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외들이 만드는 근사한 낭만의 순간, 여행
마요르카를 떠나 바르셀로나로 향한다. 유학 시절에는 거의 약 1달 정도, 두 번째 스페인 여행때는 3일 정도를 머무른 곳이라 대략 루트를 알 법 하다. 빤하다. 가우디 투어, 미식 투어. 나는 충분히 알고 즐겼지만 상대는 모든 도시가 첫 번째인 여행. 홀로 여행이 아닌 동행이 있는 여행에서는 서로의 기분에 영향을 크게 받기 마련인데, 나의 심드렁함에 그 또한 흥분이 반감될 수 밖에 없다.
먹고 마시고 놀기 최적인 마요르카의 콘도를 떠나, 물가가 비싼 바르셀로나의 숙소는 작은 호스텔의 2인실 더블룸이다. 비교급 숙소가 생겼기 때문에 이번 숙소는 괜시리 더 별로처럼 보인다. 게다가 안 그래도 짧은 2박 3일의 일정에 우리는 귀국 시 필요한 pcr 검사, 아울렛 방문 등등 여러 스케쥴을 도장깨듯 지나야 한다. 그나마 맛집이나 카페를 전혀 찾지 않은 게 유일한 숨통이었을지도 모를 일. 심드렁한 동행, 타이트한 스케쥴, 여행의 끝자락에 있다는 묘한 우울감이 연인 한 쌍을 파도처럼 덮친다.
5시경 바르셀로나에 도착해 공항 피로회복제로 유명하다는 스페인의 '포텐시에이터'를 비장하게 들이킨다. 2주를 넘은 이번 여행의 여정 중 가장 빡센 스케쥴이다.
시내에 도착하자마자 아이코스를 사고, 마요르카 여행 내내 부르짖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꿀꺽대며 마시고 보니 해가 저물어간다. 한국에서 재밌게 봤던 여행 유튜버가 들렀던 바르셀로나의 작은 바를 가고싶다고 얘기하자 내 연인은 선뜻 가보자고 한다. 그는 다크서클이 눈 크기만큼 내려와있다. 마요르카부터 바르셀로나까지 캐리어와 기내용 숄더백이 너무 무겁다며 칭얼대던 내 투정에 자동으로 반나절 짐꾼이 되었던 탓이다. 그는 산미구엘 생맥주를 맛없게 홀짝이며 "스페인 와서 하루도 맥주를 안 마신날이 없다"고 자조 섞인 멘트를 던진다. 나는 속으로 말한다. 너 그거 한국 돌아가면 더 마시지 못한 자신을 저주할거야. 그러니 양 넘치게 마시고 먹어두거라. 철 없는 연인이다.
다음날은 분주한 날이니 억지로 눈을 꾹 감아본다. 내일은 북부 버스터미널로 이동해 근교 아울렛에 들렀다가 다시 시내로 돌아와 pcr을 받으러 클리닉에 갔다가 빠에야를 먹어야만 하고, 저녁엔 연인이 그토록 가고싶다던 야경맛집 '벙커'를 가야한다(혹은 그래야만 한다고 했다).
의도치 않은 맥락에서 여행의 의미는 더욱 빛난다. 이틀차 바르셀로나의 재미는 아울렛의 노상 카페에서 이게 맛있겠냐며 주문했지만 접시까지 먹을 기세로 끝낸 닭가슴살 샌드위치가, PCR 클리닉에서는 담당의가 "너 몇살이니? 와 3학년이었어? 되게 예쁘게 생겼다(시선은 주관적이니까 그럴수 있다)"에서, 먹못알 연인이 뒤적뒤적 찾은 레스토랑이 여태껏 방문해본 모든 바르셀로나의 식당 중 최고의 빠에야집인 데 있었다. 이방인은 잘 모르기 때문에 운이 좋다.
숙소에 잠시 들러 한시간이라도 쉬자고 들어갔다만 빡빡한 스케쥴의 하이라이트를 치고 나자 연인을 사귄 4년간 최초로 "나 좀 쉬어야겠는데, 안 가면 안될까"라는 얘기가 내 입에서 나온다. 그러자 내 연인은 4년 역사 최초로 "꼭 가고싶은데, 진짜 못 일어나겠으면 나 혼자갈게"란다. 웬만한 관광지에 심드렁이었던 이 친구가 이정도로 얘기하는 걸 보면 내 다리가 부러졌을지언정 가야만 하는 곳이다. 야경이 다 거기서 거기지, 하는 속마음을 요리조리 감추며 지금부터 2번의 환승, 약 1시간이 걸리는 여정에 다시 오른다.
몸은 고단하고, 환승도 많고, 게다가 약간의 트래킹까지. 독과 짜증이 있는대로 오른 나는 연인에게 날것의 감정을 마구 드러낸다. 감정노동을 하던 내 연인과 씩씩거리며 오르던 나는 언덕 끝에 다다라 벙커의 벽을 넘어본다. 그리고 그 곳엔 바르셀로나 로컬인 양 한껏 심드렁 하던 나를 산산조각내는 환상의 세계가 있다.
남산타워 꼭대기층의 통돌이 레스토랑(아직도 이름을 모르겠다. 홀이 회전하며 360도 서울 야경을 즐기는 프로포즈 명소란다)을 갔을 때도 동네 야경이 뭐 특별하냐며 심드렁하던, 야경이 다 똑같지 뭐 별거냐며 툴툴대던 나는 없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야경이 있고 경험하지 못한 내 감정이 있을 뿐이다. 세상 웬만큼 살았고 다 안다던 30대 중반의 시건방이 바삭하게 부스러진다.
여정 내내 독기 오른 짜증을 부린 나를 향한 마음이 찌그러졌을법도 한데 연인은 도시 너머를 보는 나를 뒤에서 꼭 안았다. 거리가 제 집 안방인 양 여럿 연인들이 딥 키스를 해 대도, 에헴거리며 거리두기를 지키던 경상도 유교보이가 벙커의 무드에 완전히 함락되버린 엄청나게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나를 꼭 안고 있는 연인은 작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어제 그는 피곤에 푹 절어있던 채 굳이 내가 가고 싶다던 타파스 바에 가서 억지 미소를 지어가며 산미구엘 생맥주를 마셔주었는데, 같은 상황인 나는 왜 그가 원하던 여정을 이리 복잡하고 어렵게 함께해주었을까. 내 마음은 이리도 작고 부족한데 네 마음은 왜 이리 아름다울까. 상상도 못한 낭만의 밤이다.
숙소 근처의 바에서 맥주를 먹고 들어가자던 가열찬 계획은 저질 체력으로 무산됐다. 터덜대며 호스텔로 향하는데, 숙소 앞 줄서먹는 아이스크림집이 11시가 넘은 시간에도 불이 켜져있다. 맥주 대신 근사한 맛의 젤라또를 냠냠대며 돌아가는 밤. 비로소 감각의 축제다. 생각대로 되는 게 없는 하루인데 생각지 못하게 찾은 즐거움이 많다.
스페인을 떠나는 비행기에서 나는 아래의 긴 메모를 남겼다.
여행의 의미는 무어고, 돌아간 나는 어떤 일상을 살아야 하는가. 보통 떠나는 의미는 무엇가에서 벗어남이고 돌아감은 복귀인데 난 무엇에서 떠나와서 무엇으로 돌아가는가?
난 떠나온곳이 없고 돌아갈 곳도 없다. 도망치듯 회사를 그만뒀으나 여행길로 도망한것은 아니고,
집과 가족이 있지만 그곳이 응당 돌아갈 곳이라 정할수는 없는 법이다. 방금 비행중에 본 영화 ‘모아나’처럼 고인 물에 계속 머무를수는 없다. 사람은 모두 항해자(voyager)이기에.
내 삶에서 잠시 16시간 거리의 어떤 섬에 머무른 것이다. 10년 전에 온 곳이라 항로를 알고 있기에 어려울 건 없다. 오래 머물던 도시를 다시 와보자니 꽤나 지루할거라 생각했는데 낯설게 보기는 꽤 효과가 있었고 내가 모르던 시선을 배우는게 좋았다. 매일을 여행하는 사람처럼, 일상을 그렇게 살아내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건 어떻게 의미를 부여하는가의 차이다.
여행은 지리한 일상의 리프레시라 하고, 다시 건강하게 일상으로! 라는 클리셰가 있잖나. 그렇다고 여행이 일상의 리프레시정도로 치부된다면 여행이 너무 아깝다. 세상에 내가 모르거나 느껴보지 못한 아름다움이 너무 많다는 점, 안될까 싶은 게 해보면 어찌되는 다 된다는 것.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다 사람 사는 동네고 기본적으로 모든 인간은 선하다는 것. 살과 뼈와 감각으로 부딪히며 배운 수많은 예외들과 예측 불가능한 순간들은 더 오랜 시간 내게 남게된다. 여행은 내가 익숙함에 고여있어 미처 느끼지 못했던 감각을 깨워주는 영감의 산실이었다. 내게 찾아온 번아웃이 이해가 되는 맥락이다.
이번 여행에서 '스페인을 다녀왔다'라는 사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내가 스페인에서 보낸 시간의 궤적이 내게 어떤 에너지와 기억을 남겼는지, 내 삶에 어떤 맥락을 만들었는지일 것. 20대 시절 스페인 유학을 떠나온 시간은 아스라한 기억으로 존재하나, 통념과 편견으로 꼭 닫혀있던 나를 활짝 열어 준 그 시간은 남은 내 여생을 더 깊이있고 역동적으로 흐르게 만들었다. 지금의 여행은 마치 점을 찍듯 재미있고 신비한 여러 추억들을 지니고 있지만 내가 과거의 유학시절을 기억하듯이 10년 후에는 백사장 모래마냥 반짝이는 아련함으로 남을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 그린 궤적이 내 남은 시간에 또 어떤 의미를 줄런지 지금은 알 수 없다. 다만, 기대를 안고 시간이 흐르게 두고 볼 일이다.
1편
2편
3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