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방지축 어리둥절 빙글빙글 돌아가는 차알못의 초보 운전기
차를 사려고 면허 딴 사람, 나다. 본래부터 닥치지 않으면 미리 무언가를 준비해두는 성실한 준비러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기에 차를 살 생각도 돈도 없었던 나는 굳이 면허가 필요 없다 생각했고, 이력서에서 '자격증'에 그 흔한 '2종 보통' 하나 기입하지 못했던 사람 그게 바로 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친구나 친한 친구들 중에 감사하게도 차주들이 많은 관계로 뽈뽈거리며 잘만 돌아다니고 살아왔다고 한다.
그러던 서른 둘의 어느 날, 집돌이인 남자친구와 밖순이인 나는 '왜 너는 당최 어디 나갈 생각을 안하나'로 몇 분을 투닥이다가 문득, '아, 내가 스스로 외출욕을 쉽게 해결할 수 없으니 차주인 연인에게 칭얼대는가?'라는 별 무게 없는 깨달음이 들었는데 이 사소하고 가벼운 깨달음은 아주 쉽게 나를 강남면허시험장으로 보냈고 1년간 남자친구의 강습 끝에 드디어 늦깎이 면허 소지자로 만들어 주었다. 그리곤 1년 후 차를 산다는 계획 하에 엽떡, 뿌링클을 반으로 줄여가는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하며 드디어 소형 suv의 차주가 되었다. 너튜브나 포털에 수많은 더 그레이트 드라이버가 초보운전 꿀팁과 아름다운 주행 강습 영상은 너절하다. 면허 경력 2년차. 주행 경력 반년 차에 접어드는 이따위 경력의 초보 드라이버가 말하는 전쟁터같은 도로 위에 대하여, 그리고 차도 위에서 느낀 점에 대해 몇가지 감상을 읊조려보겠다.
1. 아 왜 나 30줄에 운전시작했지
위에서도 말했듯 나는 차주인 친구에게 빌붙거나 연인에게 빌붙거나 한 민폐 뚜벅이였다. 차도 없는 주제에 다소 게으른 성격이라 걷기는 싫고 택시는 돈 아깝고(답노..) 한 못난이였는데 운이 좋게도 뽈뽈이 밖순이 밖돌이 친구들이 많았고, 연인 또한 내 역마살에 잘 맞춰주는 타입이라 이렇듯 저렇듯 살아왔었다.
막상 차가 생기고 보니 '아 내가 이 좋은걸 왜 이제야 누리나'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서울은 대중교통도 택시도 뭐도 너무 잘 되있으니 물론 괜찮다. 하지만 이것은 너무너무 이상적인 이야기. 주말에 근교는 나가고싶은데 지하철에서 고생하기는 싫다거나, 햇볕이 좋아 밖에 나가고싶은데 32도에 육박하는 한증막 찜통에서 지하철까지 걸어가다 쓰러질까 겁나는 태양인이라거나, 냉장고가 텅 비어서 빨리 뭘 채워야할 것 같은데 마트에서 뭘 잔뜩 사들고 오는 여정을 견딜수가 없다거나, 내일 급발진 벙개여행을 떠나고싶은데 구린 시간대(출발 9:25PM 이따위 티켓)밖에 남지 않았다거나 등등(너무 많지만 생략) 이 모든 불편함을 해소하고 나의 게으름을 끝내 이겨내 확실한 밖순이가 될 수 있다는게 장점. 물론 차가 있기 때문에 밖에서의 음주량과 급벙개 빈도가 줄어들어 술비가 줄어든다는 아름다운 장점까지 겸비했다.
2. 목표와 계획이 있다면 어디든 갈수있어
보통의 운전자들은 일시납 일부, 나머지는 할부로 돌리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H사 가족찬스로 일부 할인을 받았고, 뼈와 살 그리고 내 영혼까지 다 뜯어 시원청량하게 일시납으로 해결한 케이스다. 자, 여기부턴 자산 상황에 따라 완전히 케바케로 해석되지만 카푸어가 꿈이거나 영정사진을 촬영하고픈게 아니라면 일시납 50%까지는 어떻게서든 꼭 모아라. 나머지 할부금은 본인의 수입상황에 맞게(너무 부담되서 차 산걸 땅치고 후회하지 않을) 월납 수준으로 설정하면 된다. 돈은 어떻게 모으냐고? 목표를 세우고 역산하면 된다.
드림카를 지금 당장 내 두눈앞으로 가져올 상황이 아니라면 자산 범위에서 적당한 차를 목표로 잡고, 예산을 역산해 적금을 들기 시작하면 된다. 차를 산다는 게 너무 무겁고 어른의 일로 느껴져 목표조차 잡을 생각도 못했던 20대의 내가 살짝 후회스럽기까지 할 지경인데, 정말 별 것 아닌 이야기지만 '목표설정과 예산 준비'를 하기 시작하면 달성은 하늘이 무너질정도로 어렵지 않다. 아. 그리고 나는 가족 찬스가 아니라면 중고차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새차플렉스가 초년생 시절의 인생 버킷리스트가 아니라면 중고차는 가성비상 너무 좋은 옵션이다(이 쪼그만 땅덩이에 차가 이렇게 많은데 굳이 또 새 차를 굴러다니게 하는게 과연 이득일까 하고 생각했더랬다) 그리고 자동차 견적 상세가 궁금하다면 각 회사의 홈페이지에서 온라인 견적을, 가까운 영업점에서 견적을 내보고 나 이제 진짜로 살꺼야!!! 싶다면 여러 지점을 방문해 견적을 뽑는게 좋다고 한다. 영업 직원분에 따라 제안하는 혜택 범위가 다르다고 하니 역시 발품이 답이다.
3. 유지비는 한번에 와당탕 나가는게 아니었고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그리고 사실 차커뮤니티에서 차를 평가할 때 예비 차주들(특히 나처럼 차알못들)은 극히 생소한 '유지비'라는 어마무시하게 부담스러운 용어가 나오는데..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고 유지비 총액은 와당탕쿠당탕 '한꺼번에'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점을 명심하자. 내가 운전하는 소형 SUV는 휘발유 만땅이 6만, 자동차세는 30만, 보험료는 100만 가량이 소요되는데 기름값이야 어차피 시내 운전이기때문에 한달에 만땅 두번 정도, 자동차세는 연에 2번으로 걸쳐 나눠 내고, 보험료는 1년에 한 번 내지만 신용카드 분납이 가능하니 '어마무시한 비용 쓰나미가 몰려온다!!!'의 수준은 아니었다는 점을 얘기하고싶다(물론 내 예산과 수입기준에 어느정도 들어오는 차를 샀을 경우일때다!!!!). 나눠 낸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지나간 지출은 쉽게 잊혀지기 마련이다.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보험료 나가는 달은 커피값 엽떡값 자라옷값 술값 좀 줄이면 충분히 감당 가능한 수준이라는 점도 얘기하겠다)
나는 슬프게도 차가 생긴 뒤 지금(알뜰주유소 1700원대)이 가장 싼 기름값인 불운의 초보운전자다. 기름값 무시 못하고, 자동차세 무시 못하고, 연 100만원의 보험료 무시 못하고, 차 옆구리 긁어먹어 수리비 진짜 심장살 찢어진다. 높은 유지비에도 불구하고 차무새가 된 이유는 위에서 말한 내 이동반경이 두배 이상으로 넓어졌다는 것과 부모님, 친구, 연인을 데리고 내가 원하는 곳으로 원하는 시간에 이동할 수 있다는 가치는 이 유지비보다도 훨씬 높은 가치를 매기고 있기 때문이다.
4. 차 온다는데 뭐 해야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응 설명 안해줌ㅋ
일단 차는 질렀는데 딜러에게 산 게 아니다보니 이후의 과정이 막막했다. 한창 계획적 인간모드로 살 때여서 더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그 부담이 고스란히 스트레스가 되어버렸다. 뭔가 명쾌하게 정리된 자료를 찾지는 못해서(너튜브로 찾아봤는데 긴 영상들을 다 보고 앉아있을 인내심이 없었다) 나의 경험을 아래에 써보자면
1. 차를 계약한다(계약금을 낸다 난 10만원이었음)
2. 기다린다 인내한다 택배아저씨보다보고싶다 언제나오냐며 발을 구른다 기다린다
3. 탁송지로 차 받기(워후!!!!) : 나는 신차패키지(썬팅+블랙박스+신차검수+벤츠우산 뭐 기타 등등..) 영업점으로 바로 받았음. 잘 모르고 알아볼 시간이 부족하면 그냥 호갱이 되는게 가장 마음이 편하다.
* [생소한말] 신차검수 : 단차이가 있는곳은 없는지 물이 새는곳은 없는지 문제없는 기능은 없는지 돈내고 확인받음 영업점 상황마다 차이가 있지만 썬팅까지 의뢰할 경우 보통 2~3일 정도 걸린다함
4. 잔금을 납부한다(=진짜 카푸어가 된다) : 카드 할부건 일시납이건 계약금을 제외한 남은 금액을 딜러에게 납부한다. 내 경우에는 계약서에 기입된 비용이 딜러의 계산오류로 살짝 잘못되 비용이 아주 살짝 올라가 담당자와 험한말이 살짝 오고갔는데 견적서와 계약서는 진짜 신중하게 확인할것을 권장한다.
5. 자차 보험을 든다 : 보통 여러 업체들에게 견적을 내보고 비교한 뒤 진행하는 게 통상적. 난 H직원찬스니 H사 보험으로 함. 요즘엔 운전자보험도 디폴트값이라고 하니 참고하시고...
6. 차량 등록 취득세 지불 번호판 부착 등등 : 딜러에게 수수료(통상 5~10만원, 협상에 능하면 서비스도 가능하다 들었다)를 지불하면 알아서 척척 해 주시고, 본인이 어려우실 경우에는 대행업자에게 연결해준다. 어차피 많이 질렀으니 조금 더 보태서 전문가에게 맡기는것을 추천. 알아서 신차검수중인 업장으로 번호판이 가면 내가 차를 받을 땐 번호판과 차량 등록까지 완벽하게 끝난 어려움리스 차를 받을 수 있었다.
7. 차에 밥을 준다 : 보통 새차를 받을 땐 기름이 0인 상태는 아니지만
주유구 조작법, 뚜껑 돌리는 법, 주유 하는 법 등등은 가족 혹은 친구의 도움을 받길 바란다. 휘발유 차에 경유 넣는 사람 꽤 많다고 한다.
8. 우리집으로가자
9(선택) 1시간에 한번씩 차 구경하러 왔다갔다를 반복한다.
이렇게 너저분한 여정이다. 혼자 머리싸매고 끙끙대지말고 운전자가 가족 혹은 연인 중에 있다면 한우 대접드리고 적극 도움을 청해라. 난 괜히 혼자 공부한다고 들이댔다가 정수리에 흰머리가 우수수 자라났다.
5. 일단 차 받고 운전 쫌 해보고 쫌쫌따리 과소비
친구 모 씨는 차 받을날이 임박하자 받기도 전 핸들커버 시트커버 목쿠션 쓰레기통 음료거치대 폰거치대 공기청정기 방향제 뭐 거치대 휴지통 진짜 영혼끝까지 끌어모아모아 차량용품을 다 사놨는데 내부가 좁아 쓰지도 못한 채 반은 당근했다는 슬픈 전설이 있다.
본인의 경우 #나차뽑았다의 기쁨과 무드를 한층 업그레이드해주는 새 차 냄새는 하루면 족해 평소 좋아하는 브랜드의 방향제와 폰번호판을 가장 먼저 샀다. 그러다가 쿠션, 사탕, 비상약품, 마스크, 휴지, 물티슈를 넣어두고, 매우 비좁은 주차장에서 투쟁하다보니 몇번 긁어먹은 관계로(...) 긁은 후 컴파운드(혹은 차딱!) / 카페인트(외장 컬러 번호는 운전석 문 열어 사이 차체에 있음), 차량용 걸레와 세척액을 구매했다. 캠핑이나 야외 활동을 워낙 좋아하는지라 점점 뭐가 많아지고 있는데 이렇게 사후 켜켜이 과소비를 쌓아가는 방법이 카푸어 통장 관리에 매우 유익하다는 점을 기억하자.
+ 그리고 이왕 과소비하는김에 이왕 평소 사고싶던 안경도 하나 사자. 야간 운전을 할 때는 빛번짐이나 차간거리가 잘 느껴지지 않을 수 있어 꼭꼭꼭꼭 추천. 렌즈를 끼는 분이라면 야간엔 단백질이 올라와 시야가 흐려질 수 있으니 인공눈물이나 점안액을 구비하시고.
6. 도로위의 선배님들은 생각보다 자상하시고 넌 너의 길을 가라 배움의 길은 멀고 험한 것
내 차를 끌고 처음으로 도로 위로 나갔을 때 나는 위에 첨부한 '주행연습 일단 죄송합니다'를 매직으로 써붙이고 다녔다. 도로 민폐드라이버인거 알지만 실력을 계속 민폐로 둘 수 없고, 아니 그리고 선배님들 다 초보시절은 있었자나여...?(긁적)
고작 반년 운전한거가지고 생색 좀 내보자면 운린이들의 가장 큰 실수는 '망설임'이 아닐까 싶다. 끼고싶은데 룸 나온거같은데 서울의 성격급한 선배님들은 자신의 길을 빵빵쌩쌩 달리시니 깜빡이만 하염없이 깜빡대며 좌우로 망설임 댄스를 추는 일이 허다하다. 나 초보 왕따시만하게 붙여뒀는데 왜 양보 안해주셔...이런 못된 선배님들....이라고? 자 직장의 일을 생각해보자. 일이 추진이 되야 하는데 키잡이가 결정을 못하고 우왕좌왕한다면 팀원들도 같이 우왕좌왕이다. 나라는 초보 빌런 PM 하나가 도로의 평온을 왈칵 헤집어놓을 수 있다는 말이고, 도로 위의 모든 혼란 상황은 생명과 직결된다. 모든 운전자들은 자기 차의 PM이다. 끼어들기를 해야할 때 깜빡이를 넣고 차간 간격이 날 받아버리지는 않을 속도와 내 차 길이의 3배정도 들어갈 수 있는 간격이라면 머리를 넣어볼 용기. 물론 내 판단이 틀렸을 수 있지만 그것은 선배님들의 크락션으로 후두려 맞아보며 배워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과도한 용기는 큰 화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에 서울 근교의 차 없는 도로에서 거듭 거듭 연습해보길 권장한다. (난 아직도 빌런이고 무명의 선배님들은 나를 강하게 키우고 있다)
7. 조수석 여포 선생님
솔직히 이건 운전자 가족 혹은 지인 혹은 연인의 성질에 따라 매우 케바케일수 있다만(운전 강습받다 헤어지는 사람도 있다니까...), 꼭!!! 꼭꼭!!!!! 운전에 능한 누군가와 연습해 볼 것을 추천한다. 보통 운전연수를 받는 경우 자신의 출퇴근길이나 자주 가는길목 외에는 익히기가 쉽지 않은데, 6개월동안 운전하면서 가장 도움이 됐다고 느껴졌던 건 댕빡센 운전선생인 내 연인의 조수석 잔소리였다. '아빠 잔소리 싫어서' '연인한테 받다가 내가 더 화가났다' '옆에 앉아 윗 손잡이 잡고 오! 우웤! 거리는 꼴이 심히 거슬린다' 등등 여러가지 고통이 수반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통 운전은 혼자 할 때가 많기에 옆에 신뢰하는 누군가가 있고 지도해줄수 있다는 것만으로 너무 귀중하다. 맨날 연인이 잔소리 랩과 '오! 우웤!' 을 시전하는 1인 초과의 운전을 하다 처음 1인분으로 혼자 출퇴근길을 오고갔을때 굉장히 무서웠다. 그럼에도 우회전, 좌회전, 유턴, 끼어들기, 고속도로, 시내주행, 골목운전, 야간운전 등등은 시간이 날 때마다 연인과 함께 도전했고 뼈가되고 살이되고 용기가되는 마법을 경험하게 된다.
[번외] 초보운전 스티커
아름답고 귀엽뽀짝앙큼뽀얌한 초보운전 스티커는 널리고 널렸는데, 내가 선택한 기준은 일단 ''가시성'과 '절박함'이 카피에 잘 드러나는가'였다. 귀염뽀짝앙큼뽀야미 폰트와 이미지와 뭐 이말저말이 다 들어간 스티커의 경우 가장 중요한 '나는 위험한 존재다'의 의미가 정확히 전달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냥 '초보운전'이 심플한 고딕으로 써있거나, 도로가 심각하게 무섭고 경험이 부족해 선배님들의 관용이 특히나 절박한 경우에는 A4용지에 '오늘 첫운전''주행연습' 등을 짧고 크게 써붙여 달리면좋다. 정공법과 심플은 만고불변의 진리.
특히나 새싹들에게는 절박함이 중요한데, 결과적으로 내가 '주행연습 일단죄송합니다'를 A4에 써 붙이고 도로 위를 절면서 기어 다녔을 때 약 90%의 선배님들이 내 앞뒤로 끼어주지 않으시거나, 나를 피해주시거나, 차간 거리를 과하게 충분하게 달려주시거나, 크락션을 덜 울려 주셨다. 당연하게도 내 운전 실력에 단단히 화나신 선배님들이 종종 크락션을 때릴 때도 있다. 일단 '아 내가 잘못했구나'를 깨닫고 당황하거나 놀라지 말고 세모 모양 깜빡이를 눌러 죄송한 마음을 전하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