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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닥의 생각 Aug 28. 2021

두더지 아빠의 고향

서울시 중랑구에서의 이야기

1983년 서울의 끝자락 중랑구, 연탄 공장과 시멘트 공장 사이에서 태어났다.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내가 태어날 당시 중랑구라는 지명은 없었다. 1988년 중랑천을 기준으로 동대문구가 분구되면서 중랑구가 서울의 마지막 25번째 자치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가운데 ‵중‵, 물결 ‵랑‵, 이름은 청정 하지만 이곳은 경춘선의 시작점으로 강원도의 광물이 서울로 들어오는 진입로였다. 그래서 나는 어린 시절부터 먼지 자욱했던 ‵삼표 연탄‵과 ‵천마표 시멘트‵의 위용을 보면서 자랐다. 비록 도시가스의 공급과 각종 개발로 연탄과 시멘트의 영광은 사라졌지만 아직도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에게 우리 동네는 ‵망우리 공동묘지‵와 ‵상봉터미널 동네‵로 기억되기도 한다.


서울서 나고 자란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집값 상승의 혜택도 제대로 못 본 사람들은 더욱이 그렇겠지만 지역적 정체성이나 애향심 이란 것이 타지역 사람들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서울에서 추억을 간직하기에는 모든 것이 너무나 빨리 변했고,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고향이라는 생각보다는 벼텨내고 쟁취하지 못하면 언제라도 밀려나고 도태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사는 것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삶을 윤택하게 하듯이 나는 사는 곳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집값 상승과 개발 호재에 대한 기대감으로 살아내기 보다는 뭔가의 애정이 담긴 나의 의미로 살아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살던, 그리고 살고 있는 곳을 추억해 보고 싶었다.


나의 어머니는 충북 옥천에서, 아버지는 전북 군산에서 올라와 이곳에 정착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어린 시절에 서울로와 정착을 했기 때문에 고향에 대한 향수와 추억이 없었지만 어머니는 시골집에 부모님과 7명의 동생을 남겨둔 여공으로 서울살이를 시작했기에 고향에 대한 향수를 품고 있었다.


산업화의 끝자락과 민주화의 시작점에서 어머니는 경부선을 타고, 아버지는 호남선을 타고 와 이곳 서울에서의 삶을 시작 했을 것이다. 가진 것 없고 연고도 없던 젊은 부부의 서울살이는 귀동냥으로 들은 소리로 서울의 가장 변두리, 제일 저렴한 동네를 찾게 했을 것이다. 사글세와 전세를 전전하며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이사를 다닌 기준은 이랬다.


도둑이 들지 않고, 집 안에 화장실이 있고, 장마철에 방안으로 물이 들어오지 않으며, 벽지와 장판에 곰팡이가 피지 않고, 바퀴벌레나 쥐가 없으며, 집주인의 갑질이 적은 한편, 보증금 떼일 걱정이 없는 집. 우리는 아슬 아슬하게 그럿곳에서 살았다. 비록 집 밖에 화장실이 있었지만 두 집만 같이 썼던, 좀 도둑은 있었지만 큰 도둑은 없던, 쥐약만 잘 놓으면 집안으로 쥐가 들어올 일은 없고, 장마철에 집안으로 물은 밀려 왔지만 무릎 위로는 올라오지 않았던 그런 지하방 이었다.


동네에는 모두 우리 같은 집, 우리집 같은 형편의 이웃들이 었다. 그 골목의 아침은 늘 분주했다. 도시락 반찬 빌리기, 학용품 빌리기, 준비물 사갈 돈 빌리기 등 마치 하나의 골목 공동체 같은 곳이었다. 아이들은 이 골목을 나와 학교로 향했다. 학교 역시 분주하기는 마찬가지 였다. 한 반에 60명이 넘는 학생들을 콩나물 시루처럼 모아뒀지만 그 역시도 공간이 부족해 학교는 오전반과 오후반 수업으로 나눠 진행 했다.


학교가 끝난 아이들은 엄마가 일하는 미싱공장이나 식당 앞에서 놀았고, 그나마 집에서 부업을 하는 엄마를 둔 아이들은 집 앞 골목에서 놀았다. 게임기도 없고, 스마트폰도 없고, TV도 없는 골목길 이었지만 뭘 그리 재밌게 놀았는지 모르겠다.


유일하게 누릴 수 있는 문화적 요소는 교회에 있었다. 찬송가로 노래를 배우고 기타나 피아노 같은 악기들이 실제로 연주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교회에서 하는 성탄전야제나 문학의밤, 그리고 한번씩 있는 문화공연등이 이 곳의 아이들이 눈치보지 않고, 돈 내지 않고, 또 직접 참여 할 수 있는 유일한 문화적 혜택이었다. 교회의 인형극에서 풍선이 터지면서 악마가 나타난 장면의 충격은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미싱공장 시다, 식당 아줌마, 가발뜨는 아줌마로 불리던 젊은 엄마들은 틈틈히 노는 날에 골목의 아이들을 데리고 소풍을 갔다. 자주 가는 곳이라고는 집앞에서 버스타고 한번에 갈 수 있는 인근 동네의 태릉, 동구릉, 혹은 망우리 공동묘지 였다. 돈 받지 않는 누군가의 무덤일 뿐이었지만 골목을 벗어난 아이들은 수건돌리기, 숨박꼭질,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등을 하면서 해가 질때 까지 놀았다.


가난하지만 행복했다고는 할 수는 없다. 그래도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이유는 비교의 대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가용을 가진 집도 없었고, 특출나게 잘 사는 집이 없던 고만 고만한 환경이었기에 상대적 박탈감이란 것이 없었다. 다만 누구네 집에는 유선 방송이 나오고, 누구네 집에는 비디오가 있었고, 누구네 집 아빠는 오늘 저녁에 통닭을 사왔다 정도가 유일하게 느끼는 차이점 이었다.


부모들에게 그 골목은 애정의 장소이자 또 벗어나고 싶은 공간이었을 것이다. 인근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오면서 하나 둘 씩 골목을 떠날수 있었다. 어느 한 집이 이사를 가는 날이면 동네 엄마들은 골목에 나와 웃으며 울었다. 살림펴서 이사 가는 이웃을 축하해 주면서 웃었고, 헤어지는게 아쉬워 울었고, 집에 들어와서는 우리는 언제 이사가나 하는 마음에 지하방도 꺼질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집은 그 골목의 마지막을 지켰다. 우리가 그 골목을 떠나는 날 엄마는 호떡장사 하던 집주인 할머니의 손을 잡고 울었다.


골목을 떠나온지 20년도 훨신 지났다. 비록 버스로 다섯정거장 거리에 살고 있지만 그 사이의 동네의 변화는 어린시절의 내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동춘 서커스가 공연했던 복개천은 대규모 브랜드 아파트 단지가 들어왔고, 삼표연탄과 천마표 시멘트 부지는 초고층 주상복합이 들어섰다. 어린시절 공포특급의 단골 주제였던 망우리 공동묘지도 역사문화공원이 되어 이제는 밤이고 낮이고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 되었다.


얼마전 6살된 딸아이와 그 골목을 지났다. 내가 살던 지하방이 있던 다세대 주택은 이미 오래전에 빌라가 되어 있었다. 아이에게 "여기가 아빠가 어렸을때 살던 곳이야" 라고 말해 주자 아이는 빌라를 올려다 보더니 "아빠는 몇층에 살았어?" 라고 물었다. 천천히 빌라를 둘러보던 나는 아이의 그 간단한 질문에 바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필로티 구조로 세워져 1층을 주차장으로 사용하던 그 빌라에는 지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주차장 바닥을 내려다 보면서 "아빠는 이 아래에 살았어" 라고 말해 주었다. 아이는 이해 할 수 없는 표정을 짖다가 "여기는 땅이잖아 아빠 두더지였어?" 라며 땅파는 두더지 흉내를 내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웃고 말았지만 묵직한 울컥함이 밀려왔다. 내 유년 시절의 모든 추억이 이제는 다시 꺼내 볼 수 없는 주차장 아래로 뭍혀버린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 골목의 이웃들, 그리고 우리 가족도 참 두더지 처럼 열심히 살아냈다. 추억할 곳도 사라지고 또 자식에게 보여줄 것도 남아있지않은 골목 이지만 이 동네가 나의 고향이다. 그 골목에는 치열하게 살아온 나와 우리 가족, 그리고 이웃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흔적이 고향에 대한 나의 애뜻함이다.



: 계간 문학마당 52호에 올린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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