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더 에이트 쇼>
단순히 '오징어 게임' 같은거라고 예상했는데 막상 마주한 작품은 그보다 더 차갑고 더 은유적이다.
주식 빚에 진수는 결국 양화대교 난간으로 올라가고 만다.
그리고 "당신의 시간을 사고 싶다"는 메시지.
만약 시간을 돈으로 살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더 에이트 쇼>는 그 세계를 이땅에 가져온다.
돈이 곧 시간이 되는 세계.
<더 에이트 쇼>는 단순한 규칙으로 거대한 세계를 만든다.
8개의 층, 8명의 참가자, 그리고 1분마다 쌓이는 돈.
규칙은 쉬워보였다. 그저 버티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이 '버티기'가 누구에게는 축복이고 누구에게는 형벌이라는 걸 그들은 곧 알게 된다.
진수가 배정된 3층은 분당 3만 원.
반면 1층은 분당 1만원이고,
피보나치 수열에 의해 설계된 8층은 분당 34만 원에 방의 크기와 채광까지 비교 불가다.
분당 1만원, 3만원에도 행복했던 그들은 상대적 박탈감에 놓인다.
이건 불공평하다고 외친다.
같은 건물에 있지만, 서로 다른 차원의 삶.
그 곳은 자본주의의 축소판이다.
돈이 쌓이는 속도, 방의 크기, 자원의 분배 방식 그리고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인물들의 업무분장까지.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이미 익숙한 세계의 모순을 그대로 닮아 있다.
작품을 보면서 가장 강하게 느낀 점은 감독이 의도적으로 관객의 감정이입을 차단해 놓았다는 것이다.
3층을 제외한 참가자들의 과거는 단편적이고 인물의 사연은 필요한 만큼만 슬쩍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보이지만 결코 그들에게 닿지 못한다.
마치 쇼를 설계한 이의 옆에 서 CCTV 너머에서 인간 군상을 관찰하는 느낌마저 받는다.
이 거리감은 작품의 메시지를 더 선명하게 만든다.
감정이입 없이 인간의 선택을 바라볼 때,
자본주의적 관계의 잔혹함이 더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가장 핫한 배우 박정민이 연기하는 7층의 캐릭터는 조금 달랐다.
강남좌파라는 그의 별명처럼 그는 높은 층에 속하면서 아래층 사람들과 어울린다.
정의를 말하고, 양심에 거리낌은 있지만 실제 행동은 기득권의 위치에 있다.
스스로를 모순적이라고 여기면서도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그는 현실을 선택한다.
'죄송합니다'
극의 후반부 그가 입버릇처럼 내 뱉는 대사다.
도덕적 고민과 현실적 욕망 사이,
우리는 '죄송하다'를 외치며 우리의 선택을 합리화 하곤 한다.
한재림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시대에 '재미'란 무엇인가 고민했다."
작품 속 참가자들이 그분에게 쇼를 제공하듯, 현실의 감독은 시청자에게 콘텐츠를 제공한다.
이중 구조가 겹쳐지면서 <더 에이트 쇼>는 단순한 장르물에서 벗어나 콘텐츠 소비의 구조 자체를 비추는 은유가 된다.
우리는 무엇을 보면 재미를 느끼는가?
폭력? 반전? 경쟁? 파국?
돈의 속도에 인간은 계속 잠식되어 가고
더 많은 돈을 위해 협력과 배신을 오간다.
계속 수위가 높아지는 인물들의 게임을 보여주는 이유는 아마도 그 질문을 관객에게 되돌려주기 위함인 것 같다.
당신은 이것이 재미있는가?
뭔가 반전을 기대했는데 인물들은 약속대로 게임을 마치고 돈을 받고 현실로 돌아간다.
아마 그들은 바닥을 치고 올라가 다시 자신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층에서 살아간다.
어떤 층은 넓고 밝고 여유롭고,
어떤 층은 비좁고 어둡고 불평등하다.
과연 그 차이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 걸까?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사이 이미 누군가의 규칙 속에서 우린 존재해 온 것일까?
버티는 것이 일상이 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쩌면 이미 각자의 층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층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이들도, 그 층에 만족하여 오래 머물고 싶은 이들도, 그 구조를 깨부수기 위해 오늘도 노력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시간이 곧 돈이 되는 세계에서 인간은 무엇으로 남는가.
진수가 받았던 문자처럼 작품은 끝까지 묻는다.
당신은 어떤 인간입니까?그런 당신의 시간은 얼마입니까?
작품은 배진수 작가의 머니게임과 파이게임을 원작으로 한다.
그래서 작품 속 주인공의 이름도 '배진수'이다.