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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사 작사가 류익 Oct 23. 2024

[인턴 일지] #25. 현장 일기 (다시 겨울)

파견) D+489 2019.12. 9. (월)

 

<연가, 한국>

  

ㆍ JLPT 등록 기간을 놓쳐 어찌해야 하나 안절부절못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찌 되었든 한국에서 JLPT 시험을 응시하게 되었고, 그 시험 하나를 목표로 급하게 한국행을 결정했다. 결정한 지 얼마 안 되어 시간은 훅훅 지나고 어느덧 12월 1일 JLPT 2차 시험날이 다가왔다. 시험을 보름 앞두고야 본격적인 시험 준비를 시작했고 아주 열심히는 아니지만 나름 열심히 시험 준비해서 한국으로 건너갔다.

 

비행기를 약 8시간 탔는데 개념이 확실치 않아 8시간 비행 내내 책만 들여다보았다. 조금씩 자신감이 생기는 듯하기도 하고. 집에는 금요일에 도착했고 시험은 일요일에 있었기에 그냥 별다른 일 없이 휴식과 공부만 했다. 

 

ㆍ 약 3~4개월을 질질 끌어온 일본어 시험은 가볍게 끝이 났다. 의외로 어휘 쪽에 어려운 것이 많았고 대체적인 읽기 난도는 높았다고 한다. 하지만 시험 시간 거의 비슷하게 시험을 잘 마무리했고, 독해뿐만 아니라 청해도 가장 고난도 문제까지 별 무리 없이 해결해내었다. 시험을 치고 나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한 밤이 찾아왔고, 시험장이 모처럼 포항시에 있어서 그 김에 큰아버지, 큰어머니도 뵈었다. 

 

ㆍ 본격적으로 우리 누나도 점점 결혼을 준비하고 있다는 의미 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후년 봄 즈음으로 날짜를 예상하고 준비를 해 나갈 예정이라고 한다. 경주에서 만났지만, 앞으로의 생활은 포항에서 하고 싶은 듯. 일 / 월 / 화 3일 연속으로 누나의 남자친구 언욱이 형을 보았고 화요일에는 내 친구이자 언욱이 형의 친척인 수진이와도 같이 식사를 했다.

 

 

 

<워크숍>

  

ㆍ 스리랑카에 도착하면 업무 때문에 이런저런 걱정이 많았다. 11월 보고도 마무리 짓지 못하였는데, 연말이라 올해의 성과를 정리해야 했고 내년의 계획을 수립해야 했고, 밀려있는 보고서도 처리해야 했는데 연속해서 워크숍에, 간담회에 각종 행사가 진행될 예정이었다.

업무는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품으며 스리랑카 땅에 다시 도착했다.

스리랑카에 닿았지만, 순탄히 흘러간 건 없었다. 공무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뻔히 아는 길을 안내해 주더니, 금품을 요구하기도 하고 모든 사람이 그냥 게이트를 지나갔지만 나만 콕 집어 짐 검사를 하라고 했고 Uber 기사도 Pick up 위치를 못 찾아 한참이나 헤맸다.

 

그래도 제시간에 맞추어 콜롬보 사무실에 도착했고, 스리랑카에 도착하자마자 거의 끌려가듯 마을로 향했다.

 

ㆍ 스리랑카에 도착한 다음 날의 Mirissa에서 워크숍이 계획되어 있었다. 새벽같이 Mirissa로 출발하여 또 정신없이 워크숍 프로그램에 참석했다. 다들 프린트에 유인물까지 만들어 왔던데 그런 것을 만들 정신까지는 없었고 즉석 해서 대본을 작성해 발표했다.

바다에서도 잠시 놀고 해변을 걷고 밤에 BBQ 파티까지. 잔뜩 먹은 후에 밤엔 혼자 남아 푹 쉬었다. 스리랑카에 있는 지인들에게 주러 부랴부랴 싸 온 물건을 돌아가며 배급하고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 나의 첫 번째 해외 연가는 이렇게 끝이 났다.

 

선신호 선생님과 거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콜롬보에서 외식을 하고 들어갔는데, 오늘도 Naga씨에게 미리 주방장 일임 음식 주문을 미리 부탁드렸고 선생님은 메뉴 구성에 대체로 만족하셨다. 

 


 

파견) D+499 2019.12.19. (목)

 

<사무치는 것들>

  

ㆍ 1년이 끝나가면서 2019년이라는 시간이 영원히 사라지는 날을 조금씩 당길수록, 사무치는 것들이 무척이나 많다. 단연 하나를 꼽으라면 '외로움'이다. 이전에 적었듯 외롭다는 감정이 끊임없이 몰아친다. 누구를 만난다고 해소되는 외로움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근본적인 외로움. 스리랑카에 파견된 인턴 6명 중 가장 사교적이고 활발히 지낸다고 하더라도 아무리 친구를 만나고 지인을 만나더라도 이 외로움은 떨어지지 않는다. 어떻게든 이 외로움을 떨쳐 내 보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지만 많은 사람과 연락을 주고받고 만난다고 하더라도, 흥미는 금방 떨어져 버리고 존재 자체의 외로움으로 나 자신이 심연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만 같다.

 

괴로움을 떨쳐 내려 외로움을 택했지만,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사회 초년생인 지금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혼자였지만, 언제나 외로움의 감정은 나를 잠식해 버리고 이따금씩 잘못된 판단을 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소모적인 만남은 결코 이 외로움을 떨쳐 내지 못한다는 것을 최근 들어 절실히 느끼고 있고, 이제는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저 나는 늘 '외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25살 꽃다운 나이에 정열을 누구에게도 쏟지 못하고 혼자 감내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 쓰라리고 괴롭다.

  

ㆍ 그리고 또 다른 사무치는 것은 '공허함'이다. 돌아보면 난 항상 떠나오는 입장이었다. 나의 삶을 짧게 요약하자면, 안강에서 경주로, 경주에서 하양으로, 하양에서 경산으로, 경산에서 대구로, 대구에서 서울로, 일본으로, 유럽으로, 미국으로, 그리고 마침내 스리랑카까지 떠나 왔다. 가족의 품을 떠나 친구에게, 학교에, 군대에. 끊임없이 떠나가기만 했지 누군갈 담아두고 떠나보낸 기억은 잘 없다.

스리랑카에서 2년이라는 세월이 한정적이긴 하지만, 나 역시도 언젠간 이곳을 떠날 사람이지만 그새 내게서 떠나간 사람들이 많다.

한국에 있을 때 모든 것을 담아 진심으로 사랑했던 나나, 스리랑카에서 만난 리나, KOICA 단원, JICA 단원, UN Volunteer들, 가끔 내게 웃음을 건네주었던 KOICA YP들, 한국 수출입은행 인턴들, 최근에 만났지만, 곧 떠나 버릴 기아대책 단원들까지 짧은 시간 내에 꽤 많은 사람을 보냈다. 정을 주고 조금 깊어지려 하면 멀어져 있는 그들을 보며 어느샌가 정을 주는 것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ㆍ 마음에 새겨진 사람과 물리적으로 멀어질 때면 마음 한구석에 흔적이 남는다. 스티커처럼 달랑거리며 붙어있을 때도, 핏물이 고여 생채기가 나 있을 때도 있지만 그 흔적은 그 언젠가 바람구멍이 되어 숨을 쉬기 시작한다. 마음에 구멍이 나면 저릿저릿 아려오다 어느덧 흉터로 변해 있기도 하다. 피부에 나 있는 흉터는 쉽게 결이 바뀌지 않는다. 마음에 맺혀 있는 흉터 역시도 어떠한 형태로 그 속에 자리 잡아 변하지 않은 채로 그 자리 그대로 앉아 있기도 하다. 하나 둘 물리적으로 떨어져 가는 주변인을 보며 마음에 바람구멍이 생기곤 한다. 바람구멍이 숨을 쉴 때면 한 편이 시릴 때도 있다.

그리고, 두려움이 사무친다. 조금 더 이른 시일 안에 많은 것들을 경험해 보고 싶다는 조급함, 나이가 점점 많아짐에 따라 실감하는 '앞가림을 해야 한다'라는 압박감.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이루어 내고 싶은 마음과 과연 이루어 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 시간과 젊음, 청춘의 유한성, 모든 감정을 종합하면 결국 '두려움'이라는 감정으로 귀결될 때도 있다.

 

그래도 스리랑카에서 이루어 낸 것 중 하나는 '이루어 내고 싶은 것'이 생겼다는 것.

이루고 싶은 것은 많지만 시작점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한정된 시간 내에 다 이루어 낼 수 있을 것인지. 끊임없이 뇌리를 맴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여기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것이다.

 

 


파견) D+510 2019.12.30. (월)

 

<2019년의 마지막에 서서>

 

 ㆍ 올해 연말은 작년 연말처럼 보고서를 쓰며 보낸다. 올해에는 내가 해낸 것들이 있어서 물론 작년보다는 모두 쓰기 편했다. 작년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2개 마을을 도맡아 썼지만, 이제는 사업의 진행을 알고 내가 했던 것들을 쓰면 되었기에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보고서를 마무리했다. 진행 속도는 빨랐지만 100장이 넘게, 절대적인 분량이 많아서 근 일주일을 거의 일만 하며 보냈다.

 

크리스마스건 평일이건 일단 언젠가 꼭 해야 할 일이니까 휴일과 주말을 못 즐기더라도 묵묵히 업무만 했다. 평일도 매일 일만 했다. 8시까지 매일 야근에 노력을 가한 결과 연말이 다가오는 오늘 회계 마감, 2019 최종 활동 보고서 초안 마감, 2020 모니터링 계획서 초안 마감을 일궈 내었다. 다른 2개 마을이 이제 보고서의 첫발을 내민 것에 비하면 괄목할만한 성과이다. 2020년 초까지는 반드시 마무리돼야 할 작업이라 1월 3일부터는 꼭 합숙해서라도 보고서를 만들어야 한다는데, 합숙만큼은 하기 싫어서 빠르게 끝내 버렸다. 

 

 


파견) D+525 2020. 1.14. (화)

  

<HELLO, 2020>

  

ㆍ 2019년 이 정신없이 지나갔다. 특히 연말, 연초는 보고서를 작성하느라 인턴 중 핵심 멤버 몇 명이 모여 요 며칠간 합숙을 하며 열심히 보고서를 썼다. 나는 일찌감치 보고서의 윤곽을 잡아 놓았기 때문에 여타 마을보다는 꽤 여유롭게 보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스리랑카로 여행 온 여행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갑자기 시간이 붕 떠서 그 사람과 근 이틀을 같이 보냈다. 콜롬보 구석구석을 보여주기도 하고 곳곳에 숨겨진 맛집을 들르기도 했다.

 

ㆍ 그리고 그녀는 다시 여정에 올랐다. 그새 나는 써야 하는 보고서를 마무리하고 그녀를 따라갔다. 그녀는 Heritance Kandalama Hotel에 머문다고 했다. Geoffrey Bawa가 설계한, 스리랑카에서 꽤 고급 호텔 축에 속하는 Heritance Kandalama. 언젠가는 꼭 묵어보고 싶었는데 이 친구가 초대해 주어서 잘 되었다 싶었다. Heritance Kandalama는 Dambulla 지역에 있었는데 Colombo에서 보고서 갈무리 작업을 하고 Kandy를 거쳐 Dambulla에 도착하니 시간은 어느덧 9시를 넘어갔고 저녁을 시내에서 먹은 후 Heritance Kandalama로 향하기로 했다.

 

ㆍ 시내에서 밥을 먹으며 지금 무려 아프리카로 가버린 우에무라 리나와 전화 통화도 잠시 나누었다. 오랜만에 하는 전화라 약간은 떨리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익숙했다. 목소리 / 느낌 / 말 뽐새 등. 아프리카의 이야기도 조금 들려주었는데 물은 3일에 한 번 나오는 수준이고 물가는 의외로 너무 비싸다는 것. 특히 인터넷 통신비가 너무 비싸다고 했는데 4GB를 쓰려면 무려 25,000원 정도를 내야 한다고 했다. 생활이 그렇게 재밌지도 않고 관광지도 적어서 가 볼 곳도 몇 없다고 한다. 도로 사정도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였는데, 현재 사는 Maun이라는 도시에서 수도인 Garborne까지 가려면 버스를 무려 12시간을 내리 타야 한다고 했다.

Maun이라는 동네는 사파리로 유명한 관광지라 카페나 기타 여가 시설은 있는 듯 보였다. 리나도 결국 나와 별다름 없이 버티기이자 생존으로 보였다. 다는 이번 9월부터 일본 교환학생을 통한 유학 계획을 밝혔고 그녀는 그녀답게 우리의 앞날을 기원해 주었다. 이렇게 가끔 연락하며 지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아 보인다.

 

ㆍ 리나와 전화 통화를 마친 후 Uber를 타고 Heritance Kandalama로 향했다. 호텔은 Kandalama 호수 앞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들어가는 길이 꽤 좁고 복잡했다. 그래도 경치는 아주 좋았다. 모든 객실은 Kandalama 호수를 보고 있었고, 호텔 자체도 마치 자연이 된 듯 산 밑에 가만히 숨어 있었다. 자연의 경계와 인위의 경계가 그어져 있긴 했지만, 그 경계는 꽤 모호하게 그어져 있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벽 사이로 돌이 비집고 들어와 있기도 하고, 담장의 높이가 그리 높지 않아서 동물과 벌레들이 시시각각 호텔 주변으로 와서 객실 손님을 살펴보고 가곤 했다. 호텔에 도착해 씻고 푹 잤다.

 

ㆍ 다음날 조식을 먹고 호텔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밤에는 호수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낮에 식사하며 바라보는 호수의 풍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뻥 뚫리듯 보이는 유리창 바깥으로 잔잔한 호수가 물결을 그리며 바로 앉아 있었다. 조식의 질과 맛은 그닥이었지만 여기저기 미로처럼 얽혀 있는 호텔을 감상하며 수저를 들었다. 식후 호텔을 한 번 돌아보았는데 구조도 참 특이했다.

 

도서관이나 스파 등은 여기저기 구석에 숨어 있었고 야외 수영장은 무려 3개였는데 바닥이 천연 바위로 되어있었다. 꼬불꼬불 복잡하면서 자연과 하나 된 호텔을 돌아보며, 여기서 일하는 종업원들은 자부심을 느낄만하겠다고 생각했다. Geoffrey Bawa라는 세계적 건축가가 지은 역작에서 근무한다면 그들의 자부심은 대단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텔을 둘러보고 방에서 푹 쉬고 유유히 산책하며 하루를 보냈다.

 그날 저녁만큼은 근사한 저녁을 대접해 주고 싶었다. 호텔 주변에는 웬만한 시설이 없어 모든 식사는 호텔 안에서 해결해야 했지만, 맥주 한 잔에 곁들이는 Pork fillet. 맛은 그닥이었지만 그래도 그 순간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그 시간에 우린 호텔 레스토랑에 앉아서 ODA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을 어느 정도 끝내고 Dambulla로 출발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끝매듭을 묶지는 못했었는지 소장님께 계속해서 연락이 왔다. 자료를 조금 더 추가할 수 있겠냐며. 당일 오전까지 자료 제출을 요구받았기에 결국 Dambulla에서 사업지까지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근 이틀간 신세를 진 여행자에게도 인사를 나누고 급히 사무실로 돌아가 일을 마쳤다.

 

ㆍ 다음 날은 콜롬보에서 약속이 있었다. 휴대폰 어플리케이션으로 만난 중국인이 하나 있었는데, 마침 오늘 시간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식사 자리를 만들었다. 최근 중국인과의 대화는 재작년 겨울 기숙사에서 잠시 만났던 룸메이트가 전부였는데 특히 중국 여성과 대화를 나누는 건 대학교 ISC(International study club) 활동을 하면서 만난 친구 외로 처음이었다.

약속 장소는 일식 가게인 Tempura Shikisen으로 잡았고 그녀를 기다렸다. 멀리서 그녀가 걸어왔는데 별로 중국인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게다가 영어도 상당히 잘 구사하기에 깜짝 놀랐다. 그 친구의 이름은 '양루'라고 했다. 영어를 잘하기에 해외에서 유학했었나 생각했었지만, 그냥 중국 내에서 영어 교육을 의무로 받은 것뿐이라고 했다. 서로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 친구는 Kelaniya University의 Chinese language institution에서 대학생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치고 있다고 했다. 한국에도 관심이 있어서 한국어를 아주 조금 할 수 있었는데 그 모습이 꽤 매력적이었다. 그냥 단순한 호기심에 그 친구와 식사 한 끼를 생각했었는데 차도 한 잔 같이 마시고, One galle face의 'Cristal jade'에서 저녁 식사까지 함께했다. 소통은 주로 영어로 했고, 서로의 모국어를 조금씩 가르쳐 주었다. 중국어를 조금 배우다 보니 아주 간단한 회화 몇 마디는 할 수 있을 정도가 되더라. 참 오랜만에 느낀 매력적인 하루였다. 다행히도 그 친구 역시 꽤 만족스러운 하루를 보낸 것 같다.

 

ㆍ 그날 이후 그녀와 자주 만나게 되었다. 그녀의 모습이 문득 그리워질 때 마침 스리랑카의 휴일이 있었다. 휴일 별다른 일정이 없다기에 남부 바다를 보러 가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다. 흔쾌히 그녀는 승낙해 주었고 우리는 이틀 만에 다시 만났다. 

만나서 간단한 한식을 먹었는데 내 카드를 'Cristal jade'에 두고 온 것을 발견해서 우리는 다시 One Galle face로 향했고, 주변 카페에서 대화를 조금 더 나누었다. 그리고 그녀의 집 주변에 있는 호텔에서 하루를 더 묵었는데 그날 역시 모기 탓에 잠을 설쳤다.

 앉아 있다가 Galle에 유명한 만둣집에서 간단한 식사를 했다. 내가 스리랑카에서 가장 좋아하는 만둣가게. 다행히도 양루도 만족했다.

 

ㆍ 밥을 먹고 바닷가에 앉아 한참을 수다 떨다가 Hikkaduwa에 위치한 Turtle beach로 향했다. Hikkaduwa로 가는 길에 가족들에게도 지금 중국인과 있다는 것을 알렸다. 양루와 같이 바다거북 구경을 하고 발목 정도는 바닷물에 담가 보았다. 석양이 보이는 카페에 앉아 일몰을 바라보고선 이후 콜롬보로 다시 돌아가려 다시 Galle로 떠났다. Galle에서 콜롬보로 가는 마지막 버스를 타려고 하는데,

만석이라며 우리를 태워 주지도 않더니 그냥 버스는 떠나 버렸다. 갑자기 양루의 눈에는 걱정이 가득 끼었고 나는 그녀를 잠시 꼭 안아 준 채 콜롬보 주변으로 가는 버스를 어떻게 잡아서 그곳에 몸을 실었다. Kottawa에 도착했고, 양루의 집 주변까지 데려다준 후 다시 Kandy 행 버스를 타고 집에 도착했다. 어느덧 12시. 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ㆍ 곧 있으면 설이 다가오는데, 중국도 최대 명절인 '춘절'이 다가오고 있어서 양루도 잠시 본가에 다녀온다고 했다. 그냥 보내기는 아쉬워 저녁이나 먹이고 보낼 참에 다시 양루 집으로 찾아가서 같이 간단한 허기를 채우고 공항으로 향했다. 같이 밥을 먹으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양루의 부모님은 공무원이시고 두 분 다 공산당 당원이라고 했다. 북한과 같이 중국도 공산당 당원은 가족력이 있을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고 본인은 대학교 성적이 좋지 않아서 공산당 가입을 못 하였단다. 공산당에 가입하면 특권이 있는 것은 아니고, 일종의 본인의 신념이자 종교 같은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공무원은 해외에 나가기 엄청 어렵다며, 공무원인 부모님은 아직 해외에 나가본 적은 없다고 했다. 본인은 태국, 아랍에미리트, 스리랑카 정도를 경험해 본 듯. 공항에서 같이 식사를 하고 비행기 체크인까지 도와주었다. 그녀와 헤어질 때는 따스한 포옹을 나누었다. 그렇게 그녀는 잠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비행기 연착은 무려 한 시간이나 되었단다.

 

ㆍ 양루와 헤어지고 나는 잠시 KOICA의 이근우 부소장님을 만났다. 맥주 한 잔과 이런저런 생활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날 밤은 부소장님 댁에서 하루 신세 졌다.

다음날은 오랜만에 박동규 단원과 콜롬보에서 카페에 앉아 여유롭게 시간을 보냈다. 소장님은 잠시 한국으로 떠나셔서 잠시 한국을 비우셨고. 그래, 조금은 쉬어가기로 했다.

 


 

파견) D+547 2020. 2. 5. (수)

  

ㆍ 중국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발생했다. 한 달 전쯤 중국에 폐렴이 창궐하기 시작했다는 기사를 언뜻 보았는데, 점점 상황은 심각해지면서 중국 본토에서 한국으로, 세계로 점점 병이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병의 창궐지는 중국의 중심부에 있는 후베이성 우한시 부근으로 예상되는데 불행히도 양루가 이번 춘절을 맞아 돌아간 본가 '언스'도 이 후베이성 안에 있었다. 처음에는 우한시가 봉쇄되었고, 봉쇄 지역이 황강, 엔저우 등으로 확대되더니 결국 양루가 있는 도시인 언스도 봉쇄되었다. 처음에 양루의 도시가 봉쇄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위로의 말을 어떻게 건네야 할지 참 막막했다. 상황도 상황이거니와 거의 집에서 두문불출할 수밖에 없는 양루의 상황에 최대한 맞춰 주려 노력했었다. 하지만 불안감 때문인지 양루의 몸과 마음이 지쳐가는 것이 점점 보인다.

 

전 세계적으로 질병이 문제시되어가고 있다 보니 과연 그녀가 스리랑카로 돌아올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ㆍ 주말에는 단원들과 Kandy를 다시 방문했다. 큰 재미는 없었지만 오랜만에 전신욕을 했고, 스무디 볼을 먹고, 오락실에서 다 같이 즐겁게 게임하고 놀았다. 다음에 또 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밤에 박재성 단원과 얘기하는 것도 좋았다.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2021년 2월 아이슬란드로 여행을 꼭 가자고 했다.

 

요즘 나의 문제는 해야 하고, 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당장 눈앞의 것에 집중할 수 없고 자꾸 무기력에 빠진다는 것. 재성 형은 그걸 듣더니 욕심이 많은 것은 단연 좋은 거라며 위로한다. 재성 형은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 본인은 그런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계속 참고, 인내하고, 견디고, 어깨에 지고 살아가려 하는 모습이 보여 참 안쓰럽다. 남자로서, 성인으로 해야 할 역할을 자각한 듯 부단히 노력하며 힘쓰는 모습이 예쁘다.

 

돌아오는 길에 박동규 단원과 Peradeniya에 위치한 Royal Botanic Garden을 잠시 같이 걸었다. 단조로운 생활에 동규도 꽤 많이 지친 듯, 여자친구와 헤어진 것도 여파가 큰 듯 보였는데 일단은 Instagram으로 만난 사람들과 이리저리 연락을 주고받는 중인 것 같다. 본인은 변화가 필요한 때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오히려 나는 지켜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고 이야기했다. 더 감내하고, 버티고, 6개월 후를 생각하며 다시 사회로 나갈 준비를 하는 것처럼 미래와 꿈을 위해 준비해야 하는 시간이라 생각한다.

 

 

 

파견) D+560 2020. 2.18. (화)

  

ㆍ 2020년이 된 지 50일 정도가 지났다. 지금은 사무실에 가용 자금이 없어서 아무것도 못 하고 있다. 소장님도 오랜만에 찾아온 여유라 조금 쉬라고 하실 정도로 정말 할 일이 없다. 푹 자고 일어나 씻고 출근해도 별로 할 업무가 없으니 축 처져 있다. 업무 시간에 블로그에 써야 할 것들을 올리거나 노래를 듣고, 웹 서핑을 하고, 어학 공부를 하며 보내고 있다. 이전에 썼던 글도 읽어보고, 찍었던 사진도 들추어 보고. 여태 약 1년 6개월간 스리랑카에서 썼던 일기를 한 번 들여다보았는데 일의 내용은 거의 없고 사사로운 일,

내 감정 변화가 주구장창 나열되어 있었다.

 

ㆍ 원래 올해가 되면 1년 6개월간 정도를 지냈던 G. R. Villa를 떠나 Kegalle에 새로운 보금자리로 이사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사를 하려면 올해 3월까지 이미 지급했던 집값을 다시 받아야 했다. 계약서상에는 퇴거를 원하면 1달 전에 집주인에게 알리고 잔금을 받을 수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 집주인이 돈을 돌려줄까, 반신반의했었는데 계약서에 본인 이름으로 서명을 했으니 돌려주겠거니 생각했다.

만약 돌려주지 않는다면 2차, 3차 대책도 구상했고.

 

집주인에게는 생활 여건과 출퇴근이 불편하므로 집을 옮기고 싶다고 의사를 전했고 미리 지급한 월세를 환급받을 수 있냐 물었다. 그러더니 자신의 통장 잔액을 보여주며 그럴 수 없단다. 그러면 미리 박동규 단원 것까지 낸 것으로 하고 다음 분기에 그만큼 환급받을 수 있냐고 물었더니 그것도 안 된단다. 내가 원한다면 집을 나가도 되지만 숙소비 환급은 안 된다는 철칙을 고수하기에 일단은 숙소비를 미리 냈었던 3월 말일까지는 지금 묵고 있는 숙소인 G. R. Villa에서 살고 4월부터는 Kegalle 집으로 나와서 생활할 예정이다. 결국, 집주인은 계약서의 내용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내가 집을 나간다는 사실에 불만이 생겼는지, 집의 기자재들을 부수었다며 전부 다 보상받을 것이라고 내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길 하고 다니는 것 같다. 무언가 불만이 있거나 얘기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내게 직접 이야기해 주면 좋으련만, 내 직원인 수주버, 가마기, 룸메이트 동규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불만을 토로하니 나도 무슨 경우인가 싶고 그로 인해 기분이 상하는 것도 사실이다.

 

동규에겐 내가 남았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왜 내가 아니라 타인에게 그런 말을 전하는지. 그러고선 나에겐 마주쳐도 인사조차 하지 않는다.

 

ㆍ 일을 진행하면서 전체적인 ODA 사업에 대해서도 생각이 많아진다. 나의 사업지인 Pitiyegama 마을은 사업을 개시하기 만 6년이 지나가고 있고, 여태 투입된 국민 세금이 USD 770,000 정도가 된다. 지금 환율로 계산하면 무려 9억 원이 넘어가는 금액이다. 이 돈으로 수많은 건물을 짓고, 물건을 사고, 길을 닦고, 기계를 들였다. 6년간 조합원들도 빚을 내가면서 자택에 재배사를 짓고 일정 소득을 가져갔다.

 

장장 6년간 조합 적립금을 쌓아왔는데 그 금액은 LKR 3,000,000~ 4,000,000 정도로 한국 돈으로 계산하면 2,000만 원이 넘는 꽤 커다란 돈을 모았다. 하지만 여태 들인 총예산에 비해서는 결과물이 무지 작은 것도 사실이다. 결국, 우리가 6년간 쏟아부었던 돈은

사업지 주변 건설 재료를 판매하는 업자, 건설 회사, 버섯, 농기구와 관련된 업자들이 돈을 많이 가져갔지 실질적인 수혜자인 마을 주민들의 지갑에는 커다란 돈이 들어가진 않았다. 심지어 우리 사업으로 인해 없던 빚이 생겨버린 사람도 있다. 

어찌 보면 가난했지만 별 분쟁 없고 평화로웠던 마을이 우리 사업으로 인해 각종 분쟁이 발생하고, 오히려 없었던 빚을 만들도록 독촉한 것은 아닐까. 괜히 우리가 평화로웠던 마을의 분위기를 괜히 해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성찰도 든다. ODA 사업. 참 의미 있는 일이지만, 참 풀어나가기 힘든 숙제 같은 인류의 과제이다.

  

ㆍ 우리 Pitiyegama 마을의 트리 휠 기사 수주버. 원래 2월 말이 되면 본인의 사업을 한다며 새마을 사업을 그만두려 했으나 내가 일단 그 직원을 잡았다. 8월 초까지만 같이 있어 달라고. 살면서 수주버처럼 이렇게 심성이 곧고 불심(佛心)이 가득한 사람을 만나 본 적 없다. 꽤 오랜 기간같이 지냈는데 불평, 불만이나 심지어는 얼굴 찡그리는 일 하나 없이 시키지 않아도 많은 일을 척척 진행해낸다. 이런 수주버의 마음가짐에 감명받았던 순간이 많이 있고 가능하면 내가 있을 때는 수주버와 같이 일을 하고 싶다.

  

ㆍ 이번 주말에는 콜롬보로 다녀왔다. KOICA 권정민 코디네이터님 생일이기도 했고 언젠가 새로 이사한 집의 집들이를 하자고 했는데 결국 날을 잡았다. 아침에 Colombo로 올라가서 권정민 코디네이터님과 같이 장을 보고, 코디네이터님의 제자 나디샤, 닐루샤와 같이 요리를 했다. 그날의 메뉴는 내가 만든 미역국, 계란말이, 감자전, 그리고 코디네이터님이 만드신 쌈밥이었는데 다 만들고 보니 꽤 큰 상이 가득했다.

 

스리랑카 여자아이들은 거의 외박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오늘은 특별히 나디샤와 닐루샤가 집에서 외박을 허락받았단다. 그래서 오늘은 꽤 늦은 시간까지 같이 놀기로 했다. 같이 루프탑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갑작스레 동규가 합류하였고 같이 저녁을 먹은 뒤 영화 한 편 보면서 밤늦게까지 같이 놀았다. 

 

ㆍ 푹 자고 일어나 점심을 먹으러 슬슬 나섰다. 이번 주에는 약속이 있었는데 한국에서 선교사로 파견되어, 2006년부터 이곳 스리랑카에 살며 선교 활동을 하고 계신 이성희 선교사님을 만났다. 참 대단하시다. 본인의 젊음과 에너지를 전부 이곳에 쏟아붓다니.

스리랑카의 복음화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는 그 사고와 태도가 정말 대단하다고 느꼈다. 언제나처럼 Kyoto Mirai에서 'Naga' 주방장님이 해 주시는 음식을 맛있게 먹고 커피 한잔한 뒤 헤어졌다.

 

ㆍ 동규는 6시부터 지인으로부터 패션쇼를 초대받았다고 같이 가자고 그랬는데, 시간이 남아 볼링을 두 게임을 쳤다. 시설은 한국의 락 볼링장과 비슷했지만 제일 아쉬웠던 점은 스리랑카 사람들이 볼링 매너를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옆에 사람이 공을 치고 있으면 다칠 수도 있어서 나가지 않는 것이 아주 기본적인 예의인데 주변 스리랑카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레인만 바라보더라. 심지어는 한 번 나가서 두 번 연속으로 치는 사람도 있었고. 그러면 안 된다고, 다친다고 설명하긴 했지만, 옆 라인 사람이 바뀔 때마다 설명해 주어야 했다.

 

ㆍ 6시 시간에 맞추어 패션쇼 행사장에 도착했는데 또 행사는 7시부터 진행되는가 보다. 그래서 주변 One Galle Face에서 저녁을 대충 때우고 Galadari Hotel Ballroom으로 향했다. 최근 동규가 한 스리랑카 모델과 친해졌는데 그 모델이 동규를 초대한 듯했다.

 

원래 입장료는 3,000루피인데 동규의 친구가 표를 구해 주어서 그냥 무료로 들어갔다. 오늘의 행사. 패션쇼가 아니라 일종의 슈퍼 모델을 선발하는 자리였다. 그래도 이런 모델들이 걷는 쇼를 보는 것 자체가 처음이라 기대도 많았다. 동규 친구 Shen의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상석에 착석했고 쇼의 시작을 기다렸다. 7시로 예정된 행사는 거의 8시가 다 되어 시작되었고 심사 위원 소개와 후원자 소개, 축하 공연을 시작으로 모델 워킹이 시작되었다. 스리랑카에도 모델이라는 직업이 있긴 하구나.

새삼 신기했다. 몸 좋은 모델들이 도도하게 걸으며 자신을 뽐내는 게 멋있기도 했다. 개성 있는 모델들도 많았고. 하지만 길게 이어진 쇼의 상당 시간을 후원자에게 상품을 주는 것으로 시간을 할애하였다.

일상복, 운동복, 수영복, 결혼복 순으로 4번의 워킹을 보여주었는데 전체적으로 재미는 있었다. 말로만 듣던 모델 워킹을 본 것도 처음이었고. 우리를 초대해 준 Shen도 이번 행사에서 '선'을 수상했다. 행사는 무려 12시가 넘어서 끝났다. 참가자들과 간단한 다과를 먹고 Shen과 그의 가족들과 사진을 찍은 후 새벽 2시 가까지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패션쇼, 확실히 특별한 경험이었다.

 

무엇보다 참가자들이 다들 집에 재산이 있는 집안 같았고 Shen의 사촌 누나 역시도 명품 가방을 가지고 다니더라. 패션쇼의 의미도 있지만, 자산가들의 사교의 장이기도 한 것 같다. 마을에 돌아가면 다시 경제 수준 하위 10%의 삶이 눈앞에 서리는데, 상류의 삶은 이렇게나 온도 차가 심하다니. 다들 보석에 명품에.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되는 밤이다. 

 

 

 

파견) D+566 2020. 2.24. (월)

  

<도전, Horton Plains>

 

 ㆍ 스리랑카로 넘어온 지 어언 1년 6개월 이상이 지났지만 사실 그렇다 한 여행을 떠나본 적이 많이 없다. 남들 다 가 보았다는, 심지어 새마을 2기 단원들도 다 가 보았던 Horton Plains, Lipton Seat, Sri pada 등. 나는 아무 곳도 가 보지 못했다. 일반 여행자들도 모두 들렀다 가는 이런 일반적인 여행지를 차치하고 Jaffna와 같은 독특한 여행지도 많이 가 보고 싶은데 언젠가는 가겠지, 누군가 생기면 가겠지 하며 차일피일 날짜를 미루다 인제야 조금 급해지기 시작한다.

 

그중 가장 가고 싶었던 Horton Plains로 첫 발걸음을 옮겨 보고자 한다. 그전에 KOICA 서정민 선생님으로부터 본인의 이전 학생에게 전달해 달라며 노트를 하나 건네받은 게 있다. 한국에서 가져온 단풍잎이었는데 일단 그 책을 학생에게 전달해 주려 Kurunegala로 향했다. 나디샤 학생을 만나 밥을 먹고 이야기를 좀 하다 밥이라도 한 끼 사려고 했는데 배가 부르대서 수프 하나 사주고 용돈 1,000루피, 집에 갈 때 과일까지 조금 손에 쥐여 보냈다. 일전에 Kyoto Mirai에 갔을 때 샀던 공책, 포스트잇도 같이 선물했다. 나디샤 학생과 조금 시간을 보내다 본격적으로 Horton Plains로 출발했다. Kandy를 거쳐 Nuwara Eliya로. 버스 정류장 주변의 호텔에 체크인하고 바로 저녁을 먹으러 Grand Hotel로 향했다.

 

전날 짜장밥을 했는데 그만 짜장을 다 태워버리는 바람에 거의 밥을 못 먹었는데, 오늘도 아침은 굶고 점심은 빵과 수프로 때웠으니 너무 배가 고팠다. 전에 소장님이 Grand Hotel 안의 Grand Indian을 추천해 주셨기에 일단 갔는데 왠지 Pad thai가 당겨서 Grand Thai 음식점으로 향했다. 유명 호텔치고는 가격이 저렴하기에 괜찮다고 생각하며 메뉴를 보다가 어린이 메뉴에 맛있어 보이는 음식이 많아서 그것을 시켰다. 직원이 아이들을 위한 음식이라며 한 번 내게 일러주었지만 먹고 싶다 얘기하니 맛있게 요리를 해 주셨다. 근데 정말 맛있었다. 간도 딱 맞았을뿐더러 시장해서 그랬는지 메뉴를 3개나 시키고도 하나 남기지 않고 전부 다 해치웠다. 스리랑카의 음식은 향신료를 많이 넣는 탓에 간이 엄청나게 강한 경우가 많은데, 어린이 메뉴라 그런지 간이 그다지 강하지 않았고 그래서 입맛에 꼭 맞았을 수도 있겠다.

  

ㆍ Horton Plains로 출발하려면 대부분 새벽 5시쯤 일어나 출발한다고 하는데, 다음날 출발하려면 일찍 일어나야 하기에 저녁만 먹고 숙소로 들어가 쉬려고 했다. 숙소에 들어가기 전 Grand Hotel 내부도 잠시 들러보았는데 아기자기하고 참 예쁜 공간이 많았다.

Bar 안에는 당구장이 숨어 있었는데 우리가 흔히 치는 Carom 방식이 아니라 Snooker라는 방식으로 영국 / 인도에서 인기 있다는 독특한 당구를 치고 있었다. 처음 보는 당구 방식을 한 경기 관람하고 숙소로 돌아왔는데 웬걸, 다음날 비가 올 듯해서 Horton Plains로 가는 여행 상품이 없단다. 내일은 그냥 Nuwara Eliya를 한 바퀴 둘러보라고 하는데 사실 리나랑 한 번 둘러보았던 곳이라 큰 욕심은 없었다.

일단 알았다고 대답하고 방에 들어왔다. 나는 숙소의 3층 가장 꼭대기 방을 배정받았는데, 천장에 비 떨어지는 소리가 생각보다 꽤 강했다. 이렇게 비가 밤새 뿌려진다면 내일 아침에는 개지 않을까? 생각했다.

 

ㆍ 아침에 일어나니 비는 찔끔찔끔 내리고 있었다. 아침을 먹으며 창밖을 보니 해가 들었다가 졌다가 했다. 비도 곧 다 그칠 듯 보였다. 이런 기세라면 낮 즈음에는 완전히 갤 듯 보였다. 11시에 Check Out을 하고 보니 하늘은 맑게 개어 있었다. 파아란 하늘이 얼굴을 빼꼼 비추고 있었고 먹구름도 저 멀리 달아나고 있었다. Nuwara Eliya와 Horton Plains는 그다지 멀지 않기에 괜찮을 듯 보였다. Pick me 어플리케이션을 사용해 일단 출발했다. 가는 길에 Gregory Lake에 들려 소시지와 회오리 감자를 사 먹고 출발했다. 그런데 점점 산으로 갈수록 기상이 안 좋아지더니 Ambawella 쪽을 지날 땐 비와 안개가 너무 자욱했다. 비는 내리는 지역과 내리지 않는 지역이 끊임없이 번갈아서 나왔고, 안개는 자욱해 풍경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기사가 중간에 다시 Nuwara Eliya로 돌아갈 것인지 물어보았는데, 조금 고민하다 기왕 출발한 김에 입구까지는 가 보자는 생각에 일단 Horton Plains로 다시 출발했다. 기사는 아마 도착하더라도 산책을 못 할 것이라 이야기했지만 그곳 날씨는 가 보지 않고선 알 수 없기에 일단 떠났다. 그러면서 기사가 길을 잘못 들기도 하면서 시간이 꽤 지체되었다.

 

기사의 차를 탄 게 오전 11시 30분쯤이었는데 Horton Plains에 도착하니 거의 오후 2시 30분쯤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했지만, 안개가 자욱해서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았다. 다행인 건 비는 내리지 않고 있었다. 이왕 이까지 온 것 산책이나 할 겸 들어가려 스리랑카 정부에서 발급받은 신분증을 제출하니 안 받아 준단다. 아니, 이 신분증으로 모든 것을 다 처리해 왔는데- 수납을 안 해 준다니.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내가 어떻게 이까지 왔는데. 그런데도 여권 원본이 없으면 절대로 Residence 인정을 안 해 준단다. 수납 직원과 실랑이를 거의 1시간 했다. 접수처 공무원이 정말 강경한 태도를 보이기에 결국 입장을 못 하고 다시 Nuwara Eliya로 돌아왔다.

 

그래도 1시간 동안 그의 업무를 방해해서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아쉬운 마음이 남아 Ambawella 목장에서 따뜻하게 덥힌 우유와 셰이크를 마시고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기상도 그렇고, 오늘 감정 소모를 너무 많이 하고 기분도 많이 상해서 더 이상의 여행은 안 될 듯했다. 입구까지 갔어도 결국 못 들어가고 떠나는 나를 위로라도 하는지, 길을 나서자마자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ㆍ 다시 Nuwara Eliya로 돌아왔는데, 또 그곳은 하늘이 개어 있었다. 참 이상한 날씨야. 결국, 이번 여행에는 아무것도 못 하고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너무 속상하다. 모처럼 그까지 갔는데 말이지.

 


 

파견) D+569 2020. 2.27. (목)

 

 <우리는, 뭐지?>

 

 ㆍ 2018년 8월부터 나는 재단에 꾸준히 요구한 것이 딱 하나 있다. 바로 4대 보험 가입. '청년 일자리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고, 나는 재단 국내 교육 때 분명히 인턴이라고 고지받았기에 분명히 나의 활동은 봉사가 아니라 노동의 개념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파견 전 우리는 4대 보험 가입 대상자가 아니라는 공지를 받았다. 이에 대해 재단 본부 사람들에게 여러 차례 문의했지만 '답변을 기다리라'라는 말만 들었지, 어떠한 조치도 없었다.

 

재단의 답변을 기다리며 약 1년의 시간을 허비하였는데 하지만 끝내 돌아온 답변은 없었고 다시 재단 신소현 팀장에게 재문의를 했다. 신소현 팀장은 우리가 기존에 시행되던 '새마을 리더 해외 봉사단'이 없어지면서 청년 중심으로 사업의 개념이 확대된 활동이라는 말을 해 주었다. 그래서 계약이 근로 계약이 아니라, 국제 개발 협력 활동과 봉사에 대한 내용을 명시했다고 했다. 글로벌 청년 새마을 지도자의 활동은 개인 경험 함양과 국제 개발 협력 경력을 쌓는 데 있다고, 즉 우리 글로벌 청년 새마을 지도는 공익성 / 무보수성을 전제로 하고 있으므로 고용 조건의 인턴 전환은 불가하다는 답신을 받았다.

 

참, 황당했다. 이런 중요한 사실을 현지에 파견되어 1년 6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나서야 이야기를 해 주다니. 그렇다면 우리 사업에 항상 꼬리표처럼 붙어 다니는 '청년 일자리'라는 개념은 무엇인가. 우리는 봉사자인지? 아니면 무엇인지? 법적인 지위도 불분명했다. '일자리'를 운운하면서 '노동' 개념이 아닌 '개인 경험 함양'의 봉사단 개념으로 파견한다니. '봉사'가 일자리인가? 이게 무슨 청년 '일자리' 사업인가? 어폐 가득한 답변을 받고 경악했다.

사실 재단에서는 파견이 끝난 단원들에게 뚜렷한 비전이나 사후 대책을 제시하고 있지도 않다. 뚜렷한 사후 대책 제시 없이 2년간의 활동이 '새로운 기회'로의 도약할 발판이 될 수 있을까. 경력 사다리의 측면에서 보면 청년들에게 국제 개발 협력 방면으로 '새로운 기회'는 국제기구로의 진출이 아닐까 싶다. 국제기구로의 진출이 가장 유망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국내 원조 최상위 기관인 KOICA를 비롯 우리 단체와 같은 GO, 그 밖 비영리 NGO 방향으로 방향이 정해져 있는데 최상위 기관 KOICA로 진출하려고 해도 이미 KOICA 내의 봉사단이나 YP 등의 프로그램을 수행한 인원이 연간 몇백 명씩 쏟아지는 상황에서 이 활동이 그 사이에서 경쟁력을 발휘 할 수 있을까 싶다.

 

결국, 우리가 4대 보험에 가입할 수 없는 이유는 다름 아닌 '예산'이다. 24개월의 파견을 노동으로 치부하면 대량의 퇴직금 문제와 12개월 이상 계속 고용으로 인해 정규직 전환의 문제가 발생하므로 전환이 힘든 듯 보인다. 사실 나는 나 자신을 여태 '인턴'의 신분으로 이해하고 있었고, 조직원 일원으로 생각하며 업무를 추진하였는데 사실 우리의 실질적인 신분은 '봉사자'였다. 나는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서 여기 있는가 싶기도 하고.

 

비단 비난의 화살이 재단으로만 향하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정부 일자리 사업 자체가 청년들에게 국내외로 '업무'의 목적으로 파견시키는 것인데, 실상을 들여다보면 퇴직금이나 정규직 전환 등의 사회 구조적인 책임이 발생하므로 대부분의 단체가 편법을 써서 직원을 단 5개월만 파견하거나, 인턴이 아닌 '봉사자'처럼 말을 바꾸어 구조적인 책임을 회피하려 하고 있다.

  

결국, 청년들은 일자리 사업 자체를 통해 일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일자리 사업을 참여했다는' 사실을 스펙으로 삼아 또다시 다른 일자리를 찾아 헤매야 한다. 참 역설적인 상황이 아닌가. 그런데도 일단은 당장 청년 취업률이 가시적으로 상승하니 당장 성과가 보이는 듯하더라도, 미래 지향적으로 생각했을 때 정부가 앞서 청년들의 고용 안정성의 근간을 흔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정부는 성과를 위한 보여주기식 사업이 아니라, 진짜 '일자리 사업'을 만들어 내야 한다.

 

ㆍ 그래도 기존 '활동 증명'에서 '경력 증명'으로 업무에 대한 증빙을 할 수 있도록 개선하고, 이외 우리의 신분 결의와 권익 확보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답변을 들었다.

만약 미래의 글로벌 청년 새마을 지도자를 지원하고자 하는 분이 이 글을 본다면 꼭 참고하길 바란다.

해외 활동은 당연히 유의미하지만, 정부와 재단에서의 뚜렷한 사후 대책은 준비되어 있지 않고, 활동에 관한 증빙은 단원 개인에게 공이 넘어와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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