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초년생 딸에게 보내는 편지
너는 오늘도 늦은 밤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한 시간에 두 대뿐인 간선버스와 지하철 급행 노선을 번갈아 타야 하는 출퇴근길을 이미 십 년은 반복한 듯, 지친 얼굴이었지. 침대맡에 비스듬히 기대어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너의 고개가 어느 틈에 푹 꺾이더구나. 까무룩 잠든 모습에서 왜 너의 1년 전 얼굴이 떠올랐을까.
공들여 준비했던 미국 인턴십에 최종 선발되던 날, 환호를 지르며 기뻐하던 네가 꿈꾸었던 미래에는 오늘도 포함되어 있을까. 변덕스러워도 좋을 중학생 시절에 디자이너를 장래 직업으로 정한 뒤로 너는 한 번의 흔들림도 없이 꿈을 향해 달려왔지. 하지만 거대한 조직도 안에서 네 전공에 대한 다른 부서의 이해 부족을 경험할 때나 갑작스러운 야근으로 저녁 약속을 취소하거나 실컷 늦잠 자도 부족할 주말에 북한산 정상에 올라 팀원들과 막걸리를 마셔야 하는 일들이 너의 꿈을 현실에서 밀어냈을까. 어느 날부턴가 퇴근 후의 너는 푸념을 늘어놓거나 혹은 말수가 줄거나 하면서 어떤 보이지 않는 것과 줄다리기를 하는 것처럼 보였어.
1년 전 새벽, 인천 공항 출국장을 빠져나가며 환하게 손을 흔들던 그 날을 너는 기억하고 있을까.
섣달그믐의 공항은 낯선 곳에서 새해 첫날을 시작하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차고 묵직한 공기가 꽤 을씨년스러웠지만, 너의 뺨은 상기되어 있었지. 성실함을 무기로 스무 해를 살아왔던 너를 태운 비행기가 활주로 위로 날아오를 때 문득 오래된 기억의 한 장면이 떠오르더구나.
중국 천진항으로 향하는 대형 페리의 갑판 위에 서서 검푸른 바닷물이 인천항의 도크 안으로 차오르는 장면을 바라보던 나는 아마 지금 네 나이였을 거야. 난생처음 눈앞에 펼쳐지는 망망대해 저 너머의 거대한 세계가 나를 향해 문을 활짝 열어주는 듯했었다. 중국과의 정식 수교가 있기도 전이었고 내 손에는 어디에 꼽아도 좋을 깃발 하나가 들려있었지.
작년 초, 코로나의 대창궐로 인해 더 이상의 인턴쉽 수행이 어려워졌을 때 뉴욕 현지에 있던 너는 귀국 일자를 미루며 매일 밤 고민 중이었지. 감염병보다 무서운 도시 봉쇄를 겪으면서도 엄마처럼 후회하고 싶지 않으니까 어떻게든 버텨보겠다고. 너의 계획과 의지와 무관하게 갑자기 국경이 닫히고 세계가 사라져버린 현실을 받아들이자니 네 모든 꿈이 물거품이 되는 기분이라고.
결국 귀국편 비행기에서 새롭게 진로를 고민했을 너를 떠올리면 유학 포기 이후로 늘 차선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예전의 내 모습이 겹쳐졌다. 삶에서 우리는 과연 최선의 선택만 하고 살아갈 수 있을까. 현실은 어쩌면 꽃 자수가 놓인 손수건처럼 뒤집어 보면 울퉁불퉁한 매듭 자국투성인지도 몰라.
엄마는 가끔 네 블로그를 찾아가 들여다보곤 해. ‘배가 고팠다’라든지 ‘호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면’이라는 문장들은 '용돈을 올려 달라'는 말로 읽혀서 혼자 웃기도 한단다. 오늘은 너의 짧은 뉴욕 체류 기간의 사진들을 훑어보다가 네덜란드 교환학생 시절까지 페이지를 거슬러 올라갔지. 한 장의 사진에 유독 내 눈길이 머물더구나. 네덜란드 기숙사 앞 정류장에서 버스를 놓친 네가 다음 버스를 기다리며 찍은 하늘 사진이었어. 르네 마그리트 그림처럼 몽환적인 색감의 하늘과 검은 전광판이 무척이나 인상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었지.
너는 이제 깊은 잠에 빠진 것 같구나. 혹시 희망과 설렘으로 가득했던 교환학생 시절, 53번 버스를 기다리는 꿈을 꾸는 건 아니니? 살아가는 동안 우리 앞에 펼쳐지는 모든 풍경이 꽃길은 아닐 거야. 하지만 네가 여전히 달리고 있는 한은 원하는 목적지에 무사히 도달할 수 있지 않겠니? 딸, 행운이 늘 함께 하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