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를 놓치고 수면 아래로 돌아가는 자라가 아가미를 연다. 깊은 호흡.
어떤 노래에 빠지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질릴때까지 그 노래만 들어야 하는 경주마 리스너다. 이번 스페인 여행을 준비하며 비행기에서 들을 사운드트랙을 준비할 때 박주원씨의 앨범은 말뭐다. 특히 2018년 발매된 앨범 <the last rumba>의 2번 트랙인 'Eurasia express'는 집시 기타에 가야금과 해금, 판소리의 콜라보로 독특하고 실험적인 구성인데 오묘하게도 마음이 몽글해지고 눈물이 맺힌다. 은근한 모험심이 들면서도 후반부로 갈수록 애잔함이 스며드는 것이다. 뒤늦게 안 사실은 이 곡에 포함된 유태평양의 판소리곡은 별주부전으로 알려져있는 <수궁가>라는 곡의 초반부 한 소절인데, 자라가 주변 걱정을 딛고 세상 밖으로 나가는 내용의 소절이라고 한다. 토끼 간을 찾으러 떠나 이역만리의 이방인이 됐는데, 막상 토끼에게는 간이 없단다. 있고 없을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일단 믿어봐야 속았다는 걸 아는 게 삶이다. 나도 자라다. 이유 없이 눈물이 맺힐 리가 없다. 머리로는 모를지언정 귀와 감정은 알고 있었을지도.
해묵은 감정을 털어내고 정돈하는 정화의 시간을 보내고 첫 주말. 나는 이전 두 번의 스페인 방문에서 가본 적 없는 도시로 향한다. 언어는 중상, 문화도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있는 나는 이 곳에서 완벽한 이방인이 될 수 없다. 그리하야 간절히 낯선 시간을 만나고싶었다. 내 걱정과 번민은 모두 생각 밖으로 밀어낼 수 있도록, 오직 이 도시에서의 살아남음만 생각할 수 있도록 말이다.
떠나는 날, 살라망카 버스 터미널 매점의 오징어 튀김 샌드위치(bocadillo con calamares)를 꼭 먹고싶었다. 포스팅 많은 맛집이 아니라 오롯하게 나만의 노스탤지어가 담긴 식당. 10분을 기다려야 조리가 가능하단다. 오징어 튀김 샌드위치는 꽤나 인기가 없었구만? 10년 전 여기를 떠나며 먹은 마지막 맛으로 애틋한 기분을 느끼며 떠나고싶었지만 어쩔 수 없다. 하몽과 치즈가 든 샌드위치로 차선을 갈아탄다. 노스탤지어 탓이라고 생각했던 감칠맛이 확실한 맛이 되는 순간이다. 아, 이집 샌드위치 원래 맛있었구나. 향수건 뭐건 일단 기본기가 있어야 아름다운 여운이 남는구나, 하며 조근히 웃는다. 동행인 남자친구는 모를 일이다.
살라망카에서 마드리드, 마드리드에서 그라나다로 향하는 여정. 직항 비행기나 직통버스가 없는 날이라 굳이 마드리드 남부터미널을 거친다. 경유시간 잠시 근처의 엘 꼬르떼 잉글레스(국내로 치자면 롯땡백화점 정도)에 들러 눈이 나갈것 같다던 남자친구의 선글라스를 급구하고 다시 버스에 오른다. 여기까지 두시간 반, 지금부터 다섯시간을 버스 안에서 버텨야 하나 스페인에서는 버스에서의 긴 여정도 흥미롭다. 게임 안에서나 볼 듯한 대평원과 구릉지대, 그라나다에 가까워지면 만나는 눈 덮인 시에라 네바다 산맥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이리도 후덥지근한 남부 도시에 설산이라니.
중부 스페인과는 확연히 다른 이국적인 정취에 이글대는 날씨. 아랍의 무드가 물씬인 거리와 건물은 한켠의 설렘을 가져온다. 언어가 어려운 연인과 나는 이미 뭉근하게 경험한 중부의 기억에서 벗어나 경험해보지 못한 새 도시의 기억을 쌓는다.
그라나다는 명실상부 알함브라 궁전의 도시다. 계획없이 엉성하게 알함브라 티켓만 달랑 들고 온 연인은 블로그를 따라 K관광을 시작한다. 블로그에서 본 것처럼 알함브라 궁전은 아름다웠다. 꽤나 신기하고 이색적이었지만 왠지 모를 쓸쓸함이 관광하는 시간 내내 졸졸 따라다닌다. 스러진 권력의 화려함은 어쩐지 허망하고, 애잔하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도시에서 꽤 멀고 높이 존재하는 궁전에서 권력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과연 또렷이 들을 수 있었을까.
스페인 남부에서 음료를 하나 시키면 무료 스몰디쉬가 나오는 가게를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다. 피곤한 연인을 굳이굳이 설득해 근처의 레스토랑으로 향한다. 스페인 여행기를 보면 대부분 하몽이나 쵸리소가 흔하다만 의외의 킥은 야채 요리다. 유럽 요리 중 한국인에게 가장 물리지 않을 것이 스페인 요리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깔끔하고 담백하고 시원하고 칼칼한 맛을 원하는건 K유전자라면 라면보다 야채 요리를 추천. 치즈와 하몽으로 기름에 절여진 나의 소화기관을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다.
그라나다는 굳이 맛집이랄걸 따로 찾을 필요가 없다. 전라도는 기사식당만 가도 맛있는 것과 흡사하다. 길을 걷다 우연히 마주한 맛과 공간은 오롯한 나와 연인의 기억이 된다. 구글맵으로 평점 4.0 이상을 찾아 1시간을 헤매도 찾을 수 없는 근사한 기억의 맛이다.
그렇게 짤막한 그라나다 여정을 뒤로 하고 마요르카 섬으로 간다. 3배속으로 흘러갔던 퇴사 전의 시간을 원래 속도로 늦춰야겠다며 악마같은 일정 속 굳이굳이 끼어놓은 휴양지. 굳이 외식을 하기보다는 식재료를 구입해 편안하게 집에서 만들어먹자며 아파트먼트를 예약했다. 직원도 호스트도 없는 작은 콘도같은 숙소는 여느 고급 호텔보다 편안하다. 급박하게 진행됐던 퇴사 인수인계와 스페인 본토에서의 타이트한 여정에 명치를 꽉 막고있던 숨을 조심스럽게 제 숨으로 내쉬어본다.
토끼의 간을 찾아서 수면 위로 떠올랐지만 겨우내 잡은 토끼를 데려가니 간을 두고왔다나. 도망가는 토끼의 뒷모습을 보며 속았다는 것도 깊게 믿어보니 알았을 따름이다. 어쩌면 뭐. 꼭 필요하다면 다시 뭍으로 나와 토끼를 잡고 배를 갈라 치료약을 만들 수도 있겠지. 토끼가 필요할지는 모를 일이다만. 토끼를 뭍에 두고 수면 아래로 돌아가는 자라가 숨겨둔 아가미를 열어 편안하게 호흡한다. 회복의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