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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원 Dec 08. 2021

가장 불확실할 때 가장 단단해지는 법

영화 <마이 뉴욕 다이어리> 리뷰

1951년,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은 발표와 동시에 전 세계 젊은이들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독자들은 위선적인 사회에 저항하며 순수를 찾기 위해 방황하는 주인공 홀든 콜필드의 일탈에 열광했다. 기성세대를 향한 반항과 거침없는 표현은 때로 독이 되기도 했으나 기꺼이 독주를 마시겠다는 이들이 줄을 섰다. 모두가 ‘콜필드 신드롬’에 빠져있던 그때, 저자 J.D. 샐린저가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그는 은둔 생활과 동시에 세상을 차단해버렸지만 사람들의 러브콜은 끊이지 않았다. 결코 응답하는 일이 없었던 샐린저 대신 열렬한 고백을 거절할 누군가가 필요했다. 영화 <마이 뉴욕 다이어리>는 그 ‘누군가’가 되었던 한 사회초년생의 이야기다.

1995년 작가 지망생 조안나(마가렛 퀄리 분)가 뉴욕의 오래된 작가 에이전시에 입사한다. CEO 마가렛(시고니 위버 분)의 조수가 된 그녀는 출근 첫날부터 작가 J.D. 샐린저 앞으로 오는 팬레터에 응대하는 일을 맡는다. 기계적으로 같은 내용을 보내야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자꾸만 진심으로 답장을 보내야 한다 외치는데. 한편, 조수로 일하며 꿈꾸던 일과 멀어지고 있던 조안나는 매일 글을 써야 한다는 J.D. 샐린저의 조언에 흔들리기 시작한다.


<라자르 선생님>(2013)으로 깊은 울림을 주었던 필리프 팔라도 감독이 <마이 뉴욕 다이어리>로 돌아왔다. 여성 이야기를 그리고자 했던 그는 서점에서 우연히 책 한 권을 발견하고 영화화를 결심했다. 원작 소설 [마이 샐린저 이어]는 뉴욕의 작가 에이전시 ‘해럴드 오버’에서 1년 동안 일했던 저자 조안나 래코프의 회고록이다. 감독은 인생에서 가장 불확실한 시기를 겪으며 자신을 찾아가는 조안나의 얘기가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라 믿었다.

원작자의 격려와 응원을 받으며 각색에 도전한 필리프 감독은 이야기보다 인물에 초점을 맞췄다. 그 과정에서 조안나, 마가렛, 샐린저와 같은 매력적인 캐릭터가 탄생했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2019)에서 브래드 피트의 상대역으로 등장하여 잠깐이지만 확실하게 눈도장을 찍은 마가렛 퀄리가 조안나 래코프를 연기했다. 그녀는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느끼는 불안과 떨림을 세심하게 표현했다. 그런 조안나를 이끄는 카리스마 넘치는 CEO 마가렛은 폭넓은 장르에서 연기력을 입증한 시고니 위버가 맡았다. 문학계 베테랑인 마가렛처럼 연기 베테랑인 그녀의 노련함이 돋보인다. 또한 뉴욕에 거주하며 국문학을 전공했던 그녀는 작가를 꿈꾸었던 본인의 경험을 살려 영화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두 사람이 1995년 뉴욕 문학 세계 인물을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었던 건 디테일한 미장센 덕분이다.. 뉴욕과 몬트리올 로케이션 촬영, 복고의 멋을 드러내는 의상, 작곡가 마틴 레옹의 감각적인 음악이 90년대 뉴욕을 스크린 안에 재현했다. 필리프 감독은 세세한 디테일을 놓치지 않으며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혼재되어 있던 1990년대를 생동감 있게 그리는 일에 성공했다. 레트로 감성을 그대로 살린 영화는 그 시절을 겪지 않은 사람의 추억마저 조작한다


한편, 영화 내내 얼굴이 나오지 않는 J.D 샐린저는 미스터리하면서도 존재감 있는 인물로 등장한다. 연륜이 묻어나는 중후한 목소리, 전화를 하는 옆모습, 어쩌다 집 밖을 나왔어도 기둥에 가려진 얼굴과 뒷모습만 보일 뿐이다. 그를 만나고 싶어 안달이 났던 조안나의 마음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그러나 그가 나타날 때마다 묵직하게 날아오는 말 한마디 한마디는 조안나뿐 아니라 영화를 보는 관객의 마음까지 두드린다.

영화에서 조안나는 넘쳐흐르는 열정과 감출 수 없는 불안에 늘 롤러코스터에 탄 듯한 기분을 느낀다. 누구나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 가운데서 갈팡질팡하고 또 하고 싶은 일을 잘할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조차 없는 시절을 겪는다. 특히 사회초년생이라면 자신의 선택 하나하나가 다 의심이 갈 수밖에 없다. 이런 불확실함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지만 이런 풍랑 안에서 삶은 더욱 단단해지는 법이다. 그리고 원치 않아도 겪어야 할 삶의 한 과정이기도 하다. 조안나 역시 자기 자신이 누군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흔들리는 과정에서 조금씩 성장한다. 여기서 영화는 마음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우리 모두의 진심을 친절하게 두드리고 깨운다. 그리고 묻는다. 당신은 자신의 모습대로 살고 있냐고.


무엇보다 <마이 뉴욕 다이어리>가 매력적인 건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지 않았어도, 혹은 J.D. 샐린저가 누군지 몰라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매년 전 세계에서 50만 부 이상 씩 팔리며 우리나라에서도 100쇄를 돌파한 책이지만 읽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니 모르고 봐도 괜찮다. 알고 보면 재미있는 영화는 많아도 모르고 봤을 때 재미있는 영화는 드문데, 이 영화가 바로 그 영화다. 그저 영화를 보는 동안 온전히 조안나의 세계에 빠져들면 된다. 이거 하나만 기억하면 <마이 뉴욕 다이어리>를 온전히 즐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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