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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픽 Mar 12. 2020

그건 분명 우아한 슬픔일 것이다

영화 <우아한 세계>



 주인공 인구는 생계형 건달이다. 건달이자 아버지이다. 아버지. 참 여러가지 생각이 드는 단어이다. 요즘 TV 육아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 자상하고 이상적인 '수퍼맨'같은 아버지들이 한 트럭이다. 하지만 일상의 아버지들은 대부분 그와는 반대되는 모습이다. 가부장적이고 무뚝뚝하며 따라서 거리감이 느껴지는. 해가 지날수록 뒷모습이 작아보이는. 그리고 그런 모습을 묵묵히 숨기고 있는. 아직까지는 이러한 관념들이 아버지라는 단어에 걸맞는 무게로 느껴진다.


 분명 가깝지만, 한없이 멀게도 느껴진다.


 평범하게 직장 생활하는 아버지도 사춘기 딸과 거리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하물며 인구는 깡패다. 촌지로 나이트 클럽 쿠폰을 주는 경악스러운 짓도 서슴없이 한다. 딸은 그런 아버지가 혐오스럽다. 아내도 별반 다르지 않다. 말로는 조직생활 그만 둔다고 하면서도 계속하는 인구가 야속하다. 그런데 어쩌겠나. 한탕 크게 벌어서 물 펑펑 나오는 근사한 주택에 살게 해주고 싶은 마음을.


우리는 때로는 헷갈린다. 누군가를 위해서 했던 일이 때로는 상처를 주는 것이었다는 것을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다.



 사실 처음에는 아무리 송강호라도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깡패짓을 하는 인구라는 인물에 대해 별로 공감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딸이 고기만두를 안 먹고 간 순간부터, 앞뒤 꽉 막힌 도로에 갇힌 듯한 인구의 인생에 같이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돌아가고 싶어도 꾸역꾸역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인생. 길을 들어선 순간은 잘못이었을지 몰라도 돌이킬 기회가 없다는 건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또 애초에 그가 갈 수 있는 길이 몇 개나 있었을까. 그 차에 탄 가족들은 왜 이렇게 길이 막히냐며 불평만 하고 있으니, 아버지라는 무게로 견디기만은 너무 야속한 현실이다.


결국 인구의 희생으로 딸은 그토록 원하던 유학을 간다. 이제 인구는 고속도로에서 내려 맨발로 가족들을 업고 뛴다. 가족들은 인구의 위에서 그가 어떻게 뛰는지 보지 못 한다. 채광 좋은 큰 집에서 암덩어리를 몸에 키우며 대충 끼니로 라면을 때우는- 그리고 그런 라면을 홧김에 엎지르고도 다시 스스로 치워야되는 처지를- 그들은  보지 못한다.  아니, 그건 인구가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아하다. 우아하게 슬프다.

나의 불행으로 소중한 이가 행복을 얻는다면 그건 분명 슬픈 일이지만, 적어도 우아한 슬픔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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