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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비맨의 장르영화 Feb 03. 2017

B급 영화로 황제가 된 로저 코먼[1부]

허상을 현실로 만든 영화의 황제

지난 2000년 전주국제영화제에 나타난 로저 코먼의 등장은 영화팬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만들었으며 그 자신도 시종일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 가독을 위해 본문에 가급적 영화 제목은 배제하며 서술했습니다.


2009년 그동안 배우나 감독들에게 전해지던 아카데미 주관의 가버너스 시상식에서 감독보다는 제작자로 더 유명한 로저 코먼이 평생공로상을 수상했다. 공교롭게도 이날 시상자는 매 내놓는 작품마다 B급에 대한 애정 과시를 녹여놓는 쿠엔틴 타란티노였다.

과연 그가 어떤 인물이었기에 이 무거운 상을 받을 수 있었을까.


[로저 코먼 Roger William Corman]


1947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영화계에 뛰어든 로저 코먼은 스토리 분석가, 각본가의 과정을 거쳐 자기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공식적 데뷔작인 <바다의 마루로부터 Monster From The Ocean Floor, 1954>는 앞으로 그가 숨 가쁘게 뛰어갈 운명의 도로를 만들 기초 자재였으며 결코 영화로 만들어낼 수 없을 것만 같은 상상의 산물들을 스크린에 옮기기 시작했다.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외모만큼이나 괴측하고 강한 개성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리얼리티를 강조한 영화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조악한 특수효과를 사용해 캐릭터들의 비주얼을 형상화했다. 현대에서 정석으로 논하는 B급 영화의 모양새는 로저 코먼의 스타일에 가까우며 [영화+B+로저 코먼]은 일종의 랜덤 공식이 존재하지 않는 방정식이나 마찬가지다.


200여 편이 넘는 영화를 제작, 연출한 그의 작품들은 결코 정석에 구애받지 않았고 망망대해에 있는 수많은 종의 어류들을 낚듯 쉴 새 없이 소재들을 끌어올려 공장처럼 영화를 양산해냈다. 자신이 손을 댄 영화들의 제작 시스템을 완전히 바꿔놓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제작현장에서 벌어졌다.

엉성하고 조악한 세트에 배우들을 욱여넣고 NG는 결코 허용하지 않았으며 이영화 저 영화에서 사용한 소품들을 재활용했다. 심지어 기존에 있던 영화 필름들을 자신이 순식간에 촬영한 필름에 이어 붙여 완전히 다른 제목의 새 영화로 개봉하는 일도 있었다.


[영화 <그것이 세계를 지배했다 It Conquered The World, 1956>]


그가 얼마나 빠른 속도로 영화를 찍을 수 있는지 실험해보기 위해 만든 <공포의 작은 상점 The Little Shop Of Horrors, 1960>은 불과 하루 반 만에 촬영을 끝냈으며(3일 또는 2일 등 다양한 설이 존재하지만 어찌 되었든) 역시 기존의 다른 필름을 기워내어 새 영화로 만들어낸 것이다. 심지어 계약 기간이 남은 감독과 배우들을 한 영화에 번갈아가며 작업을 했다. 기간이 남은 감독이 연출을 하다 계약기간이 끝나면 곧바로 다른 감독이 이어서 연출하는 식이었다.


*명감독인 피터 보그다노비치는 데뷔 시절 <타켓 Targets, 1968> 연출 당시 기이한 일을 경험했다. 계약 기간이 이틀 남은 보리스 칼로프와 이틀간 촬영을 하고 남은 기간 동안 그가 출연한 작품에서 40여분의 필름들을 골라내 촬영분과 연결하여 장편영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로저 코먼의 천부적인 사업가(또는 연출가) 재능은 이런 식으로 톱니바퀴 굴리듯 터무니없는 영화들을 만들어냈으면서도 손해를 본 일이 거의 없다는 것에서 증명된다. 

구두쇠 제작자로 악명을 떨치긴 했지만 수익적 결과물을 보고 나서는 그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그에게 혹평을 가할 수 있는 이들은 비평가들 뿐이었다. 200편 이상의 영화를 제작하고 90편 이상의 영화가 흑자를 기록했으며 1948년 연방법원의 판결로 인해 쇠퇴 할 것만 같았던 마이너 영화계를 호황으로 끌어올리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당시 10대들이 즐길 문화적 혜택이 없었다는 것을 직관한 로저 코먼의 뛰어난 선견지명 덕이었다. 로저 코먼이 손을 댄 영화들의 대부분은 폭력적이고 육감적이며 저돌했기 때문에 10대들을 자극하기에 손색이 없었다. 딱히 데이트 코스라 할만한 곳이 없었던 10대들이 찾았던 여가지가 바로 드라이브 인 스크린이었고 이 저급한 영화들은 자동차 극장에 걸리기 딱 좋았다.


로저 코먼이 이렇게 후세에도 각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창조에 대한 열린 마인드가 강했기 때문이다. 제작비에는 인색했지만 감독과 제작진의 아이디어나 창조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절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오히려 독려했다. 그의 모토는 '원하는 대로 찍어라'였다. 

그의 철칙은 이러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제작비 10만 달러를 넘기면 안 돼. 그리고 중간중간에 섹스를 연상게 하는 장면과 폭력적인 장면을 반드시 삽입해야 돼. 그 외에는 어떤 식으로 찍어도 좋아."


하지만 로저 코먼이 손을 댔던 영화들이 죄다 저급하거나 한 번 보고 버릴 영화는 아니었다.

영화사에 남을 수작들도 분명히 있었고 이 작품들은 새로운 혁명을 일으켰다.


-2부에서는 로저 코먼의 60년대 이후의 행보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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