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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awrithink Oct 26. 2021

창작가를 위한 도구들

2021년 10월 견문록

능서불택필(能書不擇筆)

초등학생 때 이 고사성어를 보고 '앞으로 내 좌우명으로 삼아야지-' 했던 시절이 있었다.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의미. 당시 만화 그리기를 좋아하던 나는 300원짜리 플러스펜으로 만화를 그리며 도구를 가리지 않는 명화가가 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20년이 지난 지금은 상황이 많이 변했다.


취미는 역시 '장비 빨'이지

'장비 빨', '템빨'과 같은 은어를 여러분 모두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처음에는 뒷 산 올라가면서 에베레스트 등반하는 사람을 풍자하며 과한 장비를 갖춘 사람들을 비꼬아 일컫는 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요즘 세대에게 장비빨이란 고가, 고품질의 장비에 대한 만족도를 내포하고 있으며 특정 브랜드에 대한 애정 또한 몇 스푼 들어가 있는 단어로 이해된다. 어떤 취미를 시작하고자 할 때, 사람들은 장비 탐색을 즐기며 도구를 사용하고 소비하는 것 자체에서 즐거움을 느낀다. 월간 견문록 10월호에서는 창작과 취미생활을 위한 장비를 주제로 글을 써보았다.


Helinox × Leica

명장과 명장의 만남

얼마 전 '장비 빨'을 위해 Leica D-lux 7 모델을 구매했다. 180만 원이라는 이 카메라의 가격은 똑딱이라는 동일 스펙상의 제품들 중에서는 놀랄만한 가격이지만 '라이카'라고 하면 어느 정도 수긍되는 가격이다. 그리고 D-lux 7은 라이카 카메라 제품군들 중 가장 저가 모델이며, 그다음 단계 모델의 가격이 700만 원대를 호가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면 대부분 이 카메라의 가격에 대해 함구하게 된다.

나의 D-lux 7

나는 이 제품을 굉장히 만족스럽게 사용하고 있다. 기존 Fujifilm의 X-Pro 2를 약 3년간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 카메라의 감성과 결과물은 3년 동안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고 렌즈를 교체하는 재미도 한몫했지만 결과적으로 세컨드 카메라를 들인 이유는 무게기동성 때문이었다. 조금 더 빠르게, 간편하게, 적절한 품질의 결과물을 얻을 수 있기를 원했고 D-lux7은 그 요구를 만족스럽게 맞추어주었다.

Leica D-lux 7으로 촬영한 사진들

하지만 구매한 지 한 달 뒤, 나는 엄청난 소식을 접하게 된다.

캠핑 퍼니쳐 브랜드 헬리녹스(Helinox)와 명품 카메라 Leica가 스페셜 에디션을 발매한다는 소식이었다. 이 에디션에는 앞서 말한 Leica D-lux 7 (혹은 상위 모델 Q2), Artisan&Artist의 카메라 스트랩, 헬리녹스 택티컬 라인의 카메라 파우치, 택티컬 체어가 포함된다. 가격은 260만 원. 자, 구매 의향이 생기는가?

내가 생각했을 때 좋은 브랜드 콜라보레이션은 각 브랜드가 가지고 있는 장점과 장점이 면밀히 교차하여 기대하고 있는 만큼의 시너지를 내거나(ex. 애플과 에르메스의 합작), 혹은 완전히 생각하지 못한 조합으로 기대 이상의 임팩트를 주는 것(ex. 곰표와 세븐브로이 맥주의 합작). 전자는 품질 면에서 큰 만족도를 줄 것이며, 후자는 마케팅적으로 성공하여 소비자들에게 각인되는 예가 될 것이다. 둘 중 하나이다. 두 브랜드가 각각 매력적이더라도, '굳이 얘네끼리 왜 합작을..?'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면 그것은 좋은 콜라보레이션이 아니다.

 

출처 : HCC

라이카와 헬리녹스의 콜라보레이션은 브랜드 명성과 더불어 기동성이라는 요소가 잘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다. 

캠핑과 카메라 두 가지를 모두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정승민 디자이너가 출연한 브랜드 필름을 보았을 때 무게에 구애받지 않고 공간을 이동하며 영감을 찾아다니는 나를 상상할 수 있었다. 최근 캠핑 트렌드 색상을 의식한 듯 올리브 그린 컬러가 주를 이루고 라이카 붉은 원형이 포인트로 붙었을 때의 조화는 구매욕구를 자극한다. 정승민 디자이너가 영상 속에서 말하는 한마디가 나의 가슴속에 와닿았다. "영감은 받는 것이라기보다, 능동적으로 찾아내야 하는 대상" 기막힌 영감에도 장비빨이 작용할까? 영감을 위한 여정에 이 정도의 장비는 합리적일 수도 있겠다.


Point of View (POV)

'다꾸' 하려면 이 정도는 갖춰야

얼마 전 드디어 여의도 더현대에 다녀왔다. 인파를 피해 평일에 방문하니 구경에 몰두할 수 있었다. 성수동에서 시작되어 더현대에 두 번째 터를 잡은 문구점 '포인트 오브 뷰(Point of View)'는 수많은 브랜드 중 인상 깊었던 공간이었다.

월넛 빛깔의 목재 가판대가 진중한 분위기를 더했던

사실 문구는 항상 우리의 가까이에 있었다. 지금은 더 이상 쓰고 있지 않지만 고등학교 때까지 나는 기록에 충실한 사람이었고, 그 행위는 내 학창 시절의 성실함과 노력을 증명하고 싶은 조용한 발악이었는지 모르겠다. 손 때 묻은 여러 개의 다이어리는 버릴 수 없는 나의 보물이 되었다. 나에게 문구점이란, 무언가를 시작할 때 준비운동처럼 가던 곳이고, 살 것이 없어도 기웃거리고 싶고, 어떠한 규칙이 있는 것처럼 색깔별로 정리되어있는 개체들이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했던. 그런 공간. 그리고 문구점에서 풍기는 사각사각한 향.

만지고 싶은 지우개
잘 정리해놓으면 다 있어 보여

POV에서 취급하는 문구류는 이런 향수를 가진 세대를 겨냥한 것 같다. 어른이들을 위한 문구점이랄까?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옹기종기 멋들어지게 놓여있는 도구들을 보면 소유하고 싶은 기분이 한껏 든다. 좋은 안목을 가진 예술가의 서재를 몰래 구경하는 그런 느낌을 준다. 이곳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영감이 샘솟는다. 기록하며 영감을 얻는 사람을 위한 각별한 물건. 구매하지 않더라도 박물관 구경하듯 둘러보기 좋은 곳이다. 누군가에게 취향 묻은 선물을 하고 싶다면 추천하고 싶다.


RIEDEL PERFORMANCE

미각도 장비가 필요하다

이미지 출처 : GQ KOREA

오랜 친구의 집들이에 초대받았다. 부부를 위해 특별한 선물을 하고 싶었다. 요즘 그들이 무엇에 빠져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친구와 그의 남편은 주말마다 와인샵을 생선가게처럼 드나드는 등 와인을 공부하고 마시는 취미에 흠뻑 빠져있었다. 한 때 칵테일 만드는 취미에 빠졌던 내가 만족한 유리잔 브랜드를 생각해보니 리델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리델의 유리잔은 그 자체로 명성이 높다. 디자이너가 없고 기술자들이 만드는 브랜드로 유명하다. 검색하다 보니 퍼포먼스 시리즈에 대해 알게 되었다. 리델 퍼포먼스 시리즈는 와인의 풍미를 느끼는 것에 최적화된 기술이 들어간 특별한 잔이다. 잔을 빛에 비추거나 그 그림자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입이 닿는 부분에 마치 커튼과 같은 섬세한 무늬가 들어가 있다. 설명에 따르면 이 특별한 굴곡이 와인의 공기 접촉면을 넓혀 아로마를 한껏 이끌어낸다고 한다. 사실 일반적인 미각으론 그 풍미를 분간할 수 없을 수도 있지만, 모든 게 다 기분에 달렸지 않은가? 미각에도 역시 장비빨이 필요하다. 내 예상대로 선물을 받은 친구는 행복한 얼굴로 잔에 와인을 따랐다.


Epilogue

나는 이제 [취미는 장비 빨]이라는 말에 백 번 공감하는 사람이 되었다. 취미란 사전의 뜻 그대로 [어떤 사람이 여가 시간에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 자주 하는 흥미로운 일]이다.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 시간을 들이는 것인데, 그 즐거움을 끌어올려주는 도구와 함께라면 더없이 기쁘지 않을까? 

호모 파베르(Homo Faber).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 사람들에게 세상은 한 편으론 도구 쓰는 재미이다. 오늘도 나는 이렇게 합리화를 하며 무엇을 소비할지 폭풍 검색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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