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싸움을 했다(부끄럽지만, 이 문장 없이는 설명이 안된다). 칼로 물 베기라지만 돌이킬 수 없는 말들이 오갔다. 참고 애썼던 지난 시간이 허망했고 한줌의 버틸 힘도 남지 않았다. 그때, 딸이 말했다. 엄마가 하고 싶은 걸 해봐.
타이난 즉흥 여행의 시작은 그랬다. 일상적 반경 밖으로 최대한 멀리 뛰쳐나가기로 한 것이다. 두 딸을 키우며 프리랜서 번역가로 일할 때면 늘 시간에 쫓겼고 언제나 다음, 그 다음 스텝까지 염두에 두어야만 했다. 담대하지 못한 탓인지 모든 일을 촘촘히 준비하고 계획해야만 마음이 놓였다. 그럼에도 늘 감당할 수 없는 큰 사건들이 나를 비웃듯이 여기저기서 터지곤 했다. 그사이 나는 지쳐갔고 갱년기에 이르자 딛고 있던 삶의 지반이 허물어진 듯한 절망감이 엄습해왔다. 모든 것이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쳐졌다는 생각만 가득했기에 머릿속에 그려놓은 그림이 없었다.
30년 전의 나는 달랐다. 즉흥적이고 무계획의 행운을 즐기는 동시에 추진의 동력이 있었다.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온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중화권 영화를 돌려보던 90년대, 날 것 그대로의 호방한 대륙에 반해 떠난 여행길에서 무작정 어학 연수를 등록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학업을 앞두고 갑작스레 날아온 아버지의 부고로 모든 걸 접고 귀국해야 했다. 삶은 끊임없이 인간의 계획과는 반대로 작동하는 습성이라도 있는 걸까.
<비정성시>.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등 대만 뉴웨이브 영화의 전성기는 20대의 몰락과 더불어 나와 같은 운명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그시절 화양연화에 대한 강렬한 추억은 기어이 내 등을 떠밀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낡은 동시상영 극장 의자에 등을 묻은 채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했던 스무 살의 내가 무기력한 중년의 나를 타오위안 공항에 데려다 놓은 셈이다.
숙소와 기차편만 예약한 상태로 여행 고수들만 간다는 타이난을 여행지로 선택했다. 전날밤 감기 몸살 증상으로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던 건 마침 아버지의 기일이 돌아온 탓도 있었다. 아빠 기일에 맞춰 하필 여행을 가냐는 동생의 핀잔을 들었지만 돌아가신 아버지 나이에 가까워지는 나는 속으로 항변했다. 하필 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다른 삶을 살지 않았을까. 왜 중국이 아니고 대만인지 왜 타이베이가 아니고 타이난이냐는 질문은 의미가 없었다.
이상하게도 타오위안 공항에 내린 것만으로 켜켜이 쌓인 회한이 씻겨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어디를 꼭 가야하고 무엇을 해야만 한다는 욕구가 일지 않았다. 출국장 게이트를 빠져나가는 사이에 깨달음이 몰려왔다. 코앞에 닥친 일들을 처리하고 사느라 오랫동안 마음으로만 이곳을 그려왔으나 막상 와보니 헛헛한 마음이 쌓아올린 신기루 였음을. 나는 공간이 아니라 시절을 그리워했던 거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엄마의 소원을 풀어주기 위한 딸들의 전격 지원없이는 성사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딸들과 함께 한 이상 섣부른 실망의 기색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일단 환전소부터 찾았다. 첫 미션은 미화 달러를 타이완 달러로 환전하기. 화폐 단위에 대한 감이 전혀 없어서 망설이는 사이에 차례가 왔다. 입에 맴도는 중국어를 떼기도 전에 환전소 직원은 타이완 달러 1000원권 뭉치와 동전 몇 개를 건네주었다. 그걸로 이지카드(교통카드)를 구입하고 현금을 충전한 후에 편의점에서 현지 풍미의 간식거리를 구입했다. 타오위안 공항에서 MRT를 이용하여 고속철(HSR)까지 이동한 다음 매표소에서 티켓을 수령, 객차 안에 탑승하자 그제야 여유로운 마음이 들었다. 파파야 우유와 러우송미엔빠오(肉松麵包)를 테이블 위에 부려놓은 채 구글맵을 켰다.
타이난은 타이완의 옛 도성으로 유럽 열강과 일본의 잔재가 많은 반면에 진보성향이 강한 도시라고 한다. 나는 그저 발길이 닿는대로 낡은 도시를 거닐다가 서점이나 카페, 맛집을 찾아가기로 했다. 유적지나 핫플은 관심밖인 데다 2박 3일의 일정상 모두 소화하기에는 여러 지구에 걸쳐 분포되어 있었다.
타이난은 4월 하순임에도 30도를 육박했다. 걸치고 있던 얇은 점퍼를 벗고 민소매 차림으로 다녔지만 이마엔 땀이 맺힐 만큼 뙤약볕이었다. 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이라 금방 지쳤지만 여행 내내 하루 2만보 넘게 걸었을 만큼 쉴 틈없이 쏘다녔다.
숙소 체크인을 마친 뒤 딸들과 공자묘와 타이난 국립 미술관을 돌아보기로 했다. 우리가 도착한 시간은 클로징까지 겨우 20분을 남겨두고 있었기에 슬렁슬렁 주변을 산책하다가 건물 구조가 고스란히 드러난 낡은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기대하지 않았던 개성있는 샵과 단정한 카페, 친절한 사람들을 만났다. 그런 거라면 한국에도 많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전혀 예상치못한 장소에서 펼쳐지는 동화같은 풍경이었으니 얼마든지 후한 점수를 주고 싶었다. 선의와 진심이 느껴지는 친절과 환대는 낯선 곳을 두리번거리는 이방인들을 무대 위 주인공으로 만들어주었다. 타이난 골목탐방은 삶의 여정과 닮은 부분이 있었다. 중국 속담에 "향기로운 술은 골목이 깊은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입구에 들어설 때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들이 좁고 구불구불한 길 끝에 있었다. 우리의 삶 또한 미혹으로 가득하기에 끝까지 가봐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지 않을까. 첫날의 근사한 저녁 식사를 위해 검색해놓은 식당을 찾느라 한참을 걸었는데도 비슷비슷한 골목을 여러 번 돌고 있을 때, 마침 옆을 지나치던 현지인들의 목소리가 귀에 쏙 들어왔다.
"워먼 미루러!(우린 길을 잃었어 我们迷路了)"
문득 단순하지만 막힌 길이 뚫린 듯한 문장이 떠올랐다. 여행자만이 아니라 누구나 길을 잃을 수 있다. 더구나 그들의 표정은 전혀 길을 잃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어디로 가든 새로운 길과 이어질 테니까, 결국은 목적지에 다다를 것을 믿으니까 거미줄처럼 복잡한 골목에서도 그들은 행복해보였다. 길을 잃은 느낌이 들 때마다 나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채 제자리에 웅크리고는 했다. 혹시 내가 맴돌고 있는 어느 지점을 벗어나기 위해서, 저들처럼 두려움 없이 걸어가라고 이 여행이 시작된 건 아닐까.
오랫동안 나를 옭아맸던 회한을 끊어내는 과정에서 나는 또 다시 상념의 여행자가 되었다. 나를 힘들게 했던 건 나쁜 카드를 뽑아서가 아니라 손에 쥔 모든 카드가 지독히 나쁜 패만 있다는 절망감 때문인지도 모른다. 왠지 나쁜 카드 이후에 나올 좋은 카드를 들고 다음 스텝으로 훌쩍 건너뛸 힘을 이 골목에서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저 골목에서 튀어나온 얼룩말과 마주친들 이미 놀라울 일도 아니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