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은 불온하고 미약한 인간이 숨기에 안성맞춤의 구실이다. 그 단어만큼 사람을 취하게 하고 위안을 주는 것도 없지 않을까. 바야흐로 온 대지가 연일 봄기운을 토해내며 미혹의 자태를 뽐내던 지난 주말, 너나 없이 꽃을 향해 달려나가야만 할 것같은 눈부신 오후에 부희령 작가의 신간 소설창작집 <구름해석전문가>를 펼쳤다.
이상한 일이다. 신열처럼 들뜨게 만드는 봄의 열기에 겨우내 애써 다잡은 결심이 흐트러질까 봐 내심 경계하던 차였다. 작가가 영글어 놓은 단정한 문장이 꽃놀이 행렬을 따르고 싶은 마음을 차단시켜주었다. 책장을 덮은 뒤, 가깝게는 올해 발표한 최신작과 멀게는 2013년도 실렸던 여섯 편의 단편 가운데 <만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만주는 일본과 러시아의 군대가 차례로 스쳐 간 격동의 시공간이다. 남성적인 대서사와 역사에 대한 통찰과 정교한 지식이 없다면 쉽게 다룰 수 없는 소재였다. 한 마디로 화사한 봄날에 어울리는 말랑말랑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꽃구경이 아니더라도 넷플릭스만 틀면 달콤하고 해사하고 경쾌하고 박진감 넘치는 스토리가 천지사방 흩어지는 꽃잎만큼 널렸지만 나는 작가가 세밀하게 던져주는 좌표를 따라 만주로 향했다. 사실 언제부터인가 시대극을 본들 현대극을 본들 차이를 느낄 수 없었다. 시대극은 가벼워졌고 현대극은 덤덤해졌다. 소품과 의상만 바뀌었을 뿐 어느 시대인가가 중요치 않아진 걸까.
그래서인지 부희령 작가가 빚어낸 만주라는 시공간의 의미는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다. 과거 사람들은 분명 우리보다 더 강렬한 생명력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시대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서 단순히 예스러운 그 이상의 묵직함을 기대했다. 작가는 그들이 “시야가 분명하지 않은 시절”을 살아갔기에 그들 앞에 놓인 운명의 강도 또한 더욱 거셀 수밖에 없음을 주인공 임돈을 통해 보여주었다. 임돈의 부친 손만호는 “돈이 가장 중한 시절”이 올 거라며 콩을 팔아 소금과 젓갈을 사고 다시 땅으로 불려서 부를 축적한 인물이다. 나라와 민족의 개조를 읊어대던 큰아버지와는 달리 “손에 잡히지 않는 길, 보이지 않는 길, 언젠가는 광기나 억지로 변질되는 마음속의 길” 따위는 믿지 않았기에 임돈은 정작 높고 아득한 길도 낮고 단단한 길도 부정한다. 그는 어디선가 자신을 기다리는 새로운 세계가 따로 있으리라 믿는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부류였다.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친구의 부탁(독립 자금 전달책)을 덥석 허락한 이유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겐 그냥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외도를 의심하며 약을 집어삼키는 아내나 자신의 방임으로 세상을 떠난 딸에 대한 죄책감이 없는 새로운 세계로 갈 명분이 필요했다. 봉천행 기차의 검은 몸체를 바라보며 임돈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양 기척 없이 숨죽이고 있다가 돌연 저돌적이고 막강한 물성을 과시하는 운명”을 직감한다. 그리고 신경(지금의 장춘)역에서 패싸움을 말리다 허망한 죽음을 맞는다. 부희령 작가는 때론 차가울 만큼 냉철한 철학과 과학적인 사유를 지향하는 걸로 알고 있다. 그의 문장은 정교하고 허튼 단어 하나 함부로 적지 않는데 가끔 신기가 내린 듯한 문장들에 소름이 돋았다.
“인간의 삶이란 한번 방향이 정해지면 끊임없이 굴러갈 뿐"이라거나 "한번 존재를 드러낸 운명은 지치고 황폐해질 때까지 멈추지 않는 관성의 영향을 받음을." 혹은 “임돈은 누구의 세계에도 속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속한 사람이었다. 세상과의 아득한 거리를 모르핀 삼아 자기만의 세계로 달아나고 또 달아나는 사람이었다.”라는 문장을 읽을 때면 운명철학관의 용한 선생과 마주한 기분이 든다. 뿐만 아니라 <만주>를 역사책 한 구석에 나오는 잃어버린 옛 영토가 아니라 한복판을 거닐듯 생생하게 느껴지게 하는 치밀한 검증과 정밀한 묘사가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든다. 예를 들면 봉천역 역사 안의 제복입은 순사의 검문이나 만주 미나카이 백화점, 러시아 노인이 운영하는 카페의 서양무희들 등의 묘사는 영화 시퀀스만큼이나 시각적으로 읽힌다.
이렇게 스케일이 큰 소재가 왜 단편으로 그쳤는지 내내 의아한 마음은 속편 혹은 장편에 대한 기대를 품게 하며 맺는다. 세상의 어떤 길도 부정하고 오로지 자신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임돈은 어린 아들의 손에 들린 유골함 속에서 비로소 자신이 세상과 내내 긴밀하게 연결되었음을 깨닫기는 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