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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사 작사가 류익 Oct 23. 2024

[인턴 일지] #26. 현장 일기 (그리고 봄)

파견) D+574 2020. 3. 3. (화)

 

<점점, 이루어 가는>

 

ㆍ 점점 파견 종료 날이 다가올수록 모종의 불안감도 생긴다. 스리랑카에 다시 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한 곳이라도 빨리 눈에 담아야지.

 

ㆍ 지난 금요일에는 퇴근 후에 사무실 트리휠 기사 수주버와 같이 Ambuluwawa라는 곳에 들렸다. 동그랗게 말려 있는 원기둥 모양의 성채 외곽을 빙글빙글 돌며 올라가는 건물이었는데, 올라가니 정말로 무서웠다. 일단 올라가는 계단 폭이 너무 좁고, 담의 높이가 점점 낮아졌으며, 올라갈수록 바람의 세기가 점점 세지는 탓에 몸이 휘청휘청하더라. 중간 즈음 올라가니 수주버 직원이 갑자기 "선생님 빨리 내려갑시다!"라며 소리쳤다. 왜 그런가 물었더니 갑자기 지진이 생기면 어떻게 하냐고, 우리 다 죽을 것이라고 부들부들

떨며 소리쳤다. 약간 고소 공포증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래도 나는 아직 견딜만하다며 수주버 직원에게 조금만 더 올라가고 싶다고 이야기하고 조금 더 올라왔는데, 별안간 나도 갑자기 공포심이 들면서 내려가고 싶어졌다. 고작 계단 몇 개 더 올라왔을 뿐인데 바람이 갑자기 강하게 불면서 몸이 휘청이기에 바로 몸을 돌려서 수주버 직원과 헤어졌던 중간 지점으로 내려갔다. 고도가 어느 정도 높으니 풍경은 아주 멋졌다. 한쪽으로는 태양이 눈부시게 빛나면서 숲을 조망하고 있었고 한쪽으로는 Gampola 마을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풍경은 아주 아름다웠고 조금씩 더 올라갈 때마다 점점 바뀌는 풍경의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지만, 건물의 정상까지 올라가기는 너무 무서워서 적당히 올라가서 경치만 잠시 구경하다 바로 내려왔다.

 

ㆍ Ambuluwawa는 Kandy 도시에서 아주 동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어떻게 알고들 왔는지 외국인들이 꽤 많았다. 서양 사람들도 많았고 중국 사람으로 보이는 동양인들도 꽤 보였다. 나는 우연히 수주버 직원과 Google maps를 같이 보다가 알게 된 곳인데. 스리랑카에 2년간 있으면서 이런 장소를 들어 본 적도 없다. 교통편이 좋지 않아 그래도 다들 힘들게 그곳을 찾아왔던데, 나는 트리휠 기사 수주버 직원의 덕으로 쉽게 닿을 수 있었던 것은 참 좋았다.

 

ㆍ 수주버 직원과 Ambuluwawa를 보고 나는 Gampaha로 향했다. 시간이 늦으면 Gampaha에서 식사하고 하루 묵은 뒤 다음날 Horton Plains로 가려했지만 그리 늦지 않은 시간에 Ambuluwawa 관광을 끝내서 당일 바로 Gampaha에서 AC 버스를 타고 Nuwara Eliya로 향했다.

 

저번 주에 묵었던 호텔에 다시 체크인하며 못 갔었던 Horton Plains에 다시 도전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주인장님은 날 반겨 주시며 오늘도 현지인 가격으로 숙박을 할 수 있게 도와주셨다. 다행히도 다음 날은 날씨가 맑다고 말씀하셨다. 왕복 4,000루피 (약 28,000원)에 숙소에서 Horton Plains까지 왕복 예약을 하고 저녁을 먹으러 길을 나섰다. Nuwara Eliya에는 각국의 많은 음식점이 있는데 그중 Grand Hotel에서 운영하는 식당들이 가성비가 좋다고 소장님이 말씀해 주신 적 있다. 저번에는 Grand Hotel 내부에 있는 Grand Thai에서 식사했었고, 이번에는 Hotel 앞에 있는 Grand Indian에서 식사했다.

 

해외에 나와서 가장 좋은 것들 중의 하나는 각국 정통 요리를 현지의 맛으로 맛볼 수 있다는 것. 여태 먹어 본 카레는 한국식, 일본식으로 현지화된 것들만 먹어 보았는데, 스리랑카에서 진짜 본연의 맛을 가진 카레를 먹어 보는 등. Grand Indian에서는 버터 치킨 카레와 난을 시켜서 먹었는데 정말 맛있었다. 밥을 먹고 기다려지는 내일을 기대하며 잠에 빠져들었다.

 

ㆍ 아침에 일어나 조식을 먹고 그토록 고대하던 Horton Plains로 향했다. Hotel의 주인장님이 왕복 차량을 섭외해 주셨는데, 직접 보니 차가 8~9인승이나 되는 대형 Van이었다. Horton Plains로 향하는 길, 저번 주에는 안개가 자욱했었는데 맑게 갠 날씨에서 다시 보니 참 새로웠다. 탁 트인 전경에,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다행히도 오늘은 여권을 무사히 잘 챙겨 왔고, 현지인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입장료에 대형 차량 주차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700루피(약 5,000원) 면 충분했다. Horton Plains의 초입부터 주차장까지도 꽤 멀었는데,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에 커다란 사슴 한 마리가 나와 오고 가는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트래킹이 시작되었는데 아침 9시 정도였음에도 불구하고 햇볕은 강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아침의 이른 시간이었는데, 벌써 트래킹을 마치고 돌아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새벽 일찍 출발해서 일출을 보고 돌아오는 모양인 듯. 트래킹 순서는 Mini World's End, World's End, Baker's Fall로 총 세 시간 정도의 일정이었다. 날씨가 맑고 전망이 탁 트여 있어서 참 좋았다. World's End는 구름이 내 앞으로 왔다가 사라졌다 하면서 전망이 트였다가 걷혔다가를 반복했다. 참 예뻤다. 정말 가파른 절벽이었는데, 낙상 사고가 꽤 발생하였는지 철조망도 처져 있었다. 깎아지른듯한 절벽 끝에서 멀리 보이는 풍경, 참 좋았다.

 

그리고 넓디넓은 초원을 걸음걸음 가로질러 가면 Baker's Fall이 나온다. 한국에 있을 때는 이렇게 넓고 푸르고 한적한 초원을 걸어본 적 있었는가 싶었다. 마치 빨강 머리 앤의 앤이 마차를 타고 달리던 그 넓디넓은 초원을 실제로 만난 듯했다. 황홀하고 좋았다. 특히 넓은 초원. 사람 하나 없이 뻥 뚫린, 어딘가를 본다는 것이 정말 황홀하고 좋았다.

 

Baker's Falls는 살면서 여태 보아 왔던 폭포들과 크게 다른 것은 없었다. 그래도 폭포를 바라보며 앉아 있는데 스리랑카 학생들이 내 옆에 앉더니 돌아가면서 나와 사진을 찍기 시작한다. 나는 그냥 가만히 앉아 있는데 옆에 남학생과 여학생들이 번갈아 가며 앉더니 사진을 찍고, 심지어는 가족이 나를 중간에 두고 앉기도 하면서 자기들끼리 돌아가며 사진을 막 찍는다. 참, 황당하긴 했다. 사진을 찍어도 된다는 말도 안 했는데. 그래도 다시 한번 연예인이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트래킹을 잘 마치고 Ambawella에서 우유 한 잔, 셰이크 한 잔, 요구르트 하나를 맛있게 먹고 다시 Nuwara Eliya로 돌아왔다. 무려 1년 6개월을 고대했던 Horton Plains 트래킹을 이제야 이루어 내었다. 오랜 숙원을 해내었다는 사실이 참 뿌듯했다. 호텔에 돌아와 씻고 체크 아웃을 한 다음 Grand Thai 식당으로 향했다. 직원이 추천해 주는 메뉴를 몇 개 시켜서 리나와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3~4살로 보이는 아이가 내게 다가와 일본어로 말을 걸었다. 리나와 전화를 그만두고 아이와 몇 마디를 주고받고 있노라니 일본인으로 보이는 아이의 어머니가 다가왔다. 아이의 어머니와도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Kegalle에 살며 일을 하고 있다고 하니, 본인도 Ella라는 도시에서 살며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다고 하셨다. 이전에 일본 친구가 스리랑카와 관련된 일본 방송의 캡처를 보여주면서 '엘라'라는 곳에 일본인 여자가 살며 일본 요리를 판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는데, 그때 봤었던 바로 그 식당의 사장님이었다. 방송에서 봤다고 말씀드리니 놀라시며 참 좋아하신다. 명함 교환을 하고 식사를 마무리한 뒤 Hatton으로 가는 버스 정류장으로 가면서 Victoria Park도 잠시 들렸다.

 

ㆍ Nuwara Eliya에서 Hatton까지는 약 두 시간 반이 걸렸다. 요즘은 아주 머리만 붙이면 자는데, 버스에 올라 조금 자니 벌써 반 이상 목적지에 도착했더라. 버스에 앉아서 해지는 것을 바라보고 Hatton에서 동규를 기다려 만난 뒤 미리 알아본 숙소 Dick Oya에 있는 Princess of Dick Oya라는 숙소에서 체크인했다.

 

주변에는 우리가 먹을만한 음식점이 보이지 않았기에 Dick Oya에 있는 Jetwing Hotel 안에 있는 식당에 들어갔다. Jetwing Hotel은 내가 익히 아는 그런 호텔이 아니라, 마치 커다란 별장 같았다. 응접실과 독서실이 있고 식당은 대저택의 식탁 같았다. 길게 늘어진 테이블과 고급스러워 보이는 식기들이 가득했다. 식사가 가능한지 물었는데 외부인에게는 운영을 안 한단다. 꽤 오랜 시간 굶었다고 부탁드리니 특별히 허락해 주셨다. 단, 시간이 늦어 샌드위치밖에 안 된단다. 참치 샌드위치와 맥주를 주문하고 호텔을 둘러보았다. 고급풍의 저택 같은 느낌, 딱 그랬다. 전체적으로 붉은빛이 감돌았던 느낌이 기억난다. 샌드위치와 맥주를 맛있게 먹긴 먹었는데 무려 2,000루피[약 15,000원]나 냈다. 샌드위치 4조각과 감자튀김, 작은 샐러드 하나가 1,500루피.

 

밤 10시에 호텔에서 나왔는데, 완전 산길에 어두컴컴한 길을 걸으며 숙소를 찾아가는 게 정말 으슬으슬하고 무서웠다. 겨우 숙소를 깜깜이 찾은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심지어 숙소에서 가져간 안경이 선글라스라 앞도 잘 안 보여 숙소를 찾는데 고생했다. 숙소에 도착해서 씻고 다음 날 스리랑카의 명산 Sri Pada로 갈 준비를 했다.

 

ㆍ 원래는 아침 6시 정도에 일어나 밥 먹고 8시쯤에는 출발하여 9시쯤에는 산을 오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일어나는 시간도 1시간가량 늦고, 밥을 먹고 기다리고 짐을 맡아 줄 숙소인 Maskeliya도 들리고 하면서 시간이 꽤 많이 지체되었다. 그래서 무려 11시 즈음이 되어 출발할 수 있었다. 말로만 듣던 Sri Pada 등산. 과연 어떨까 하는 생각에 약간 긴장도 되었다. Sri Pada의 입구 격인 Delhouse에서 산길의 초입까지도 거리가 꽤 멀었고, 경사가 가팔랐다.

 

열대 국가의 일렁이는 햇볕을 받으며 악명 높은 산에 올라간다니, 긴장이 확 되면서 신발 끈을 고쳐 매었다. 산을 오르려 만반의 준비를 시작했다. 물을 사고, 초콜릿을 사고, 음료수를 사고, 빵과 간식도 잔뜩 사고. 그리고 동규의 걸음걸이가 너무 빨라서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하기도 전에 조금씩 지치는 것 같았다.

 

Sri Pada 산행길은 원형으로 빙 돌아서 정상으로 향해 가는 코스였다. 산 아래에서 아득히 Sri Pada의 정상이 보이는데 아주 까마득히 멀리 보였다. Sri Pada는 무려 5,500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단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눈앞으로 계단들이 정말 까마득할 정도로 가득했다. 오르고 오르다 보니 입의 침은 점점 말라가고, 동규의 속도를 맞추려다 보니 숨이 턱까지 가득 차는 기간이 매우 짧게 느껴졌다.

 

계단 하나하나가 높기도 높아서 다리를 쭉쭉 펴며 계단을 올라야 했다. 그 수많은 계단을 헉헉대며 오르는데 저 위에서 5~6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아이들도 씩씩하게 내려오고 있었다. 부모님을 따가 저 아이들도 어젯밤, 송골 땀을 흘리며 열심히 산행했었구나. 워낙 사람도 많고 산길이 길다 보니 계단 중간중간에 많은 사람이 쉬어가고 있었다. 우리가 물이나 간식을 먹을 때는 주변에 쉬고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씩 나누어 주기도 했다. 확실히 계속되는 계단을 오르다 보니 조금만 올라가도 경치가 시시각각 변했다. 꽤 많이 올라왔다고 생각했는데도 내려오는 사람들에게 정상까지의 거리를 물으면 아직도 한참 남았다며 으름장을 놓는다. 산 위에도 가게들이 꽤 많았는데 물건을 가져다주러 머리에 무언가 잔뜩 이고 산을 오르는 사람들도 많았다.

 

참, 대단했다. 나는 내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데 물건을 잔뜩 이거나 아이를 목에 태우고선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다들 참 대단했다.

 

조금 쉬고 다시 오르고, 다시 쉬고 조금 오르고, 그리고 빠른 걸음걸이의 동규의 속도를 맞추다 보니 생각보다 일찍 실길(Thread Road)에 올랐고 곧 Sri Pada 정상에 다다랐다. 그리고 부처님의 발자국이 있다는 사원으로 곧장 향했다. Sri Pada는 Adam's Peak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불교 신자들은 부처님의 발자국으로, 크리스트교 신자들은 St. Thomas의 발자국이 새겨져 있다고 믿는다. 불교와 크리스트교의 중간 즈음에 서 있는 나는 누구의 발자국인가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스리랑카 생활을 잘 마무리하게 도와주셔서 감사하다고 기도를 드렸다.

정상에서 풍경을 감상하며 쉬다가 빵 한 조각, 음료 한잔하고 현지인이 발라주는 기름을 발리고 바로 내려갔다. 내려가기 전 종을 치는 공간이 있는데, 본인이 여태 Sri Pada에 올라온 횟수만큼 치면 되었다. 나와 동규는 나란히 한 번씩 강하게 내리쳤다.

"뎅-" 하고 울리는 청량한 종소리가 귓바퀴를 맴돌고 스쳐 지나갔다. 독특하고 좋았다.

  

ㆍ 내려오는 길은 거의 달려오다시피 했다. 빨리 내려가서 집으로 돌아가 쉬고 싶었다. 매었던 배낭의 끈을 따라 어깨의 통증도 심했고, 산행은 올라가는데 2시간 30분, 정상에서 30분, 내려오는데 1시간 정도로 생각보다 이르게 산행을 끝내 버렸다. 계속되는 계단이라 내려오기는 정말 수월했는데 중간중간 쉴 때마다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1시간 만에 하산을 끝내고 다시 Maskeliya로 돌아가 짐을 찾고 Kottu로 간단한 허기를 채운 후 Kandy로 넘어가 Nihonbashi에서 저녁을 먹은 뒤 집으로 귀가했다. 앞으로 동규는 스리랑카에서 더 가 볼 곳은 없단다. 다 가 보았고, 이제는 가고 싶은 곳도 없고. 그래서 다음 주부터는 Kandy에 있는 British Council로 가 2달간 IELTS 집중 코스를 이수한단다. 나는 가 볼 곳이 아직 한참 남았는데.

 


 

파견) D+577 2020. 3. 6. (금)

 

<짜증 나는 순간들>

 

 ㆍ 일하다 보면 스트레스받을 때가 있다. 위계질서가 아니라 업무 협조와 속도. 마을에 태양광 발전 시설을 설치했는데 현재 사무실의 명의가 협력 관계에 있는 초등학교 교장의 이름으로 되어있어서 태양광 시설의 수익금이 발생하면 학교로 귀속되는 상황에 부닥쳤다.

 

당연히 학교에서 우리 조합으로 수익금을 이전해야 하는데, 이를 학교 교장이 거절했다. 어쩔 수 없이 행정적으로 이전 절차를 밟는데, 우리에게 익숙한 전자 문서 체계가 아니라 모든 공문을 우편으로 처리한다. 한 개의 문의를 하면 2~3일이 걸리는 것은 예삿일이고, 문의가 접수될 때까지 2~3일, 답변까지 2~3일, 답변이 다시 우리에게 도달하는 데까지 2~3일. 한 개의 민원을 해결하려면 기본적으로 일주일은 걸린다 생각하고 문의하여야 한다. 답변을 듣지 못하는 기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저 그들의 답변을 마냥 기다릴 뿐이다.

 

ㆍ 태양광 연결에 관해서도 무려 관련 수익의 20%를 학교 발전 기금으로 입금하라는 황당한 지시를 받았다. 그 돈은 고스란히 사업지 주민들 돈인데. 결국은 그 학교의 학부모들 주머니에서 나온 돈인데. 사업 주체가 외자이다 보니, 너도나도 어떻게든 자금에 욕심을 부리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 결국은 현지 학부모들의 돈을 학교가 가져간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지역 교육원장과 면담을 약속했다.

 

ㆍ 아주 친절하게도 3월 4일 오전 11시까지 본인 사무실로 오라고 원장님이 전화를 주셨고, 우리는 당연히 시간 맞추어 왕복 2시간 거리를 찾아갔다. 무려 선물까지 챙겨서. 그런데 웬걸 도착했더니 원장님이 부재중이라고 하신다. 본인이 불러서 왔는데, 왜 안 계시냐 물었더니 집안에 일이 생겨서 퇴근하셨단다.

정말 열불이 났다. 이게 무슨 예의인가 싶어서. 아버지가 위독하시단다. 물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방문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 '못 만날 듯합니다'라거나 최소한 연락을 해 줄 수 있지 않은가. 시간을 내서 Mawanella까지 갔어도 헛물만 켜고 시간과 에너지만 낭비한 채 다시 사업지로 돌아왔다.

 

내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안 되는 것들이 있다는데, 바로 이런 것들인가 보다. 아직도 이런 것들에 화가 나는 것을 보니 나는 아직도 스리랑카 사람이 덜되었나 보다.

 


 

파견) D+582 2020. 3.11. (수)

 

<스리랑카 북쪽 여행>

 

ㆍ 원래는 Haputale에 있는 Lipton Seat을 가려고 했다. 모처럼 생긴 삼 일간의 연휴라 가 보지 못한 동쪽 바다도 보고, 저번에 뵈었던 이성희 선생님과 Ella에 위치한 At Bistro에 들릴 생각이었다. 퇴근하고 집에서 휴식한 뒤 11시 넘어서 Rambukkana에서 Haputale로 출발해서. 아침 5시에 도착하면 일찍 Lipton Seat에 돌라 일출을 볼 생각이었다. 이왕 가는 것, 일등석을 한번 타보자는 생각에 1주일 전

Polgahawela 역에 가서 예약 신청을 했다. 참고로 스리랑카는 Online / Offline 다 예약은 가능한데, Offline에서 예약할 수 있는 역이 사업지에서 멀지 않아서 확실히 예약하기 위해 역을 들렸다.

예약하러 Polgahalewa 역에 들렀는데 웬걸 벌써 매진이란다. 심지어 다음날 첫차도. 꼼짝없이 버스를 타야겠구나 싶었다. 나오는 길에 열차 시간표를 잠시 보았는데 야간 기차로 Jaffna를 갈 수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언젠가 Jaffna는 꼭 가 보아야지 생각했는데, 버스는 소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싫었고 마침 Colombo 공항에서 경비행기 취항을 시작해 1시간 30분 안에 Jaffna에 도착할 수 있다기에 경비행기를 탈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기차역에서도 Jaffna로 갈 수 있구나. 게다가 Mannar, Trincomalee, Batticaloa 등 한 번쯤 둘러보고 싶었던 장소 모두가 야간 기차로 연결되어 있었다. 참 큰 행운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쉽게 어디든 갈 수 있겠거니 생각했다. 이번 Haputale 행 기차는 예약하지 못했지만 이런 정보를 알게 된 것도 아주 큰 성과이다. 

그러다 Ampara에 계신 이성희 선생님께 연락을 드렸다. 이번 주말 한 번 찾아봬도 되냐고 여쭤보았다. 그런데 아직 콜롬보에 계신다고 하셨다. 그럼 굳이 동쪽 Ampara 쪽으로 향할 이유가 없어져서 급히 Jaffna행을 계획했다.

 

ㆍ 금요일 아침에는 KOPIA를 들리려 Kandy로 향했다. 오랜만에 KOPIA 최인후 소장님을 뵙고 KOPIA 스리랑카 센터를 소개해주시는 강의를 듣고 같이 중식집에서 식사했다. 새로 온 KOPIA 인턴 두 분도 만났는데 실질적인 대화는 한 마디도 못 나누었다. 박병규 소장님과 같이 시범 마을을 방문하고 저녁에 맥주 한 캔을 같이 한 뒤 10시쯤 되는 늦은 시간에 길을 나섰다. Rambukkana 역에서 트리휠을 타고 Polgahawela 역으로 가서 표를 사고 기다리니 사람이 가득 찬 기차가 왔다. 문 바깥으로 사람들이 잔뜩 매달려 있는 만큼 만차였다.

 

설마 저 기차인가 싶었는데 그건 Badulla행 기차이고 Jaffna행 기차는 다행히도 승객이 적단다. 과연 그럴까 했는데 정말 승객이 적어 바로 좌석에 앉았고 나는 북쪽으로, 또 북쪽으로 나아갔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노라니 어느새 잠에 빠져들었다. 그것도 무려 7시간을 기차 좌석에서 푹 자버렸다. 중간에 새벽바람이 추워 한 번 깨고, 누군가 닭을 들고 기차에 올랐는지 해가 뜰 무렵에는 닭이 계속 울어대는 바람에 중간중간 깨기도 했다. 그래도 푹 자고 일어나니 Jaffna역에 도착해 있었다. 짐을 챙겨 밖으로 나서니 이미 해는 떠 있었고, 시간은 7시 즈음이었다.

 

ㆍ Jaffna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으니 이전에 추천받은 숙소로 걸어가며 무얼 할지 보았다. 대충의 계획을 세우고 나서 풍경을 보는데 참 아름다웠다. 어찌 된 일인지 거리에 매연은 심하지 않았고 도로도 깨끗했다. 싱할라 글자는 전혀 보이지 않고 사람들의 말투도 확실히 달랐다. 추천받은 숙소에 도착했지만, 그 숙소는 만실이었고 대신 그 옆의 숙소에 짐을 풀었다. 아침을 먹을 수 있는지 물어보고

 

Delft Island는 어떻게 가냐고 집주인에게 물었다. 그러더니 Delft Island에 가려면 벌써 늦었단다. 마지막 버스가 있는데 그걸 타려면 지금 출발해야 한다며. 그 말을 듣고 빨리 짐을 푼 뒤 아침도 못 먹고 버스를 타러 나섰다. 실제로 Delft Island로 가는 배를 타려면 Jaffna에서도 북쪽 끝 선착장으로 이동해야 하는데 Jaffna 시내에서 선착장까지는 약 1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배는 8시 30분, 9시 30분으로 하루 딱 2번만 운행을 한다고 했는데 8시 20분에 시내에서 버스를 타면 아마 9시 30분 배는 탈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급하게 버스를 탔는데 교통 체증도 심하고 버스는 왜인지 섰다 멈추기를 반복했다. 스리랑카 북쪽의 인도양을 가르며 섰다 멈추기를 반복하는 버스 안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참 인상적이었다. 바다는 가두리 양식을 하는지 대나무 대가 가득 세워져 있었고 수심은 참 얕아 보였다.

 

곧 선착장인 Kurikadduwan까지 도착했다. 예정 시간보다 약 10분 늦게 선착장에 도착한 탓에 배는 이미 떠나고 없었는데, 심지어 오늘은 Delft Island에 Tamil 축제가 있어서 사설 배도 운영을 안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13시 30분 즈음이면 Delft Island로 갈 수 있는 배를 탈 수 있다고들 하는데 그 시간까지는 무려 4시간가량이 남아 있었다. 선착장에서 서성이는 한 가족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Delft Island가 아니라 Nagadeepa라는 섬으로 가서 잠시 시간을 보내고 13시 30분 즈음에 Delft Island로 가는 건 어떠냐고 제안한다. 알았다고 대답하고 Nagadeepa 섬으로 향했다.

  

ㆍ 섬은 절 / 모스크 / 교회 / 힌두 사원 등이 모두 있는 종교를 위한 공간 같았다. 절은 익숙해서 이것저것 대충 둘러보고 있는데 어떤 여자아이가 내게 오더니, 부처님께 공양하라며 꽃을 몇 개 건네준다. 그 꽃을 부처님 불상 앞에서 공양드린 뒤 사람들 기도하는 모습을 조금 보고 힌두 사원으로 향했다. Trincomalee에 비하면 별 특별한 것은 없었지만 사원에 들어갈 때 남자는 윗옷을 벗으라고 했다. 부끄럽긴 했지만, 윗옷을 벗고 한 번 돌아다녀 보았다.

 

13시 30분 즈음에 Delft Island로 들어가려 다시 선착장에 도착했지만 웬걸 오늘은 들어갈 수는 있지만, 다시 나올 수는 없단다.

또 어긋났다. 내일을 기약하며 다시 돌아가려는데 잠시 나를 잡더니 사설 배를 탈 수는 있단다. 그래서 배에 올랐는데 한 5분 즈음 달리더니 기계가 고장 나 더 이상 못 간다며 다시 항구로 돌아왔다. 나는 다시 버스를 타고 시내로 돌아왔다.

 

ㆍ Jaffna 시내의 유명한 식당인 Mango로 가서 음식을 시켰다. 남인도 음식은 잘 몰라서 직원의 추천을 받아 주문했는데 무려 1시간이 지나서야 사이드 메뉴 1개가 나왔다. 아마 주문의 착오가 있은 듯. 그래도 어젯밤부터 계속 움직였기 때문에 푹 쉬었다고 생각했다. Jaffna에 들르는 동북아 사람이 많이 없는지 밤을 기다리는 와중에도 어디서 왔는지 묻거나 사진을 찍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뒤늦은 아침 겸 점심으로 양파 튀김, 남인도식 국수, 라씨를 먹은 후 주변 힌두 사원을 하나 더 보고 그 유명하다는 Rio Ice Cream 가게로 향했다. 정말 사람들이 미어터질 듯 많았고 아이스크림 배식구 앞으로는 사람들이 본인의 영수증을 들고 무질서하게 서 있었다. 가격은 한 Scoop에 50루피 정도로 꽤 싼 편이었는데 나는 300루피의 아이스크림을 주문했다. 바깥 날씨가 워낙 더워서 시원하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큰 맛은 느끼지 못했다.

 

ㆍ 오늘의 끝은 일몰을 보는 것으로 Dutch Fort로 향했다. Rio Ice Cream부터 Dutch Fort로는 걸어서 이동했는데 노을이 살짝 지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점점 평화로워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우리나라 순천에 온 느낌. 건물들의 높이와 모습 하며 바다를 낀 곳에서 일몰을 볼 수 있다니. 행복했다. 남국의 어느 곳에서 일몰을 보며 걷는다는 것이.

Dutch Fort는 외국인 입장료가 750루피였지만, Residence Visa를 인정받아 20루피만 내고 들어갔다. 아름답게 떨어지며 바닷속으로 얼굴을 숨기는 해를 바라보고 저녁을 먹으러 Jetwing Hotel로 향했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음식은 없고 맥주 한잔할 수 있는 자리도 마땅찮아서 Jetwing North Gate Hotel로 다시 자리를 옮겼다. 일정 시간에는 맥주 한 잔에 200루피, 갈증을 달래 줄 아이스티가 120루피라고 했다. 음식은 못 먹을 것 같아 시원하게 맥주와 음료를 비우고 숙소로 돌아와 쉬었다.

 

ㆍ 진드기가 있는지 발 부분이 계속 간지러웠다. 중간에 몇 번이나 깨고 옷을 입어가면서 겨우 잠들었다. 다음 날은 6시부터 일어나 다시 Delft Island로 향했다. Kurikadduwan 선착장에는 8시에 도착했는데 오늘도 또 배가 없단다. 이게 웬 날벼락인가 싶었는데도 계속 기다렸다. 어찌 된 일인지 배는 왔고 약 1시간가량 해군 함정을 타고 Delft Island로 이동했다. 원래는 트리휠을 고용하여 돌아다니려 했는데 앞에 가는 서양 여성분에게 부탁하여 트럭 투어에 합류하게 되었다. 스위스에서 오셨다는 유럽 할머니들과 같이 돌아다녔는데 가끔 말도 걸어 주시면서 같이 여행했다. 어차피 섬은 갈 곳이 정해진 관광지였고 크게 볼만한 것은 없었지만 Delft Island의 동부 쪽에 있는 Delft Beach는 정말 아름다웠다. 이전 대항해시대 게임을 하며 모니터 속으로 보았던 에메랄드빛 바다가 눈앞으로 펼쳐졌다. 참 예뻤다.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넓게 펼쳐진 에메랄드빛 파장을 보며 한참이나 감탄했다.

 

원래 숙소 체크 아웃을 11시나 12시 즈음하려 했지만 본 섬으로 복귀하는 배편이 무려 오후 14시 30분에 있다고 했다. 다행히도 우리 일행은 개인 보트를 예약했고 그 덕에 14시에 배를 타고 나와 유럽 할머니들의 차량까지 얻어 타고 숙소에 거의 5시가 다 되어 도착했다. 씻고 나와 아주 늦게 체크 아웃을 한 뒤 다음 여행지를 골라야 했다. 원래는 Point Padro로 가서 일몰을 감상할까 생각했었는데 벌써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고 그쪽으로 가기는 벌써 늦어서 그냥 Jaffna에서 조금 더 위에 위치한 Kankesanthurai로 향하기로 했다.

 

다음날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의 시발역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근처에서 근처에 바다가 있는 것이 좋았다. Kankesanthurai로 향하는 마지막 버스는 약 1시간 이후에 있다기에 버스 정류장 근처에서 급하게 밥을 사 먹고 마지막 버스에 올랐다. 약 1시간을 달리니 Kankesanthurai에 도착은 했는데 미리 보아둔 군인 Hotel은 이미 만실이었다. Kankesanthurai 주변에는 마땅한 숙소도 없거니와 1박에 4,000루피 정도로 가격도 아주 저렴했는데, 만실이라니. 참 아쉬웠다. 그래도 Hotel 주인의 소개로 주변에 있는 숙소를 수배해 주었고 밤은 그곳에서 묵었다. 2,600루피에 방도 꽤 널찍했다.

 

ㆍ 푹 자고 일어나 타밀식 조식을 먹고 Kankesanthurai 바다를 구경한 뒤 기차를 타고 내려왔다. 돌아오는데 무려 9시간이나 소요되었다. 스리랑카 북쪽 여행은 처음이었는데, 참 인상 깊었다. 같은 스리랑카이지만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파견) D+584 2020. 3.13. (금)

  

<문화 차이>

 

ㆍ 저번 주 금요일 KOPIA 스리랑카 센터에 방문했더니 우리에게 버섯 파리 방제 스티커를 가져다주셨다. 꼭 필요했던 물건이라 감사히 받았다. 우리 마을 버섯 재배사에는 버섯 파리가 많아 언제 병을 옮길지 모르는 상태였기에 꼭 필요한 물건이긴 했다. 그래서 얻은 부착 스티커를 재배사에 설치해보려고 하는데 그것을 유심히 보던 수주버 직원이 설치를 반대한다. 아무래도 불교 국가라 그런지 살생은 지양하는 모양이다. 지금은 파리가 많은 시기라면서 가능한 버섯 파리를 살려 두고 방제 스티커를 붙이는 '나쁜 짓'을 하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우리가 힘들게 키운 버섯에 해를 끼칠 수 있는 파리를 방제하는 것이 '나쁜 짓'이라니.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참 황당했다. 나는 우리 버섯의 생육을 위해 당연히 '좋은 일'이라 생각했는데 다른 사람의 눈에는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행위로 인식될 수 있다는 것에.

 

하지만 조금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여태 여기 주민들도 방제약을 정기적으로 뿌리는 등 방역 작업을 하긴 한다는 점이다. 그런 논리라면 암세포도 생명이라 치료를 하면 안 된다는 논리가 되는데, 이건 생각과 문화의 차이이기에 누가 결코 옳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ㆍ 사실 따지고 보면 지금의 삶과 한국에서의 삶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 있을 때도 매일 음악을 듣고 글을 쓰고 컴퓨터를 만지고 사람을 만나고. 그것들이 사실 전부였는데 여기는 그 삶에서 운동하고 출퇴근하고 정기적인 월급을 받는다는 차이점이 있긴 하지만 별다른 차이점은 없는 듯하다. 이런 것을 보니 내 삶은 세계 어느 나라에 가든 크게 달라지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24년이란 세월 동안 내가 그저 해온 것은 책을 읽거나 컴퓨터의 자판을 두들기거나 영화나 드라마를 보거나 글을 쓰거나 하는 것 따위밖에 없었으니까. 한국에서의 단조로웠던 삶은 이역만리 타지에 와서도 크게 변하지는 않았고 사실 세계 어느 지역에 가든 크게 변하는 것은 없을 듯하다.

 


 

파견) D+591 2020. 3.20. (금)

 

<또다시 귀국>

 

 ㆍ 스리랑카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환자가 점점 증가하기 시작했다. 새로이 알게 된 사실이 있는데 스리랑카에서 이탈리아에 그렇게 많이 이민 간다고 했다. 30만 원만 지불하면 스리랑카에서 이탈리아까지 왕복 비행기 표를 구할 수 있기 때문에 스리랑카 일반인 기준으로도 그렇게 부담되는 금액은 아닌 듯하다. 휴양지로 알려졌기 때문에 유럽이나 러시아 등지에서 이 스리랑카를 자주 찾아오기도 하고. 그런데 얼마 전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된 이탈리아 여행자가 스리랑카를 여행했고 별안간 그 여행자를 가이드해 주었던 가이드들이 양성 판정을 받았다. 이내 스리랑카는 뒤늦게 비상사태에 돌입된 듯 보인다. 머지않아 공항을 폐쇄하였고 선별 진료소와 격리 시설을 마련하였다.

 

여행 가이드를 시발점으로 감염은 점점 확산하기 시작하였고 공공 / 민간 부분 모두에 자택 근무 명령이 내려왔다. 아무 이유 없이 동양인에 대한 혐오 감정이 확산하였고 나를 비롯 우리 단원에게 '코로나바이러스'라고 조롱하거나 시비를 거는 사람들도 있었다.

 

ㆍ 저번 주에 단원들끼리 외식을 하러 Kandy에 잠시 들렀는데 택시를 기다리는 사이 트리휠 기사들이 우리에게 자꾸 조롱하는 바람에 결국 작은 싸움까지 벌어지고 말았다. 그만큼 동양인에 대한 분노 표출이 조금씩 있는 상황이었다. 외출할 때 마스크를 항시 휴대해야 했고, 우리 재단 역시도 자택 근무를 명 받았다. 수요일부터 자택 근무를 진행했는데 재단에서 선제 조치로 조기 귀국 신청도 받았다. 일단 동규와 나는 귀국을 하지 않겠다고 대답했지만, 왠지 조만간 귀국 명령이 떨어질 것 같았다. 이내 통행 전면 금지 명령이 떨어졌고 재단에서도 전 세계에 나가 있는 모든 단원을 대상으로 일시 귀국 조치를 취했다.

 

예감이 맞았다. 그래서 오늘부터 항공권 수배가 시작되나 보다. 우리는 일단 한국으로 대피한 뒤 최장 60일까지 상황을 지켜보고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한 달간의 심의를 거쳐 최종 파견 종료 조치를 받을 것 같다.

스리랑카의 현 상황만 보자면 사실 60일 이내에 상황이 그다지 나아질 것 같지는 않다. 의료 시설이 그다지 뛰어난 상태도 아니고, 감염자는 점점 늘어날 뿐이니까. 실질적으로 7월 말까지가 우리 계약 기간인데 4월에 복귀하며 최장 60일간 본국에서 대기하다가 돌아온다고 한들 큰 의미가 있을까 싶다. 실질적으로 우리 계약 기간은 종료라는 뜻이다. 마음의 준비를 어느 정도하고 가야 하지 않을까.

 

ㆍ 사실 아주 당황스러운 부분도 있다. 결코, 내가 바라고 그리던 스리랑카 생활의 마무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준비'고 '인사'고 '마무리'고 그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나는 이 땅을 곧 떠나게 생겼다. 이다음 이어지는 '일본'이라는 도전까지 꽤 많은 시간을 확보하긴 했지만 하던 것을 확실히 매듭짓지 못하고 떠나는 사실을 꽤 쓸쓸하고 가슴 아프다.

 

ㆍ 4월부터는 나는 진짜 '글'이라는 것을 써 볼 작정이었다. 수필이건 시이건 산문이건 어떤 형태든 간에 블로그에 게시하거나 라디오에 기고하거나 하면서 글을 쓰는 연습을 하며 미래에 대한 고민을 찬찬히 해 보려 했다. 사실 지금에야 나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생활은 힘들지만, 결승선이 코앞이라 더 견딜 수 있을 것만 같았고, 미칠 것 같던 외로움은 이제 반쯤 포기 상태로 해소되었고, 최근에는 꾸준히 운동도 하면서 체력도 어느 정도 올라온 상태이고. 유유자적하며 이 생활을 마무리하려 했던 나의 계획은 산산이 부수어져 버렸다.

 

ㆍ 사실 돌아가는 것은 큰 문제가 안 된다. 동규와 할머니 집에서 2주간 자가 격리를 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 짐을 정리하려 나의 지난 생활을 하나둘씩 되돌아본다. 좀 더 부지런하고 기민했다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과 후회가 남는다. 그래 일단 지금은 나만 생각하고 앞으로 나갈 길을 준비하자. KOICA, JICA, Peach Cops 등 대부분 국제 원조 기구들이 다들 철수를 후딱 해버리는 것을 보니 우리의 귀국도 조만간임을 실감한다.

 


 

파견) D+594 2020. 3.23. (월)

 

<귀국 날짜 확정>

 

ㆍ 스리랑카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자들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90명이 넘는 숫자가 감염되었다. 스리랑카는 저번 주 수요일부터 계속하여 통행금지령을 내렸다. 그 뜻은 아예 집 밖으로 출입이 불가하다는 뜻이다. 아예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 나가도 열려 있는 가게 하나 없으며 경찰들이 경비를 서고 있는 탓에 깜빡 잘 못 걸리면 바로 구속이 된다고 했다. 이번 주말은 그냥 잠자코 집에만 있었다.

 

ㆍ 오늘 오전부터 다시 통행금지가 해제되었다. 은행에 넣어 놓은 루피화를 찾으러 DFCC Bank로 향했는데 은행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하는 방법 없이 Commercial Bank에서 하루에 찾을 수 있는 최대 통화량인 50,000루피를 인출하고 부리나케 사무실로 가서 직원들에게 업무 인수 / 인계를 한 뒤 급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 14시부터 또 통행금지가 발효되었기 때문이다. 물건도 제대로 사지 못하고 집에 와서 급하게 수주버 직원을 자택으로 귀가시켰다. 수주버 직원은 우리 집에서도 자택까지 거리가 꽤 멀기에 조금 서둘러 귀가시켰다. 집으로 돌아오니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배는 고프고 잠은 오고 숨은 잘 쉬어지지 않고 가슴은 답답하고. 별안간 귀국 항공편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원래는 28일 Emirate 항공을 타고 도하를 거쳐 인천에 떨어질 예정이었지만 Emirate 항공이 급작스럽게 25일부터 운휴를 선언하는 바람에 4월 1일 Qutar 항공을 타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정확히 10일 이후면 한국으로 가는구나.

 

ㆍ 아쉬운 것들도 물론 많이 남는다. 그래도 스리랑카에 씨앗을 많이 뿌렸는데. 어느 정도 자랐나 확인도 못 하고 급하게 돌아간다는 것. 24개월이라는 결승선을 코앞에 두고 포기해야 한다는 점. 그리고 해외에서 생활하며 휴가다운 휴가를 제대로 한 번도 즐기지 못하고 떠난다는 점. 일에 관해서도 후임이 올 수 있을지 확실치 않은 현 상황에서 벌여 놓은 일을 확실히 끝맺음을 못 하고 가는 것들

 

은 아쉬움이 남는다. 앞으로 조합 자체로 운영되기 시작할 텐데 잘 운영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어느 정도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스리랑카를 떠난다는 사실을 알렸다. 이렇게 저무는 걸까, 나의 첫 해외 생활은.

 

 


파견) D+600 2020. 3.29. (일)

 

 <스리랑카에서의 마지막 밤>

 

 ㆍ 통행금지로 인해 자택 격리된 지 무려 14일째이다. 내일이면 한국으로 귀국이다. 급하게 소장님께 넘겨 드릴 각종 인수 / 인계 서류를 작성하고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은 채 무려 보름을 견디고 다시 밖으로 나간다. 집에만 있으니 딱히 할 것도 없고 입맛도 안 돌고 우울한 마음도 어느 정도 생기는 찰나. 나는 간다, 모국으로.

 

한국행이 결정되고는 시간이 조금 지났지만 그새 내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일단 일본행 교환학생에 합격했다. 1 지망인 츄오 대학, 2 지망인 히로시마 대학이 아니라 3 지망인 후쿠이 대학에 합격했다. 적어도 히로시마 대학은 합격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곳으로 나는 떠나게 되었다. 물론 스리랑카에서 계속 시골 생활을 했었기에 어느 정도 도시 같은 곳에서 생활하고 싶다는 생각은 계속 가지고 있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그냥 결과에 수긍하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올해 10월부터 일본 후쿠이현의 대학교에서 1년간 수학하게 되었다.

 

ㆍ 그리고 한국에 들어가면 다시 자가 격리를 2주일가량 해야 한다고 한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지금의 집보다 훨씬 더 좁은 곳에서 생활해야 하는데 무척이나 막막하다. 무려 14일간 다시 격리해야 한다니. 그렇게 되면 나의 2020년 중 1달은 그저 격리하다 보내는 셈이 된다. 어찌 되었든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더라고 순탄하게 지나가진 않을 듯하다.

 

ㆍ 다시 스리랑카로 돌아올 수 있을까, 그건 의문이다. 지금 상황으로 보아서는 사태가 언제 종식될지는 모르는 일이고. 아마 다시 돌아올 기회가 그사이에 생긴다고 한들 그냥 나는 한국에 남아 있고 싶다. 무슨 마무리랄 것이 거창하게 남은 것이 없어서 지난날은 털어놓고 이젠 다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려 한다.

 

ㆍ 600일간의 스리랑카 인턴 생활, 기윤아 참 고생 많았다. 그리고 나는 이 600일간의 생활을 덧없이 사랑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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