악마든 자신이 나은 악마의 씨앗이든 그것을 찌르기를 바랐다. 그러나 어찌 보면 결말이 가장 공포스러운 부분이 아닐까. 그토록 공포스러웠던 타인들의 세계를 자신의 세계로 받아들인다는 것. 꼭 사탄을 숭배하는 이웃을 만나지 않더라도 이 이야기는 여성이 출산을 하면서 느끼는 모든 불안과 공포를 대입해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떠올려보면, 불안과 공포가 자신을 해할 것이라는 데에서 기인한다면 출산은 자신의 세계를 변화시키는 커다란 공포로 느껴질 것이며 실제로 그렇다. 그렇다면 로즈메리, 그리고 여성의 선택은 단 두 가지뿐이다. 받아들이거나, 그렇지 못하거나. 그렇지 못했을 때, 영화 <케빈에 대하여>에서 틸다 스윈튼이 연기했던 어머니의 경우가 생각이 난다. 두 가지 모두 옳고 그름을 따질 수는 없겠지만, 받아들이지 못한 경우 돌아오는 싸늘한 시선이 마치 답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로즈메리가 사탄의 아기를 자신의 아기로서 받아들인 결말은 끔찍하게 다가온다. 그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공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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