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의 시대에 감성으로 고전을 읽는 법
덜컹거리는 기차가 멈추자 혼곤하던 시마무라의 눈빛이 반짝인다. 삶에 대한 진지함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 없는 얼굴로 내내 무표정하던 그였다. 그에게 생기를 불어넣은 건 병자로 보이는 젊은 남자를 정성껏 돌보던 요코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목소리이다. 차창을 열어젖히고 역장을 부르는 요코의 목소리는 찬 공기 탓인지 멀리 퍼져나가지 못하고 객차 안으로 되돌아와 시마무라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짐짓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시마무라의 두 눈은 차창 너머의 눈세상을 홀린 듯 바라보고는 있지만 실은 유리창에 반사된 요코의 일거수일투족에 온 신경을 곤두세운다.
한 겨울, 온천장에는 혼자 겨울 산행을 즐기다 사람이 그리워지면 굶주린 겨울 짐승처럼 마을 여관에 장기 투숙하는 무위도식 한량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들이 한번 왔다 사라질 때마다 산촌의 순진한 처녀들은 물론이고 남자의 속성에 닳고닳은 게이샤들까지도 한동안 마음을 잡지 못했다.
시마무라도 그랬다. 지금처럼 스키철이 아니라 신록의 등산철에 온천장을 찾아왔던 그는 순수할 만큼 "벗은 마음"을 고스란히 내보이는 고마코에게 알 수 없는 감정을 품는다. 내면의 양가 감정을 느끼던 그는 다른 게이샤를 소개해달라고 부탁하며 이렇게 말한다.
"어린 사람이 좋아. 어린 편이 무슨 일이건 실수가 적겠지. 시끄럽게 떠들지 않고 약간 멍청해도 때묻지 않은 쪽이 좋아."
설국이 완결되었던 1948년에 박제되어야 할 이 대사는 2021년인 지금도 똑같이 재생되고 있다. 어린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들의 심리를 짐작해본다. 성숙하고 대등한 관계보다는 자신이 우월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관계를 원하는 남자들은 스스로 신적인 존재가 되길 원한다. 그래서 "산뜻한 기분으로 대화를 나눌" 대상과 "양심의 가책없이 가볍게 끝낼 수 있는" 대상으로 여자를 구분한다. 이처럼 어리고 멍청한 여자를 원하는 남자들의 내면에는 자신들의 실수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하다. 여자들은 이제 남자들의 "백치미 타령"이 자신들의 미성숙을 드러내는 필터일 뿐임을 모르지 않는다. 페미니즘이 온통 세상을 덮어버린 시대에는 위대한 거장의 노벨 문학상이라는 타이틀마저도 작품의 온전한 감상을 방해한다. 그러나 어린 시절 숱한 죽음을 목도한 탓에 일찍이 삶의 유한함과 인생의 덧없음에 체화된 가와바타의 허무주의를 조금 더 너그러운 시선으로 보기로 한다.
주인공 시마무라는 스스로를 "오래갈 리가 없는" "여행자일 뿐"이라면서 본능적인 방어막을 치는 데만 능숙한 모습을 보인다. 허망하게 사라질 그 무언가가 두려워 서둘러 온천장을 떠났던 그는 1년 사이에 게이샤가 되어버린 고마코 앞에서 "애당초 오직 이 여자를 원하고 있었음에도 여느 때처럼 먼 길을 빙빙 돌아 온" 자신을 경멸한다.
고마코는 "누가 세밑에 이런 추운 델 찾아오겠나"라면서 진심 한 조각을 내보이는 시마무라에게 어이없게도 감동한다. 그가 떠난 후로 날자를 세어가며 기록한 일기 또한 시마무라에게는 조롱과 비웃음거리일 뿐이다. 그러나 시마무라는 "그런 걸 기록해놓은들 무슨 소용있나?" 라고 되묻는 동시에 고마코의 모든 노력이 "헛수고"로 돌아가버릴 것이라는 생각에 짙은 연민과 죄책감을 느낀다.
온천장에 머무는 동안, 시마무라는 안마사로부터 기차에서 보았던 요코와 고마코가 연적 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 번민을 더해간다. 이러한 번민은 두 여자에게 동시에 향하는 연정의 불쏘시개가 될 뿐이다. 가와바타의 문장 속에서 시마무라가 여자를 인식하는 방식은 지극히 감각적이고 탐미적이며 육화적이다. 고마코와 요코가 한 남자에게 바치는 순수한 열정과 헌신은 거룩하고 성스럽게 다뤄지기 보다는 한낱 미물의 한살이처럼 허무하게 그려진다. 시마무라는 다다미 위에서 죽어가는 벌레들을 바라보며 무소불위의 조물주 시선으로 "어째서 이토록 아름다운가"라고 한탄한다.
설국의 고마코와 요코의 이미지는 인격화되지 못한다. 시마무라의 시선을 통해 마치 희소성 있는 도자기를 감상하는 수집가의 손길 아래 관음적이고 물성적으로 비춰질 뿐이다. 소설의 서두에서 고마코를 "손가락이 기억하는 여자"라고 표현하는 장면에서 여성을 말초적인 감각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음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렇듯 설국 속의 여성은 감각적인 이미지로 소비되고 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고마코와 요코는 시마무라에게 뮤즈도 아니고 구원의 여신도 아니다. 이 작품이 어떻게 노벨문학상을 받을 수 있었을지 의문이 치솟기도 한다. 왜냐하면 2021년은 페미니즘이라는 폭설에 갇힌 시대이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가 고전을 읽는 이유를 설국을 통해서 재발견하려고 한다. 하나의 가치가 온 세상을 뒤덮을 수는 없다. 만약 그렇다면 문명 이전보다 더 원시적이고 폐쇄된 사회라는 반증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가와바타라는 작가의 생몰 연대와 전쟁의 암울한 시기를 감안하여 설국이라는 작품을 읽는 것이 고전작품의 존재 이유가 아닐까 한다. 설국은 문명을 향해 질주해온 인류가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대자연의 원초적 풍경이자 눈이라는 은세계에 투영된 인간의 허무한 생에 대한 거장의 애틋한 시선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